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 끝, 헬조선 시작

[워커스] 사회주의 탐구영역

[출처: 김용욱]

#1. 줄 수 있는 게 홍삼밖에 없다

이따금 건강기능식품 광고를 보면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 학교에 학원에, 하루 종일 공부하느라 지쳐 졸고 있는 고등학생(혹은 중학생) 자녀를 부모가 안쓰럽게 바라보죠. 그러더니 힘내라면서 건강기능식품(으레 홍삼인 경우가 많죠)을 건넵니다. 이 모습을 보면서 저는 스타크래프트라는 전설적인 전략시뮬레이션 게임이 떠올랐습니다. 이 게임을 모르는 분들을 위해 설명을 좀 붙이자면, ‘마린’이라는 기본 공격유닛이 있는데 이 유닛에게 스팀팩(Stim Pack)이라는 전투자극제, 즉 일종의 마약을 투여하면 이동속도와 공격력이 일순간 상승합니다. 대신 체력을 깎아먹죠. 물론 건강기능식품을 마약에 비견할 수 있다는 건 아니고, 힘들어하는 자녀에게 뭐라도 해주고 싶은 부모 마음을 탓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공부나 일을 열심히 하는 게 무조건 잘못됐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게 본인들의 진정한 자유의사에 따른 것인지, 그리고 이게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것인지의 문제겠죠.

얼마 전 수능 시험이 있었습니다. 이제 연말연초를 거쳐 대학입시가 진행되겠죠. 대학입시는 매년 대단히 민감한 문제로 떠오릅니다. 심지어 저 멀리 영국의 공영방송 BBC는 올해 수능이 치러진 11월 15일 이런 제목의 기사를 냈다고 하죠. ‘수능: 한국에 침묵이 내려앉는 날(Suneung: The day silence falls over South Korea).’ 거리 곳곳에는 정당들이 수험생들을 응원한다는 현수막이 나붙고, ‘시험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비행기 이착륙과 직장인들의 출근시간까지 조정됩니다. 그야말로 한 번의 시험에 삶의 무게가 걸려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죠. ‘대학이 인생을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지금 시대는 과거와 다르다, 성공할 수 있는 다양한 길이 있다’는 말도 많이들 하지만 썩 효과적인 위로가 되지는 않는 듯합니다. 누구보다 학생들과 학부모들 스스로가 현실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을 겁니다. ‘그런 예외는 예외일 뿐’이라는 것을요.

한국의 입시제도가 너무 소모적이고 사교육과 불평등을 조장한다는 비판은 언제나 있었습니다. 정권마다 대입 개편방안을 제시했지만 마땅한 해결책이 되지는 못했죠. 문재인 정부는 이 문제와 관련해 공론화위원회까지 구성하고도 별다른 변화는 가져오지 못한 채 혼란만 가중시켰다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대입전형에서 수시를 늘려야 할지 정시를 늘려야 할지는 고질적인 논쟁점이지만, 정시(수능 성적)와 수시(내신 성적, 봉사활동 동아리활동 기타 교과 외 학술활동 등) 모두 사교육 시장이 광범하게 뿌리내리며 극한경쟁을 반복한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죠. 입시 제도를 손보는 것만으로는 누구도 만족할 수 없고, 근본적인 해결책도 나올 수 없다는 겁니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교실이데아’를 읊조리는 것조차 진부해진 지금, ‘교육’의 이름으로 ‘승리한 소수’와 ‘뒤쳐진 다수’를 구분하고 승리자들에게 (잠깐의) 축하를, 나머지 다수에게는 위로 혹은 ‘정신교육’이라는 미명 하에 열등감과 패배의식을 주입하는 불행이 반복되고 있죠. 우리에겐 홍삼추출액보다 근본적인 무언가가 필요한 것입니다.

#2. 수시? 정시? 뭣이? 중헌지도 모름서

아주 근본적인 질문이자 그 답도 너무나 빤한 질문을 한 번 던져볼까 합니다. 정시와 수시를 막론하고 대입전형이 사교육을 양산하면서 심지어 아동기부터 피 말리는 경쟁을 조장하는 이유가 뭘까요? 그 경쟁에서 승리해야 상위권 대학에 진학할 수 있고, 그래야 사회적 인정을 받으면서 좀 더 나은 직장을 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최근에는 일자리 구하기가 더 어려워지기도 했죠). 그렇기에 교육이 백년대계라는 말은 거창한 빛 좋은 개살구일 뿐, 결국 계층이동(혹은 대물림) 사다리라고 하죠. 이 가운데 후자의 문제는 뒤에서 얘기해보도록 하고, 앞의 문제를 먼저 좀 다뤄보겠습니다.

