인권오름

[인권하루소식] [인권, 영화를 만나다] '독립'을 포기한 KBS 독립영화관

선관위 압력에 <돌 속에 갇힌 말> 방영 취소

한국방송(KBS)의 독립영화 소개 프로그램 '독립영화관'에서 87년 구로항쟁을 다룬 다큐멘터리 <돌 속에 갇힌 말>의 방영을 갑작스레 취소하고 이를 감독에게 일방적으로 통보해 물의를 빚고 있다. 게다가 구로구청 부정투표함 사건의 관련기관인 서울시 선거관리위원회(아래 선관위)의 입김이 <돌 속에 갇힌 말> 방영 여부에 영향을 끼친 것으로 드러나 감춰진 한국 현대사의 복원을 위한 노력이 꾸준히 이행되는 흐름에 찬물을 끼얹는 꼴이라는 비판이 일고 있다.



돌 속에 갇힌 말 스틸 사진 [출처] 제9회 인권영화제




올해 인권영화제 상영작이기도 한 <돌 속에 갇힌 말>은 87년 대통령 선거 당시 구로구청에서 발생했던 부정투표·폭력적 시위진압 등의 사건 면면을 파헤치면서, 얼룩진 한국 현대사의 몸통을 체험한 감독 자신에게 각인된 폭력의 기억을 말하는 다큐멘터리다.



'독립영화관' 측은 <돌 속에 갇힌 말>을 6월 9일자로 방영한다고 홍보했을 뿐 아니라 관련 내용의 사전 녹화까지 완료한 상태였다. 하지만 방영예정일 오전에 감독에게 취소 결정을 알렸고 시청자들에게는 홈페이지를 통해 "축구방송 관계로 한 주 쉬게 되었다"고 간단히 공지했다. 이후 작품의 갑작스런 방영 취소에 대한 항의가 봇물처럼 밀려들자, 14일 홈페이지를 통해 "방송 당일까지 계약이 미완료 되었고, 해당 작품에 대해서 서울시 선관위가 이의를 제기, 해당기관의 명예훼손과 방송금지가처분 등이 예상되어 방영이 취소되었다"고 사과했다.



그러나 '독립영화관' 측이 방영 취소의 이유로 계약 미완료를 드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계약서 작성 과정에서 나루 감독은 "계약서 내용에 '주문형 비디오'(VOD) 서비스 제공이 포함돼 제작팀과 계속 협의하고 있었을 뿐 계약서 작성 자체를 거부한 적은 없다"고 밝혔다. 또 계약서를 작성하지 않고 '독립영화관'에 국내 작품이 방영된 선례도 있다고 알려져 계약서 작성 문제는 방영 취소의 중요한 이유는 아니라는 지적이 일고 있다.



KBS '독립영화관'의 홈페이지




오히려 주된 이유는 구로구청 부정투표함 사건 자체를 부인하는 선관위의 압력으로 보인다. '독립영화관'의 서병철 프로듀서는 "<돌 속에 갇힌 말>의 9일 방영이 취소되고, 16일 방영을 고려하던 중 서울시 선관위에서 '구로구청에서 부정투표함 및 반출 부정이 없었다'는 89년 대법원 판례를 제시한 공문이 도착했다"고 입을 떼었다. 또 선관위 측이 전화로 "만약 작품이 방영 된다면 방송금지가처분신청을 낼 것"이라고 주장했는데, 법원 판결이 내려질 때까지 방송이 유보될까봐 이를 감당하기 어려웠다는 것. 결국 청산되지 못한 현대사가 '말하려는 자'의 입을 틀어막은 셈이다.



선관위 김범식 홍보과장은 "<돌 속에 갇힌 말>은 87년 대선 당시 구로구청에서 부정투표가 발생했다고 바라보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라고 영화의 내용 자체를 부인했다. 그는 "문제가 되었던 투표함은 부정 투표함이 아니며, 투표함을 반출했던 행위 역시 사무실이 협소했기 때문에 이를 개표장으로 옮기는 과정이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지난 2001년 5월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는 당시 부상한 김병오 씨를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한 바 있어 선관위가 군사독재 시절의 판례를 근거로 드는 것은 억지스럽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김 홍보과장은 "작년 말부터 <돌 속에 갇힌 말>이 영화제 등에서 상영된다는 사실을 알았는데, 영화를 접할 사람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그냥 넘어갔다"고 밝혀 영화의 행보를 계속 주시하고 있었음을 인정했다. 공중파를 통해 작품이 공개되면 "국민들이 충분히 오해할 소지가 있기 때문에" KBS에 공문을 보내는 등의 조치를 취했다는 것.



이에 대해 나루 감독은 "기본적인 의견 수렴 과정조차 거치지 않고, 일방적으로 기관의 입장을 방송사에 통보하는 태도를 납득할 수 없다"며 "만약 이전부터 작품의 제작과 상영 여부를 알고 있었다면 사건을 둘러싼 선관위의 입장을 좀더 솔직하게 밝혀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했다. 영화가 제기하는 의혹에 선관위가 동의하지 않는다면 관련 자료들을 투명하게 공개하고, 풀리지 않는 실마리를 규명하기 위해 최소한의 노력이라도 기울여야 했었다는 것.



감독은 "작품을 제작하면서 선관위의 입장을 들으려 시도했으나, 부정투표 사건에 관하여 답변을 해줄만한 사람이 없다는 말만 들었을 뿐"이라고 덧붙였다. 또한 "구로항쟁 참여자이자 작품에서 인터뷰 대상자로 등장한 한 노동자는 주변 친인척 등에게 방영 사실을 알리며, 지금까지 입을 열지 못했던 속내의 상처를 나누기를 바랬는데, 그런 사람의 소망이 짓밟혀서는 안된다"고 호소했다.



한편 나루 감독과 독립영화 관계자들은 우선 KBS 책임자를 상대로 면담을 시도해 구체적인 해명을 요구한 다음 이후 대응 방안을 모색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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