핀란드역에서

[러시아혁명 100주년] 자코뱅 온라인시리즈 (3)

레닌이 100년 전 4월 16일[구력으로는 4월 3일], 러시아 페트로그라드에 있는 핀란드역[1]에 도착했다. 이제 볼셰비키의 전략과 러시아혁명의 경로는 바뀌게 된다.

[출처: Jacobin Magazine]

블라디미르 레닌이 백 년 전 스위스에서 독일을 거쳐 그 유명한 ‘봉인열차’를 타고 페트로그라드에 도착했을 때, 국제정세나 전선의 상황은 안정을 찾은 것으로 보였다.

새로 구성된 임시정부와 반란에 나선 대중들 사이에 일시적으로 휴전이 이루어졌다. 2월 혁명을 나은 가장 중요한 쟁점인 전쟁문제가 이 휴전 아래 은폐되어 있었다. 임시정부의 호전적인 군사적 야망이 드러나면서 발생한 ‘4월’ 시위들은 혁명이 여전히 활력에 차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2월 혁명 이후 니콜라이 2세는 체포됐고 임시 정부가 구성됐다. 임시정부 수장은 게오르기 리보프 대공이었다. 그는 옛 차르 정권과의 마지막 끈을 대변하는 상징적인 인물이었다. 임시정부는 자유주의자들이 지배했는데, 이들은 자신들에게 권력을 가져다 준 혁명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외무부 장관은 카데트당[입헌군주당]의 역사적 지도자인 파벨 밀류코프였고 전쟁장관은 10월당 당원이자 두마(국가의회) 의장인 알렉산드르 구치코프[2]였다. 법무장관은 사회혁명당의 알렉산드르 케렌스키로 내각에서 유일한 사회주의자였다.

새 정부의 주요 임무는 삼국동맹을 이루고 있던 영국·프랑스·러시아 자본가들에게 전쟁을 계속하겠다고 확실하게 보장하는 것이었다. 밀류코프는 한 프랑스 언론인에게 이렇게 말했다. “전쟁 승리의 걸림돌들을 제거하기 위해 러시아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2월의 혁명 투쟁은 1905년 혁명처럼 소비에트라 불리는 민주적으로 선출된 노동자위원회를 창출했다. 이번에는 병사들도 소비에트에 포함됐다. 소비에트는 페트로그라드에서 처음 생겨 러시아제국 모든 지역으로 확산됐다.

3월 1일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는 명령 1호를 발표했다. “두마 군사위원회가 내리는 명령은 노동자·병사 소비에트의 결정과 명령과 모순되지 않을 때만 집행될 것이다.”

또한 2월 혁명은 새롭고 유래 없는 자유를 가져왔고 계속되던 경찰의 폭압을 종식시켰다. 영국 언론인 모간 필립스 프라이스[3]는 4월 6일 모스크바에 기차를 타고 도착해서 이렇게 썼다.

나는 도로를 걸으며 과거 여기에 왔을 때와 달라진 점을 바로 깨닫게 됐다. 단 한 명의 경찰이나 헌병도 볼 수 없었다. 그들은 모두 체포되거나 전쟁터의 소규모 부대로 보내졌다. 모스크바에는 경찰이 전혀 없었고 경찰 없이도 매우 행복하게 잘 지내는 것처럼 보였다.

사회주의 세력들이, 특히 멘셰비키가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를 주도했다. 멘셰비키 활동가들은 부르주아지가 확실히 임시정부를 통제해야 하고 러시아 노동자계급은 단순히 이 새로운 임시정부가 너무 우경화하지 않도록 압박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멘셰비키는 러시아가 사회주의혁명을 할 준비가 돼있지 않다고 생각했다. ‘이중권력’ 상황이 빠르게 형성됐다. 한편에는 자본가들과 지주들을 대변하는 임시정부가 있었고 현실에서 권력은 소비에트와 노동자계급 손아귀에 있었다.