한국 대학의 서열체제가 얼마나 굳건한지는 굳이 여기서 입 아프게 말하지 않아도 될 겁니다. 수험생과 학부모들은 조선왕조 계보를 늘어놓듯 상위권 10개 대학 앞머리 글자를 따서 줄줄 외우고 다닐 정도죠. 수능의 풀네임은 ‘대학수학능력시험’으로, 대학에서 공부할 능력을 갖추었는가를 묻는다는 게 명목이지만 실제로는 몇 점을 따야 어느 대학에 갈 수 있는지를 측정하는 등급 찍기 도장 역할을 합니다. 이 점에서는 내신 성적도 별반 다를 바 없죠. 진학상담은 ‘이 정도 등급이면 이 정도 대학에 갈 수 있다’는 걸 확인하는 절차인 경우가 많습니다. 대학서열이 유지되는 한 교육은 공공적 권리가 아니라 상품이자 등급인증서 같은 것이죠. 당연히 어떤 제도를 갖다놓더라도 입시의 병폐가 사라질 수 없습니다. ‘더 나은’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아등바등 기를 써야 하고, 이 자체가 사교육이라는 상품시장의 훌륭한 토양이 되죠.

사회주의자들은 교육이 보편적 권리로 보장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대학을 서열화해 등급을 매기고, 이 상위 등급에 올라서기 위한 경쟁에 엄청난 시간과 자원을 소모하는 건 불평등을 고착시킬뿐더러 사회적 낭비라는 것이죠. 사회주의에서 대학은 서열과 차별 없이 고등교육을 제공하는 기관으로 기능할 겁니다. 대학교육을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받을 수 있도록 개방하고, 별도의 입학시험을 두지 않는 것이죠. 어떤 대학에 가더라도 양질의 교육과 연구가 가능하도록 공적 지원을 확충하고, 이를 제대로 점검하고 통제하기 위해 구성원들과 (지역)공동체의 민주적인 통제기구도 갖춰야 할 겁니다.

‘누구나 자격제한 없이, 그것도 등급 차이를 두지 않는 대학교육을 제공한다면 누가 애써 공부하려 하겠느냐’고 반대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또 한 번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보겠습니다. 공부를 왜 하는 거죠?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정말 공부 그 자체를 즐기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가끔 보면 어려운 수학문제를 풀거나, 이게 한국어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이해하기 어려운 책을 읽으며 희열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죠. 이 경우에는 시험이 있건 없건 알아서 공부합니다.

사회적인 차원에서 보자면 공동체에 필요한 각종 기능(구체적으로는 여러 직업이나 전문분야로 표현될 수 있겠죠)을 발휘할 역량을 육성해야겠죠. 그런데 그것이 왜 양질의 교육 기회 자체를 소수에게로 제한하면서 이뤄져야 하는 건가요? 가령, 물론 사회주의에서도 누구나 무작정 의사가 될 수는 없습니다. 전문적인 능력이 필요하니까요. 다른 직업들과 마찬가지로 사회주의에서 의사가 되려면 해당 직업에 필요한 능력을 갖추었는지 소정의 시험이나 검증절차가 여전히 존재할 겁니다(물론 직업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을 수 있겠죠). 공부를 하지 않고서는 이 기준을 통과할 수 없죠. 하지만 의사가 되기 위한 교육기회 자체를 제한할 이유는 없다는 겁니다. 입시와 대학서열이 사라진다고 해서 사회적 필요역량을 못 갖출 정도로 학업능력이 떨어지리라는 가정은 합당하지 않다는 거죠. 오히려 공부는 상대방을 이기고 상위 등급을 쟁취해야 하는 피곤한 과정, 탈락자와 패배자를 양산하는 사회적 비효율에서 벗어나 진정 각자가 자신의 욕구와 희망을 달성하는 과정으로 변모할 수 있는 것입니다.

#3. 교육인가, 학위장사인가

입시와 대학서열을 폐지하고 공공재로서 교육의 권리를 누구에게나 보장하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전제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사립학교 중심의 대학구조를 국공립으로 전환하는 것이죠. 왜 그럴까요?

대학서열은 법으로 정해놓은 것이 아닙니다. 즉, 대학서열을 없앤다는 것은 특정한 법적 조치를 의미한다기보다는 앞서 말했듯 대학 사이의 차별을 실제로 없애야 가능하고, 이는 모든 대학이 양질의 고등교육기관으로 기능할 수 있도록 충분한 공적 지원과 통제가 이루어져야 함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현재 국내 대학구조를 보면 전문대학 4년제 대학 등을 모두 포함한 전체 고등교육기관의 경우 86.5%가 사립인 실정이죠. 4년제는 81%, 전문대학은 93%가 사립학교입니다(2017년 교육통계연보). 그런데 이 사립대학들은 대부분 국고보조금과 등록금으로 운영하고 있습니다. 대학교육연구소 통계에 따르면 사립대학의 수입총액 가운데 국고보조금 비중이 22%로 5조 5천억 원에 달하고, 이 가운데 1/3을 상위 10개 사립대학이 차지하고 있습니다(상위 20개 대학으로 넓히면 49%). 여기에다가 수입총액 중 등록금 비중은 54%에 이르죠(사립 4년제 기준). 종합하면 사립대학 수입의 80% 가까이가 공적 지원과 학생들의 등록금으로 이뤄져 있는 것입니다. 이러고도 남는 돈은 꾸준히 축적하는데, 사립대학과 법인이 쌓은 누적 이월적립금이 10조 원에 육박합니다.

