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부도의 날, 한국 신자유주의의 형성

[워커스] 연재

<택시운전사>와 <1987>에 이어 <국가부도의 날> 등 최근 복고풍 영화들이 인기다. 관객들은 현재의 고단한 한국사회가 만들어진 그 시절을 회상하며 분노하고, 또 슬퍼한다. 때문에 그 역사의 변곡점을 짚어보는 것은 현재의 한국사회를 이해하는 것이기도 하다.

박정희 정권은 재벌 중심의 국가자본주의체제를 유지해 왔다. 그리고 80년을 전후해 한국사회에는 신자유주의 자본축적체제가 형성된다. 그리고 이것은 97년 외환위기를 통해 전면화됐다. 이번 첫 연재에서는 전후 가장 큰 환율전쟁이었던 플라자합의와 역플라자합의를 통해 한국 신자유주의 형성 과정을 들여다보고자 한다.


전후체제

무역전쟁이 벌어졌을 때, 생산 조건이 같다면 안정된 시장을 보장받거나 환율이 낮은 쪽이 승리하게 된다. 그래서 국가는 자본에 안정된 시장을 보장하기 위해, 타국에서 오는 상품의 관세를 높이거나 상품이 들어오는 것을 막는 비관세장벽을 설치한다. 한마디로 보호무역체제를 갖추는 것이다. 이마저도 비슷한 조건이라면, 국가는 환율을 낮춰 가격경쟁력을 높이려 한다. 자본에게는 1달러 대 1000원보다는 2000원이 두 배 더 유리하기 때문이다.

과거 이명박 정부는 과감한 저환율 정책을 폈다. 국민 호주머니를 털어 재벌에게 모아줬으니, 재벌은 배를 불렸고 국민들은 배가 고팠다. 각 국가가 이렇게 환율을 낮추는 경쟁을 흔히 ‘환율전쟁’이라 부른다. 하지만 이 또한 같은 조건이라면, 사실 전쟁 말고는 답이 없다. 전쟁은 상대국의 생산시설을 파괴해 물리적인 시장독점체제를 구축할 수 있기 때문이다.

1929년, 미국에서 ‘블랙프라이데이’라는 주가폭락사태가 터졌다. 이는 세계가 무한경쟁에 돌입하는 방아쇠가 됐다. 각국은 너나 할 것 없이 수입 장벽을 높여 상품이 들어오는 것을 막기 시작했고, 이후 환율전쟁에 돌입했다. 당시 갖고 있는 금의 양 만큼 화폐를 발행할 수 있다는 규칙 자체를 깨 버린 셈이었다. 그럼에도 생존 방법을 찾기 어려웠고, 결국 전쟁이 발발했다. 후발 자본주의 국가인 독일, 이탈리아, 일본 등을 중심으로 생존을 위한 전쟁을 벌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2차 세계대전이었고, 그것은 경제전쟁이었다.

2차 세계대전은 2가지의 중요한 합의를 만들어냈다. 하나는 GATT(General Agreement on Tariffs and Trade,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 협정)를 맺어 자유무역체제를 유지하는 것.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금 대신 달러를 기본으로 하는 ‘고정환율제’의 합의, 바로 ‘브레튼우즈협정’이었다. 승전국인 미국은 전 세계 금의 2/3을 보유하고 있었고, 세계 생산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 같은 경제력을 배경으로 달러를 기축통화로 하는 고정환율제가 채택된 것이었다. 그리하여 전후체제는 GATT체제와 브레튼우즈체제로 구축됐다.

플라자합의, 그리고 일본의 잃어버린 20년

약속을 깬 것은 미국이었다. 전후 황금시대가 지나자 미국의 경쟁력은 약화됐고 무역수지는 적자로 돌아섰다. ‘세계경찰’을 자처하며 베트남전쟁에 뛰어들어 재정적자도 쌓였다. 그러자 미국은 금 보유량의 증가 없이 달러를 찍어내기 시작했다. 자연스레 달러의 가치는 곤두박질 쳤다. 이에 반발한 프랑스 등은 ‘금 1온스 당 35달러’로 책정된 기준에 따라 달러를 금으로 바꿔달라는, 즉 ‘금태환’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이에 미국 닉슨 대통령은 1971년 교환 정지를 선언했고, 1973년부터는 변동환율제를 채택하게 된다. 사실상 브레턴우즈 체제가 붕괴하고, 본격적인 환율전쟁이 시작된 셈이었다. 이것은 미국과 프랑스의 어색한 관계가 시작된 계기이기도 했다.

1970년대는 기나긴 장기침체의 시기였다. 전후 케인즈주의체제에서 누적된 재정지출로 국가 빚은 커져갔고, 인플레이션은 확대됐다. 경기침체는 계속되지만 물가는 상승하는, 이른바 스태그플레이션(Stagflation)이 지속됐다. 이즈음 ‘강한 미국’을 내건 레이건이 등장했다. 그는 정부 지출을 삭감하고, 소득세 등의 세금은 인하하고, 긴축통화정책을 펼침으로써 인플레이션을 잡고자 했다. 기업에 대한 정부 규제는 완화했으며, 동시에 고금리 정책을 추진했다. 이른바 공급부분을 자극해 수요를 증대시키는 ‘파급효과’를 보겠다는 전략이었다. 요즘 말로 ‘낙수효과’를 기대한 것이었다.