3월 23일 미국이 전쟁에 뛰어들었다. 같은 날 페트로그라드에서는 2월 혁명 희생자들의 장례식이 치러졌다. 80만 명이 마르스 광장으로 행진했다. 1917년 가장 큰 집회였다.

레온 트로츠키는 그의 걸작 <러시아혁명>에 이렇게 썼다. “장례식은 국제연대에 대한 찬가와 평화를 위한 외침이 되었다” “러시아 병사들과 오스트리아-독일 제국의 전쟁포로들이 함께 한 시위는 그 무엇보다 혁명이 더 나은 세상을 위한 기반을 놓을 수 있다는 희망을 분명히 보여줬다.”

소비에트 명령 1호

체레텔리[4] 등 소비에트의 멘세비키 지도자들은 임시정부에 대한 지지를 약속했고 비록 “방어적이고 합병 없는”이라는 전제를 달았지만 전쟁을 지속해야 한다고 믿었다. 이런 중간적 입장은 마치 아무런 일이 없었던 것처럼 전쟁을 계속하겠다는 임시정부와 단독강화를 원하는 병사·노동자의 기대 사이에서 양다리를 걸치는 것이었다.

3월 14일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는 다음과 같은 성명을 발표했다. “유럽의 인민들은 함께 그리고 단호하게 평화를 요구하며 행동하고 있다.” 하지만 독일과 오스트리아 노동자들에게 보내는 이 성명은 “민주주의 러시아는 자유와 문명을 위협하지 않으며 우리는 어떠한 반동적인 침략에도 굳건하게 우리의 자유를 지킬 것이라”라고 선언했다. 많은 이들이 이 성명 내용이 전쟁을 찬성하는 것이라고 이해했다.

트로츠키는 이렇게 주장했다. “밀류코프의 신문에서 이 성명에 대해 비록 처음은 전형적인 평화주의적 입장에서 시작했지만 우리와 동맹국들이 근본적으로 동일한 이데올로기를 갖고 있다는 것을 드러냈다고 지적한 것은 천만번 옳은 얘기다.”

2월 혁명 이전에 병사들이 전투를 거부하며 수십만 명이 탈영했고 독일병사들과 친교를 쌓으면서 사실상 전쟁은 서서히 끝나가고 있었다.

1914년 크리스마스를 떠올려 보면, 독일과 러시아 병사들이 함께 춤을 추고 코냑과 담배를 나누며 이런 친교를 쌓았다. 이런 상황은 장교들에 맞선 공개적인 반란 없이 몇 년간 계속됐다. 역사가 마크 페로는 한 러시아 병사가 자기 아내에게 장교들에 대해 묘사한 편지를 인용한 적이 있었다.

전쟁? 우리가 이 진흙탕에 있을 때 그들은 진창에서 멀리 떨어져 서 있는데도 우리는 75루블을 받고 그들은 500이나 600루블을 받아. 그들은 불공평한 걸 못 견뎌해. 하지만 전쟁에서 가장 힘든 건 병사들이야. 그들은 달라. 그들은 훈장과 포장에다 보상금까지 받지. 하지만 그런 것들은 전장과는 멀리 떨어져 있지.

처음에 장군들은 페트로그라드의 반란 소식을 전선에 있는 병사들에게 숨기려 했기 때문에 러시아병사들은 독일 병사들을 통해 2월 혁명에 대해 들었다. 이 때문에 장교들에 대한 병사들의 신뢰는 더욱 떨어졌다. 역설적이게도 2월 혁명은 탈영을 멈추게 했다. 병사들은 종전이 임박했다고 기대했다. 그래서 평화를 위한 새 정부의 협상력을 약화시키고 싶어 하지 않았다.

전선에서 온 보고들은 이런 분위기를 보여줬다. “전선은 유지하나 공세에는 참가하지 않음.” 몇 주 지나 5사단 사령관은 이렇게 보고했다. “투지가 식었다. ... 사단의 모든 계층에 확산된 정치적 분위기 때문에 전체 군인들이 한 가지만을 원하고 있다. 전쟁이 끝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4월 첫째 주 동안 북부전선과 서부전선에서 병사 8000명이 탈영했다.

