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금지법과 함께할 ‘공정한’ 미래

[질문들]



조금 불안했었다. 10만 명, 넘길 수 있을까? 5월 24일 차별금지법제정 국민동의 청원 시작 날부터 쭉쭉 오르던 청원인 수가 5만을 넘어서면서 주춤했기 때문이다. 청원 성사까지 1만5000명을 앞둔 6월 12일, 거리 캠페인에 나섰다. 차별금지법도, 국민청원도 몰랐지만 그래서 무엇인지 궁금했던 시민들에게 설명했다. 선전물을 챙겨가거나 그 자리에서 바로 청원에 동참한 시민들 덕분에 기대가 생겼다. 주말부터 다시 그래프 경사가 가파르게 올랐고, 6월 14일 월요일이 되자 10만 명의 서명 인원이 모였다. 곳곳에서 차별금지법을 간절히 바랐던 사람들의 힘으로 이뤄낸 것이었다. 아마 모두 같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벅찬 마음 한편에 번지는 슬픔. 지금, 이 순간 기쁜 미소를 나누며 마주할 수 없는 얼굴들이 떠오른다.

10만인 청원은 평등한 세상을 펼치기 위한 시작이다. 2006년 국가인권위의 차별금지법 제정 권고에 따라 정부가 제17대 국회에 법안을 제출한 이후, 제19대 국회까지 총 7건의 법안이 국회에 제출되거나 발의됐지만 제정되지 않았다. 이제는 물러서면 안 된다. 평등의 내용을 담은 법안이 온전히 제정돼 삶의 곳곳에 스며들어야만 한다. 차별금지법이 동등한 동료 시민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들의 지지대가 될 때 평등이 구체적인 삶의 모습으로 다가오게 될 것이다. 저마다의 삶으로 빛나는 세상은 마음에 품은 희망이 아닌 현실이 될 수 있어야 한다. 차별금지법과 함께 우리는 어떤 미래를 만들 수 있을까, 설레는 의지가 생긴다.

공정한 신분 차이는 왜 정의가 됐나

차별금지법 제정 이후의 세상에 기대를 품었던 날, 무책임함의 끝을 보여주는 소식이 들려왔다. 국민건강보험 고객센터지부 노동자들이 6월 10일부터 ‘생활 임금 쟁취, 국민건강보험 공공성 강화, 고객센터 직영화 촉구’를 위한 전면파업에 돌입했는데, 14일 김용익 건강보험공단 이사장이 단식을 선언했다. 공단의 공공성과 노동자의 권리를 보장해야 할 공단의 수장이 노동자 탓을 하며 자신의 책임을 지웠다. 정규직을 요구하는 비정규직과 공정성을 외치는 정규직, 노동자 간의 갈등으로 만들어버린 ‘단식 쇼’는 노동과 공정성(능력주의)의 관계가 개인의 문제가 아닌 사회의 문제임을 다시 확인해 주었다.

‘공정’한 능력 평가와 노력의 결실을 훼손하는 ‘무임승차’는 ‘역차별’이라는 말과 함께 소위 ‘인국공 사태’를 비롯한 공공부문 비정규직 정규직 전환 때마다 반복됐다. 이 공정성 논란 속의 ‘공정’은 능력과 지위(신분)의 경계를 가른다. 능력대로 대우받는 것, 그래서 인천공항 정규직은 “결과적 평등 거절, 진정한 기회의 평등”이라는 구호를 내세웠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은 다른 지위이고, 이는 능력의 차이니 임금도, 신분도 달라야 한다는 의미다. 능력의 차이를 증명하는 것이 시험(공채)이니 응시할 기회만 평등하면 되는 것이고, 비정규직이 갑자기 정규직으로 신분 상승하는 것은 불공정하다는 주장이다. 공정성은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신분 차이를 유지하는 도구다. 어쩌다 ‘공정’이라는 말이 이렇게 됐을까?