개인이 비싼 돈을 내고 사회적으로 일부 비용을 부담하는데, 소유와 운영, 통제는 사립재단이 장악하고 있는 현실. 보편적인 권리로서 고등교육을 보장하고 공동체에 필요한 역량을 육성하는데 사립재단의 배를 불릴 필요가 없습니다. 공적 지원이 이루어지려면 공적 통제가 뒤따라야 합니다. 비싼 값을 치르고 사교육을 받아서 또다시 비싼 등록금을 내고 상위권 사립대에 들어가야 하는 이 구조 자체가 교육의 공공성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이죠.

사회주의에서는 모든 대학을 국공립으로 전환하고, 그 기반 위에서 서열과 차별 없이 고등교육 수요를 충족시킬 수 있도록 재정지원을 담보할 것입니다. 물론 특성에 따라 현재의 고등교육기관들을 재편할 수는 있을 겁니다. 모든 대학에서 종합대학의 모든 학과를 다 갖추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필요와 구성원들의 결정에 따라 어떤 기관은 직업교육을 중심으로 하고, 어떤 곳은 기초학문 혹은 사회과학이나 공학을 중심으로 할 수도 있겠죠. 중요한 것은 더 이상 사회적 비용을 들여 사립재단의 이윤을 쌓아주면서 불평등한 대학구조를 재생산하지 않고, 공적 책임과 통제 하에 누구에게나 자신이 원하는 고등교육의 기회를 제공한다는 것입니다.

#4. 홍삼 대신 사회주의는 어떨까요

이렇게 되면 ‘모두가 대학에 가면서 자원을 더 비효율적으로 사용하는 것 아니냐’고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일정 부분 맞는 지적입니다. 대학에서 노동시장으로 이어지는 지금의 구조를 그대로 인정한다는 가정 하에서는 말입니다. 대학졸업자와 그렇지 않은 사람 사이의 임금격차가 존재하는 현실, 특정 직군의 보수가 다른 직업에 비해 월등하게 높고 사회적 권위와 권력까지 점유하는 불평등이 계속된다면, 대학의 서열을 없애고 누구에게나 교육기회를 보장한다고 한들 개인의 적성과 무관한 대학교육의 과잉으로 사회적 비용이 지출되거나 특정 학과 분야로의 과도한 쏠림이 발생하는 등 사회적 낭비는 그대로 존재하겠지요.

그렇기에 교육의 문제는 대학이나 교육구조를 바꾸는 것만으로는 온전히 해결할 수 없습니다. 흔히들 ‘모두가 대학에 가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죠. 이것도 맞는 말입니다. 문제는 이를 위해선 대학에 가지 않아도, 혹은 어떤 직업을 갖더라도 사회적으로 평등한 대우와 권리를 보장받을 수 있는 기반이 전제돼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교육은 불평등한 노동의 문제와 떼어놓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죠. 이건 학력과 직종에 따른 임금격차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직장과 사회에서, 누가 어떻게 어떤 결정권한을 가지고 있느냐의 문제와도 직결되죠. 특정 직군에 결정권한이나 권위가 집중되고 그에 따라 보수도 훨씬 더 많이 받는다면, 각자는 자신의 적성이나 희망과 관계없이 해당 직군에 몰릴 가능성이 높고 교육체제 역시 그에 영향 받을 수밖에 없겠죠.

물론 사회주의에서 모든 직군의 보수가 완전히 동일할 수는 없을 겁니다. 하는 일에 따라 투입하는 노력에는 차이가 있을 것이고, 그것을 어떻게 보상해야 사회적으로 필요하면서도 많은 노력을 요하는 역량을 확보할 수 있을지에 대해 구성원들이 논의하여 결정하게 되겠죠. 그러나 직장과 부서, 지역과 전국에 걸쳐 평의회를 통해 스스로를 조직하고 민주적 결정권을 부여받는 사회주의 사회의 노동자들은 평등한 결정권한을 바탕으로 차별을 없애고 차이를 최소화하는 방안들을 모색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조건들이 마련될 때, 각자는 차별과 불평등에 대한 걱정 없이 자신의 적성과 욕구에 따라 대학교육을 받을지 여부를 스스로 결정하고, (일정한 사회적 절차를 거쳐) 직업을 구하게 될 겁니다. 그 결과로 대학교육의 과잉도, 특정 분야로의 쏠림도 최소화할 수 있는 것이죠. 진정 공적이고 보편적이면서 평등한 교육을 위해, 사회주의가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워커스 49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