레닌의 귀환 그리고 부르주아지와 제국주의적 임시정부에 대한 “지지는 없다”는 레닌의 4월테제는 볼셰비키 정책을 근본적으로 바꿔놓았다.

스탈린과 카메네프 지도아래 볼셰비키의 입장은 온건적이었고 레닌이 1905년 발전시킨 바에 따라 부르주아 혁명을 수행하기 위한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민주적 독재”를 계속 지지하고 있었다.

당 기관지 <프라우다>에 실린 한 기사에서 카메네프는 “4월테제는 레닌의 개인 의견일 뿐이고 레닌의 계획 일반을 우리는 수용할 수 없다. 왜냐면 레닌의 계획은 부르주아지 혁명은 이미 끝났고 혁명을 사회주의혁명으로 즉각 전화시켜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했다.

1917년 3월 볼셰비키 당대회에서 스탈린은 “치머발트와 키엔탈 회의의 입장을 따르는” 국제주의 멘셰비키와 통합하는 것을 지지했다. 하지만 심지어 1915년에도 레닌은 치머발트회의 다수파가 사용하는 평화주의적 전쟁반대 용어들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이런 용어들이 전쟁을 지지할 수 있는 문을 열어준다며 레닌은 그들을 “머리에 똥만 들어 있는 카우츠키주의자들”이라 불렀다.

4월테제

4월에 돌아온 레닌은 치머발트 좌파들은 치머발트 다수파와 완전히 단절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치머발트 다수파에는 스탈린을 비롯한 많은 볼셰비키 활동가들이 통합하고자 했던 멘셰비키가 포함돼 있었다.

지칠 줄 모르는 레닌이 당내 논쟁에서 승리했다. 볼셰비키는 7만9000명을 헤아렸고 그 가운데 1만5000명이 페트로그라드에 있었다. 볼셰비키는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에서 소수였지만 혁명 과정의 여러 사건들에서 큰 구실을 담당할 정도로 강력했다.

임시정부도, 소비에트를 지도하고 있던 멘셰비키 지도자들도 4월 하반기에 발생한 정치적 위기를 바라지 않았다. 밀류코프와 러시아 자본가들은 전쟁에서 러시아가 제 역할을 할 거라고 동맹국들을 안심시켰고 오토만제국이 차지하고 있던 다르다넬스 해협을 노리고 있었다.

그러나 밀류코프는 소비에트가 동의하지 않으면 병사들이 임시정부의 계획을 위해 전투에 나서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한편으로 러시아는 오직 방어를 위한 전쟁만 하겠다고 선언하는 게 필요하다고 체레텔리가 주장하고 있었다. 밀류코프와 구치코프의 반발했지만 어쩔 수 없이 3월 27일 성명이 발표됐다.

러시아 인민들은 다른 인민들의 희생을 대가로 외부의 힘을 강화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으며 어떤 이라도 노예화하거나 굴복시키는 것을 그 목적으로 삼지 않는다. ... 하지만 러시아 인민은 러시아의 필수적 자원들이 침해당하고 약화되는 상태로 전쟁에서 철수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3월 27일 이 방어주의적 성명은 동맹국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그들은 성명서가 소비에트에게 양보한 것이라고 보았다. 프랑스 대사 모리스 팔레오로그는 이 성명이 “소심하고 불명확”하다고 불평했다.

하지만 전쟁을 이용해 혁명을 반대하려는 밀류코프의 이 도박은 임시정부와 소비에트 사이의 현실 관계를 고려한 것이었다. 그는 임시정부의 지배력을 한걸음 한걸음씩 강화시키려 했다.