이런 주장은 문재인 대통령의 “기회는 평등할 것, 과정은 공정할 것,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라는 말을 떠올리게 한다. 그런데 이 말은 당연한 것 같으면서도 이상하다. 기회–과정-결과는 순차적으로 이뤄지는데, 일련의 과정에서 지켜져야 할 원칙으로 평등과 공정이 배치되면 결과가 당연히 정의롭다는 인식을 하게 된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기회와 과정에서의 정의로움이 없다면? 아니 우리 사회가 지향해야 할 정의가 무엇인지조차 모른다면 기회와 공정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또는 공정한 과정으로 만든 세계에서 무수한 차별이 있다면 이 결과는 정의롭다고 할 수 있을까? 평등과 공정과 정의를 분리하는 것이 아닌, 삶 속 틈틈이 스며든 차별과 불공정을 드러내 평등하고 정의로운 세계를 만들기 위한 다른 관계와 원칙을 세우며 공정의 기준을 만들어야 하는 것 아닐까?

시험과 능력으로 세운 공정의 세계에 입장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그녀는 이집트에서 민주화 투쟁을 하다 탄압을 피해 한국으로 이주한 난민이다. 예술가이자 저널리스트였던 그녀는 한국에서도 노동의 경험을 이어가고 싶었다. 아랍어와 영어가 능숙했지만 어떤 언론사에서도 일할 수 없었다. 만약 그녀의 경력과 언어 능력만으로 시험 없이 채용된다면, 공정한 경쟁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부정의한 것일까? 그러나 현실에서 그런 일은 없다. 인도적 체류자가 할 수 있는 일은 단순노무직밖에 없기 때문이다. 난민에게는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그는 청각장애인이다. 지금은 프로그램 개발 업무를 하고 있지만, 취업 시험에서 듣기평가 점수를 요구받아 지원을 포기한 경험이 있다.(1) 그뿐만 아니라 장애인의 임금수준은 비장애인의 74.7% 수준으로 낮다. 심지어 최저임금법 7조(최저임금법 적용제외 대상) 때문에 최저임금을 받지 못해 장애인 노동자의 평균임금은 월 37만1790원이다. 장애인은 근로 능력이 없다고 최저임금조차 주지 않아도 된다면 이것은 노동인가 착취인가? 장애인이 각자의 장애 조건에 따라 교육을 받을 수 있는 환경, 노동할 수 있는 환경조차 만들지 않은 사회에서 평등과 공정은 비장애인들의 경쟁에서만 가능한 말이다.

차별금지법과 평등, 공정, 정의 세상으로

건강보험고객센터지부 노동자들이 “차별은 불공정이야”라는 구호를 외쳤다. 나는 평등과 공정의 다른 세상을 상상해본다. 누구나 원하는 대학에 간다. 평준화된 대학 중에 가고 싶은 대학에 지원하고 정원이 넘치면 제비뽑기로 당첨을 정하는 방식이야말로 ‘기회의 평등’이 아닐까? 노동 형태는 노동자의 필요로 선택한다. 비정규직의 업무가 상시고용의 필요성이 없는 것이라면, 고용 안정성 대신 더 많은 임금으로 보상하는 것이 ‘공정’하지 않을까? 비정규직이라 위험한 일을 맡는 것이 아니라 모두에게 안전한 노동환경을, 공기업은 수익이 아닌 공공성을 추구할 수 있는 구조를, 무엇보다 한 번의 시험으로 인생의 성공과 실패가 결정되지 않는 세상을 상상한다.

우리에게 도래할 차별금지법이 평등과 공정, 정의의 의미를 바꾸는 힘이 되길 바란다. 김혜진은 능력주의를 극복하고 평등한 노동을 만드는 길은 ‘노동문제’에 대한 대응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고 했다.(2) 그렇기에 우리 사회가 평등한 공동체를 구성하며, 누군가의 성별이나 연령, 성적 지향 등으로 차별하지 않는다면 당연히 노동에서도 능력주의가 설 땅이 없어질 것이라 했다. 나는 그 평등한 공동체가 추구하는 정의는 성과가 아닌 행복이길, 경쟁이 아닌 존중이길, 실패는 도전의 힘이 되길 꿈꾼다. 각자의 고유한 삶이 존중과 협력으로 만드는 세상에서의 평등과 공정, 정의는 지금과 다른 모습이리라 믿는다.

<각주>
1. 비마이너, 장애인노동자, 복지 대상이 아닌 ‘노동 주체’가 되기 위한 조건, 2020.11.27.,
https://www.beminor.com/news/articleView.html?idxno=20359
2. 김혜진, <차별받는 노동을 정당화하는 능력주의>, ≪능력주의와 불평등≫, 교육공동체 벗,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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