실제로 레이거노믹스 효과로 인플레이션은 13%에서 4%까지 하락했다. 동시에 4%에 가까운 성장률을 기록했다. 뿐만 아니라 19%에서 시작한 금리가 8%대로 하락해 스태그플레이션을 잡는 효과도 나타났다. 하지만 문제는 엄청난 재정적자였다. 거기다 소련과의 군비경쟁으로 미국은 사상 최대의 군비를 증강한 상태였다. 미국은 ‘쌍둥이적자’라는 최대의 난관에 부딪혔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이 바로 ‘플라자합의’였다.

전후 잿더미에서 독일과 일본이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배경에는 냉전체제가 있었다. 미국이 나서서 경제부흥을 도모했고, 이들에게 미국시장을 무제한으로 열어줬다. 플라자합의 당시, 일본의 미국 수출의존도는 50%에 달했다.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 당시, 일본은 미국의 병참지원으로 70년대 이후 최대의 호황을 누렸다. 세계 50대 기업 중 일본 기업이 33개나 됐을 정도였다. 하지만 1985년, 미국의 무역적자는 1336억 달러에 달했고, 하루 4억 달러의 이자를 감당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그 즈음 일본도 미국 무역적자의 37%(500억 달러)에 달하는 무역수지적자를 일으키고 있었으므로, 이들은 함께 방안을 마련해야 했다. 그래서 1985년 9월, G5(프랑스, 독일, 일본, 미국, 영국)를 중심으로 플라자합의가 이뤄졌다.

플라자합의를 기점으로 엔 달러 환율은 240엔 대에서 2년 만에 120엔 수준으로 하락했다. 10년 뒤인 96년 4월에는 3분의 1 수준인 80엔대로 곤두박질쳤다. 엔화의 가치가 치솟자, 미쓰비시와 소니는 미국의 자존심이었던 록펠러센터, 컬럼비아영화사를 사들였다. 일본인들은 깃발을 들고 세계여행에 나섰다. 하지만 그 효과는 반짝이었다. 급격한 엔고에 따른 수출 부진과 경기침체를 우려한 일본 중앙은행은 금리를 인하했고, 이에 유동성이 늘어나며 주식과 부동산 투자가 증가하기 시작했다. 주식과 부동산 투기 광풍에 화들짝 놀란 중앙은행이 다시 금리를 인상하자, 이번에는 부동산 폭락이 이어졌다. 부동산 담보가치가 사라지면서, 은행 대출이 부실채권으로 되돌아왔다. 금융회사는 연쇄 도산했고, 자금난에 허덕이던 굴지의 대기업들은 하나 둘씩 쓰러졌다. 대규모 구조조정으로 실직자도 증가했다. 30년이 지난 현재까지, 일본 부동산은 그 당시 시세 아래에 머물러 있다.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은 그렇게 시작됐다.1)

세계를 뒤흔든 레이거노믹스, 그리고 역플라자합의

영화 <국가부도의 날>의 한 장면. 경제위기를 예감한 유아인이 회사에 사직서를 제출하자, 사직서를 챙기던 부장이 “지난 석유위기, 80년 외채위기도 넘겼다”고 말한다. 실제로 1980년대
초, 외환위기가 찾아왔다. 앞서 말했듯, 레이건정부 당시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 폴 볼커(Paul Volcker)는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금리를 최고 19%까지 올렸다. 이 영향으로 달러를 빌려 수입대체산업화를 추진하던 동구권과 중남미국가들, 그리고 중화학공업 투자에 집중한 한국은 외채위기에 빠졌다. 때마침 70년대 말 불어 닥친 공황과 맞물려, 81년에는 폴란드가, 82년에는 아르헨티나와 멕시코, 브라질이 차례로 무너져 내렸다.

당시(1976~1979년) 한국의 해외차관 역시 멕시코와 브라질에 이어 3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냉전체제 당시 최전선에서 자본주의의 쇼윈도를 자처한 한국은, 미국의 도움으로 무사히 외환위기를 넘기게 된다.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에서는 ‘남한은 미국의 주요 동맹국이자 전방국가로서, 안보문제에 대한 즉각적이고도 최우선적인 강조 덕분에 구제금융을 지원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1983년 레이건 대통령과 나까소네 총리는 서울에 총 40억 달러의 구제금융을 주선했다. 이 액수는 한국이 지불하지 않은 전체 채무의 약 10%에 달한다’고 전하고 있다. 미국의 회생을 위한 레이거노믹스는 이렇듯 제3세계의 희생을 딛고 추진된 것이었다.