며칠 뒤, 정부 대표단과 소비에트 대표단의 회의가 열렸다. 러시아는 전쟁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동맹국들로부터 대출을 받는 게 꼭 필요했다. 새 정부의 각서가 대출을 받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었다. 4월 18일 밀류코프는 삼각동맹의 영국과 프랑스 정부에 새로 편지를 보냈다. 편지는 “동맹국들의 완전한 동의아래 그들에 대한 의무를 준수하며 전쟁을 계속하겠다”는 의지를 강조하고 있었다.

편지에서 그는 또한 혁명이 전쟁에서 승리하겠다는 대중들의 의지를 강화시켰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4월 19일 소비에트 집행위원회는 특별심야회의를 열어 이 편지에 대해 논의했다. 집행위원 블라디미르 스탄케비치가 이렇게 선언했다. “참석자들은 논쟁 없이 만장일치로 이 편지는 소비에트 집행위원회가 기대했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라고 합의했다.”

멘셰비키 신문 <라보차야 가제타>는 밀류코프의 편지를 “민주주의에 대한 우롱”이라고 했다. 하지만 유명한 자유주의 지식인들의 신문인 <노보에 브레먀>는 기존 협정서들을 찢어버릴 수는 없다며 이 편지를 옹호했다.

만약 러시아가 기존 협정들을 폐기하면 “우리의 동맹국들은 제멋대로 행동할 것이다. 만약 협정이 없다면 누구도 이를 준수할 필요가 없다. ... 우리 생각에 볼셰비키를 제외하고 모든 러시아 국민은 어제 나온 편지의 기본적인 논지가 옳다고 여길 것이다.”

곧바로 이 편지에 대한 대중의 분노가 폭발했다. <라보차야 가제타>는 이렇게 전했다.

페트로그라드는 민감하고 신경질적으로 [이 편지]에 반응했다. 모든 곳에서, 거리의 회합들에서, 전차 안에서 전쟁에 대한 열정적이고 뜨거운 논쟁들이 벌어졌다. 머리에 챙이 달린 모자나 손수건을 쓴 서민들은 평화를 주장했다. 신사모나 숙녀모자를 쓴 사람들은 전쟁을 원했다. 노동자계급 지구들과 병영의 막사들에서 이 편지에 대한 대응은 영토합병[전쟁] 정책에 대한 반대였다.

멘셰비키이자 아마도 러시아혁명에 대한 가장 뛰어난 기록자인 수하노프는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회상했다.

엄청나게 많은 노동자가 일부는 무장을 한 채 비보르그 지구에서 네브스키 도로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거기에는 수많은 병사도 있었다. 시위대는 구호를 외치며 행진했다. “임시정부 퇴진하라!” “밀류코프 퇴진하라!” 엄청난 흥분이 노동자계급 지구들, 공장들, 병영의 막사들에 가득 퍼졌다. 많은 공장이 멈췄고 어디서나 지역 집회들이 개최됐다.

밀류코프의 편지

4월 20일 소비에트의 멘셰비키 지도자들이 평화주의적 방식으로 밀류코프의 편지를 수정해 동맹국들에게 새 편지를 보내라고 임시정부에 요구했다. 하지만 결국 그들은 이 편지에 대한 [임시정부의] 해명이면 족하다는 케렌스키의 사회혁명당 입장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4월 21일에 새로운 시위들이 벌어졌다. 이번에는 볼셰비키가 주도하고 조직한 시위였다. 혁명이 발생한 이후 레닌의 정당이 운동 꽁무니가 아니라 운동 선두에 나선 최초 순간이었다. 동시에 네프스키 대로로 카데트당이 조직한 정부 지지자들이 무장을 하고 모여들었다. <라보차야 프라우다> 4월 22일자에 따르면 당시 상황은 이렇다.

