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쇄적 관습의 전통예술계, 미투가 또 다른 미투 불러

2차 가해 지속돼… “예술 노동자 특성에 맞는 제도 정비 마련 필요”

“예전에 어떤 국공립무용단 단원들의 사진첩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접대를 할 사람들을 사진첩에서 골라 뽑아갈 수 있도록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런 일은 80년대에나 있었다고 들었는데, 요즘 세대 단원들도 술자리에 나간다는 얘기를 듣고 너무 놀랐다. 국립국악원에서 지난 2년간 자행된 성희롱 발언을 보면 국악원의 예술적 가치에 맞는 지적은 없었다. 여성의 몸에 가하는 남성중심 시선과 소비 자본주의가 강요하는 폭력적인 잣대만 있을 뿐이었다.”(춤 비평가 이지현)

지난 3월, 연극연출가 이윤택 성폭력 폭로 이후 문화예술계는 미투운동의 강력한 자장 안에 있었다. 시인 고은, 배우 조민기, 영화감독 김기덕, 극작가 오태석 등 미투 폭로가 꼬리에 꼬리를 이었다. 연장선상에서 전통예술계 내에서 미투가 터져나왔다. 국립국악원 무용단, 천안시충남국악관현악단의 단원들은 수년간 쌓인 성폭력 피해 경험을 세상에 드러냈다. 폐쇄적 문화로 악명 높은 전통예술계의 벽을 뚫고 나온 목소리였건만, 성폭력을 생산하는 구조는 그대로이고, 2차 가해 역시 끊임없는 상황이다.

공공운수노조 여성위원회는 국립국악원 무용단, 천안시충남국악관현악단에서 벌어진 성폭력 피해 사례를 발표하고, 전통예술계 내의 ‘도제식 교육, 위계질서, 몸에 대한 지적’의 문제를 여성주의 시각에서 짚어보는 한편, 전통예술계의 특성으로 인해 공공기관과 정부에서 나오고 있는 교육, 지침, 메뉴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지점들에 대한 대안을 논의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29일 오전 11시, 민주노총 15층 교육원에서 ‘미투 증언대회 전통예술계는 응답하고 있는가? 전통예술계 내 위계문제, 더 이상 관행일 수 없다’가 진행됐다.

지속적인 2차 가해…예술 노동자 특성에 맞는 제도 정비 필요

김수경 민주노총 여성국장은 “두 기관에서 일어나고 있는 피해자들에 대한 2차 피해 상황은 미투 운동이 바꾸고자 하는 변화의 메시지를 수신하고 있지 않는다는 것을 나타낸다”라며 “예술공연 노동자의 특성에 맞는 관련 제도가 정비돼야 한다”라고 밝혔다.

국립국악원 무용단 감독대행의 갑질 사건은 전 감독대행 C씨와 보직단원 Y씨가 자신의 지위를 악용해 출연배제, 외모 및 신체에 대한 성희롱으로 지난 5월 단원들이 문제를 제기하면서 알려지게 됐다. 하지만 지난 5개월 동안 국립국악원은 어떠한 공식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아, 보직단원들에 의한 2차 가해가 계속적으로 자행되고 있는 상태다.

문화체육관광부의 중재에 따라 외부전문가(여가부 추천 노무사 1명, 조사원 1명)와 문체부 감사관 2명이 참여한 진상조사위가 꾸려졌지만 이들이 작성한 보고서는 국악원 운영규정을 근거로 대부분 징계 시효를 운운하며 경고 또는 가벼운 징계로 사태를 마무리하라는 결정을 국악원에 전달했다.

천안시충남국악관현악단의 경우, 원가해자는 떠났지만 2차 가해자가 남아 지속적으로 피해자를 괴롭히고 있다. 천안시충남국악관현악단의 조 모 예술감독은 2008년부터 2014년까지 재직하면서 단원을 상대로 성추행을 일삼았다.

지난해 강제추행과 업무상 위력 등에 의한 추행으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조 모 예술감독이 아무런 징계 없이 2015년 자진 사퇴한 것도 문제지만, 그와 사제지간이었던 전 모 악장이 여전히 악단에 남아 성폭행 사실을 왜곡하며 피해자들에게 2차 가해를 하는 게 더 큰 문제다.

전 모 악장은 2009년 조 모 감독에게 악장으로 발탁된 후 그의 범죄를 끊임없이 변호했다. 피해 사실이 언론에 나가면 ‘피해자임을 주장하는 소수의 단원들의 일방적인 진술이다’ ‘성적 추문의 진위 여부가 객관적으로 확인되지 않은 상황이다’라며 정정보도를 요구하기도 했고, 법원 판결 이후엔 ‘보기 나름인 것 같다’ ‘학교 때부터 어떤 계보적인 것도 있고, 특이하게 불거져서 생긴 그런 일들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던 것 같고’ 등 전통 예술계 내의 관습이라는 식의 인터뷰를 언론과 하기도 했다.

한 피해자는 호소글을 통해 “조 모 감독이 법의 심판을 받으면 피해단원들의 성적 굴욕감과 모욕감이 치유되고 회복될 수 있다는 기대감이 있었지만 2차 가해로 참담하게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도리어 국악단의 명예를 실추시키고 훌륭한 예술감독을 음해하고 모함한 불순한 단원으로 낙인찍히는 상황을 맞게 됐다”라며 “행복하게 연주할 수 있도록 가해자와 분리시켜 달라는, 2차 가해를 막아달라는, 조직의 문화를 바꿔달라는 우리의 요구는 언제쯤 답을 들을 수 있을까요?”라며 분통해했다.

김 국장은 이러한 사건에서 보이는 2차 피해를 막기 위해선 △기관과 기관장에 대한 무관용 원칙 △예술 활동 특성에 맞는 관련 법규 제개정 및 노동자성 인정 △피해자와 가해자와의 공간 분리 △징계 시효, 공소 시효에 대한 제도 개선 등의 조치가 이뤄져야 한다고 설명했다.

김 국장은 특히 “천안시는 국가인권회로부터 성희롱 피해 재발방지 대책 수립을 요구받았는데 원가해자의 조력자를 악장으로 선임해, 조직적인 2차 피해를 유발했다”라며 “시립국악관현악단엔 민주노총 소속의 피해자들과, 그 외 단원들로 구성된 한국노총 소속 단원들로 양분돼 있었는데 노노 갈등을 조장한 것도 천안시”라며 천안시에 관리 감독의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최근 일어나고 있는 미투 운동은 공소시효, 신고시효, 징계시효가 지난 사건이 대부분으로 성폭력 특별법, 고평법, 국가인권위법 등에서는 이들 시효를 바꾸는 제도적 보완이 필요하다”고도 밝혔다.

한편, 오는 12월 4일 천안시충남국악관현악단의 전 모 악장의 2차 가해 관련 천안시 성희롱고충심의위원회가 열릴 예정이다. 피해자들은 위원회에 직접 참석해, 논의 경과를 지켜보고 대응하겠다는 입장이다.

국립국악원 무용단 감독대행의 갑질 사건의 경우, 피해자를 비롯한 단원들이 진상조사위원회 촉구, 책임자 처벌 등을 요구하며 1인 시위를 이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