어제 페트로그라드 도로들 분위기는 4월 20일보다 훨씬 더 불안하고 동요하고 있었다. 노동자계급 지구들에서는 전면 파업이 벌어졌다. ... 배너에 쓰인 문구들은 다양했다. 하지만 동시에 도로들 전체를 아우르는 공통된 특징도 있었다. 네프스키와 사도파야 등 도심 지역은 임시정부를 지지하는 구호들이 압도적이었다. 외곽지역은 그 반대였다. ... 서로 다른 시위 집단들 사이에 충돌이 빈번했다. ... 총격전이 있었다는 소문도 돌았다.

이 시위에 참가했던 한 여성은 이렇게 썼다.

공장들에서 나온 여성들이 ... 시위대와 함께 네프스키 도로 한쪽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도로 건너편에는 다른 군중들이 있었다. 잘 차려 입은 여성들, 상인들, 변호사들 등등. 이들의 구호는 “임시정부 만세” “밀류코프 만세” “레닌을 체포하라”였다.

노동자 거주 지역의 긴장도 높아갔다. 한 공장 노동자는 그날 오후에 있었던 집회를 이렇게 묘사했다.

결정을 못하는 분위기였다. ... 소비에트의 결정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그런데 소비에트의 결정이 전해지기 전에 도심에 있던 몇몇 노동자들이 돌아왔다. 충돌에 대한 보고와 함께 배너가 찢겨지고 시위대 일부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 순식간에 분위기가 바뀌었다. “뭐라고? 그 자들이 도로에서 우리를 공격하고 우리 배너를 찢고 있다고? 그런데 우리는 멀리서 조용히 지켜만 보자고? 네프스키 도로로 가자!”

이 긴박한 상황에서 밀류코프의 지지를 받는 코르닐로프 장군은 포병대를 마린스키 궁전 밖에 배치했고 지원을 위해 군사학교 사관생들을 소집했다. 볼셰비키가 주도하는 노동자집회 수백 미터 옆에서 벌어지고 있던 친정부 무장 시위와 군대를 연결시키기 위해서 이렇게 했던 것이다. 밀류코프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이 조치가 갖는 공공연한 반혁명적 성격을 감추려고 이렇게 주장했다.

4월 21일 페트로그라드 지역 군사령관이었던 코르닐로프 장군은 외곽지역의 무장 노동자들의 시위에 대해 보고받고 몇몇 수비대를 마린스키 궁전 광장에 배치했다. 그는 소비에트 집행위원회의 저항에 직면했다. 소비에트 집행위원회는 장군 측 참모에 전화를 걸어 군대를 동원하면 상황이 복잡해 질 것이라고 말했다. 집행위원회 측 대표들과 협상을 진행한 뒤, 코르닐로프 장군은 명령을 취소했고 집행위원회 대표들이 있는 자리에서 수비대들에 전화해 병영을 떠나지 말라고 명령했다. 그 뒤 소비에트 집행위원회의 호소문이 거리에 나붙었다. “병사 동지 여러분, 소비에트 집행위원회의 호소가 없는 한 무장을 하고 나오지 마십시오.”

사실 소비에트 집행위원회는 코르닐로프의 결정이 자신들을 제압하겠다고 협박하는 반혁명적 성격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소비에트 집행위원회는 병사들에게 병영을 떠나지 말라고 지시했던 것이다. 코르닐로프는 자신이 고립되어 있음을 알았고 후퇴하는 것밖에 대안이 없었다.

소비에트 지도부가 보기에 정치 위기는 교착상태로 접어들었다. 그래서 소비에트 집행위원회는 임시정부와 갈등으로 벌어진 이 사건은 잘 해결됐으니 노동자들에게 집으로 돌아가라는 명령을 서둘러 발표했다. <라보차야 프라우다>는 이 역설적 상황에 대해 이렇게 썼다.

소비에트 집행위원회가 병사들에게 거리에 무장하고 나오지 말라는 명령을 발표하자 흥미로운 광경들이 목격됐다. 그들의 입장이 무엇이든 간에 병사들은 자신들의 동지들에게 집회에 참석하지 말라고 설득하려고 했다. 병사들은 또한 민간인들도 진정시키려 애썼다.

코르닐로프는 밀류코프에게 반란을 진압하기에 충분한 군사력을 갖고 있다고 장담했지만 그런 군사력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았다. 트로츠키는 이렇게 썼다. “이 허풍은 코르닐로프가 존재하지도 않는 군대를 페트로그라드에 배치했던 8월에 최고조에 달했다.” 여전히 총성이 들리기는 했지만 이 정치위기는 4월 21일 밤에 끝났다.

위기는 끝났지만 모든 게 달라지다

1917년 4월, 권력의 균형을 감안할 때, 볼셰비키 또한 내전을 향한 공공연한 전투를 벌이는 데 관심을 두지 않았다. 레닌의 정당이 처음으로 중요한 구실을 했지만 볼셰비키는 아직 새로운 혁명을 지도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소비에트들은 여전히 통합되어 있었고 멘셰비키가 헤게모니를 쥐고 있었다. 레닌이 보기에 새로운 혁명은 아직 무르익지 않았고 일부 볼셰비키 활동가들이 지지한 “임시정부 타도” 요구는 잘못된 것이었다.

임시정부를 당장 타도해야할까? ...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서는 계급의식적인 노동자들이 다수 대중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어야 한다. ... 우리는 블랑키주의자[소수 폭동주의자]가 아니다. ... 우리는 마르크스주의자다. 우리는 쁘띠브르주아지의 자아도취가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투쟁을 지지한다.

4월 위기는 진정됐지만 이전과 모든 게 달라졌다. 소비에트의 동의 없이는 임시정부의 어떤 결정도 통과될 수 없다는 게 분명해졌다. 따라서 카데트당과 자본가계급의 전략은 임시정부에 사회주의자들을 직접 결합시키는 것으로 바뀌었다. 사회주의자 정당들이 내각에 참여하는 주요 전제조건은 구치코프와 밀류코프를 내각에서 해임하는 것이었다.

두 사람이 사임하자, 임시정부는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에 연합정부를 구성하자고 제안했다. 4월 22일 합의가 이뤄져 사회주의자 6명이 내각에 합류해 장관이 되었다. (멘셰비키 2명, 사회혁명당 2명, 나로드니키(인민주의자들) 2명), 소비에트 집행위원회 위원장이었던 [멘셰비키] 니콜라이 치헤이제[5]만 장관이 되길 거부했다.

볼셰비키도 내각 참여를 거부하고 대신 임박한 혁명 투쟁을 준비했다. 많은 면에서 ‘4월의 나달들’은 노동자 스스로 조직을 건설하고 무장할 필요성을 증대시켰다. 예를 들어, 스코로코드 신발 공장 노동자들은 1,000명의 붉은수비대를 만들기로 결정했고 소비에트에 소총 500정과 권총 500정을 요청했다.

4월 23일 붉은수비대 창설을 위한 공장 대표자 회의에서 한 연사는 이렇게 주장했다. “소비에트는 카데트당을 너무 신뢰하고 있다. 소비에트는 거리로 나오지 않았는데 카데트당은 거리로 나왔다. 소비에트의 실수에도 노동자들이 거리로 나와 그날을 지켜낼 수 있었다.”

4월 위기를 거치며 페트로그라드 노동자와 병사들의 결의는 더욱 단단해졌다. 밀류코프의 카데트당이 첫 번째 패배자가 되었다.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은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에 대한 그들의 통제를 유지했다. 하지만 그들의 자신감은 흔들렸다. 앞으로 다가올 몇 달 동안, 전쟁과 혁명적 위기는 깊어져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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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시 러시아의 수도 페트로그라드에 있는 기차역으로 핀란드에서 들어오는 기차의 종착역이자 페트로그라드에서 핀란드가는 기차가 출발하는 역이기 때문에 핀란드역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2] 알렉산드르 구치코프(Alexander Guchkov)는 기업가 출신의 두마 의원이다. 10월당의 지도자로 전쟁에서의 패배가 분명해지면서 니콜라이 2세 강제로 퇴위시켜 러시아 제정을 지켜내려는 음모를 꾸몄다. 1916년 8월 그는 총사령관 알렉세예프에게 편지를 보내 쿠데타를 호소한다. 이 음모는 실행되지 않았지만 알렉세예프는 3개월 뒤 다시 리보프대공과 쿠데타를 모의한다. 구치코프는 임시정부에서 전쟁장관이 된다.
[3] 모간 필립스 프라이스는 1885년 영국 글로스터의 정치가 집안에서 태어나 자유당 당원으로 정치 생활을 시작했다. 1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정치적 입장을 바꾼다. 러시아에서 혁명을 직접 체험했고 이후 볼셰비키에 호의적인 회고록을 집필한다. 프라이스는 1차 세계대전 후 영국 노동당에 가입했고 1922년 글로스터에서 하원의원에 선출된다. 램지 맥도날드의 노동당 정부 하에선 교육위원회 의장의 개인비서로 활동했다.
[4] 체레텔리는 조지아(또는 그루지아) 출신의 멘셰비키 지도자다.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지도자 중 한 명으로 임시정부에서 통신·체신부장관을 맡았다. 10월 혁명 후 조지아로 돌아간다.
[5] 니콜라이 치헤이제는 1864년 조지아(또는 그루지아) 출생으로 조지아에 마르크스주의를 전파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원문] https://www.jacobinmag.com/2017/04/april-days-lenin-russia-world-war-one
[필자] 유리 콜롬보는 모스크바와 밀라노에서 활동하는 사회주의 활동가이자 언론인이다. 노동자계급역사와 러시아사회에 대한 많은 글을 썼다.
[번역] 최용찬 | 수년간 공공운수연맹 등 노동조합에서 정책 및 대외협력(국제) 사업 담당자로 일했다. 옮긴 책으로 <좀비자본주의>(공역, 책갈피), <세계화와 노동계급>(공역, 책갈피) 등이 있다.


[자코뱅(JACOBIN) 온라인 시리즈 - 1917년 러시아 혁명 차례]

토드 크레티앙(Todd Chretien) : 2월 이전
케빈 머피(Kevin Murphy) : 2월혁명의 진행
라스 리(Lars Lih) :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에게-1917년 볼세비키의 핵심 메시지
유리 콜롬보(Yurii Colombo) : 전쟁과 4월 위기
에릭 블랑(Eric Blanc) : 1917년 핀란드 혁명
다니엘라 무시(Daniela Mussi) : 그람시가 본 1917년 러시아 혁명
메건 투르델(Megan Trudell) : 여성과 1917년 혁명
브랜단 맥기버(Bendan McGeever) : 반유대주의와 1917년 혁명 정치
마이크 하인즈(Mike Hyanes) : 폭력과 러시아혁명
로날드 수니(Ronald Suny) : 바쿠 꼬뮌
다니엘 가이도(Daniel Gaido) : 6월의 나날들
크리스토퍼 리드(Christopher Read) : 늦여름의 위기와 정치 양극화
케빈 머피(Kevin Murphy) :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사라 배드콕(Sarah Badcock) : 1917년 러시아 농촌에서의 혁명
폴 르 블랑(Paul Le Blanc) : 코르닐로프 쿠데타 패배하다
알렉세이 구세프(Alexei Gusev) : 1917년 멘세비키의 대안
데이비드 만델(David Mandel) : 10월혁명의 유산
차이나 미에빌(Chian Mieville) : 10월혁명
알렉산더 라비노비치(Alexander Rabinowitch) : 다시 보는 볼세비키의 권력 장악
수지 와이즈먼(Suzi Weissman) : 빅토르 세르주-10월에서 1월까지
소마 마릭(Soma Marik) : 혁명적 민주주의
닐 데이비슨(Neil Davidson): 트로츠키의 러시아 혁명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