엔화 가치의 상승으로 수출 경쟁력이 떨어진 일본은 엔고 불황에 시달렸다. 이에 일본은 고부가가치산업에 집중하는 한편, 임금 등 생산비가 저렴한 동남아시아에 투자를 통한 우회수출로 엔고 불황을 극복하게 된다. 실제로 당시 일본이 자동차, 반도체를 직접 투자하면서 동남아시아는 높은 성장률을 기록했다. 이후 1995년 초 역플라자합의로 엔화가치가 하락하고 달러가치가 상승하면서 일본은 수출경쟁력을 회복하게 된다. 1997년 초 미국의 금리인상까지 더해지자, 저금리, 저환율로 아시아에 과잉투자됐던 달러들이 역류하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태국을 비롯한 동남아시아는 경상수지가 악화되면서 외환위기를 맞게 된다. 원화의 가치도 오르면서, 한국은 수출 침체에 빠졌고 싼 값에 빌렸던 달러 상환 독촉에도 시달렸다.

한국 신자유주의 자본축적체제의 형성과 과잉생산 위기

80년대 초, 미국과 일본의 지원으로 한국은 외환위기의 급한 불을 끄게 됐다. 그리고 83년 레이건 방한을 계기로 관세인하, 수입규제 철폐, 서비스산업 자유화, 외국인재산권 보호에 대한 압박이 시작됐다. 결국 1985년 ‘한미 슈퍼 301조 협약’이 체결되면서, 한국은 외국인 투자자유화 조치를 단행한다. 이와 함께 그 해 IMF IBRD 연차총회 등이 개최되면서 한국은 시장 개방과 자유화에 대한 더 큰 압박에 시달리게 된다.

한편 한국사회 내부는 국가가 주도하는 재벌 중심 자본축적체제에서 벗어나, 신자유주의적 체제재편 흐름이 강화되고 있었다. 당시 평론가 야마사끼 아끼오(山川曉父)는 일본 문예춘추에 ‘박 대통령은 왜 시해됐는가?’라는 글을 기고해 한국 경제정책을 둘러싼 ‘구세력 vs 테크노크라트군’의 내부대립을 설명했다. 글의 내용은 이렇다.

“고성장을 달성할수록 한국 경제는 세계자본주의의 유기적인 일부로 편입돼 파란의 세계자본주의경제 위기의 ‘약한 고리’가 됐다고 할 수 있다...(중략)...경제정책과 운영을 둘러싸고 테크노크라트군과 지금까지의 낡은 ‘혁명주체그룹’ 간의 대립이 확대됐다. 최근에도 경제기획원에 속하는 테크노크라트군이 그 산하기구인 KDI 세미나를 열어 인플레 억제를 위한 예대금리의 인상과 시중은행의 민영화 등의 금융제도 개변을 강하게 주장해, 보수적인 재무부와 첨예하게 대립하면서 경제정책은 진흙탕의 혼란 상태로 빠져들었다.”

광주를 피로 물들이고 집권한 전두환은 김재익, 사공일, 강경식 등 신자유주의 정책입안자들과 ‘경제사회발전계획’을 내놓았다. 이를 통해 총 통화공급을 줄이고 금리인하를 목표로 하는 금융정책이 추진됐다. 수출지원과 정책금융을 축소해 실질금리를 보장하는 방안도 추진됐다. 그 결과 76~78년 사이 연평균 35%에 이르던 총 통화 증가율은 83~85년에 14%로 하락했다. 아울러 수입허가제 폐지와 외국인 투자 자유화를 골자로 한 ‘관세제도 및 외자도입법’ 개정 등 수입자유화도 추진됐다. 이와 함께 금융실명제, 은행 민영화, 외자도입 자율화, 외자합작은행(한미은행, 신한은행) 설립을 허용하는 금융자율화를 추진했고, 상호출자금지와 출자총액 제한 등을 골자로 하는 공정거래법을 제정했다. 1986년에는 공업발전법이 제정됐다. 이는 국가가 특정산업에 자원을 집중 배분하는 ‘선별적 산업지원’에서 수출입 금융, 장기설비 금융, 기술개발 금융 등 산업 일반에 대한 기능별 지원으로 대체하는 것이었다.2)

이 같은 경제체제는 한국을 변화시키는 환경을 조성했다. 그 변화의 결정적인 요인 역시 ‘플라자합의’였다. 플라자합의에 따른 소위 ‘3저 시대(낮은 유가, 낮은 금리, 낮은 달러)’를 맞아, 수출이 급격하게 늘어났다. 86~89년까지 10%가 넘는 성장률과 엄청난 흑자 기록을 매년 갈아치웠다. 3저 호황을 거치며, 과잉 축적된 자본을 바탕으로 재벌은 제2금융권에 진출했다. 주식시장이 활성화되며 재벌의 자금 조달 구조가 바뀌었고, 국가에 대한 의존도가 줄면서 자율성이 증가됐다. 1987년부터 과잉자본이 해외로 진출하면서, 이듬해에는 들어오는 자본보다 나가는 자본이 더 많아지기 시작했다. 이후 김영삼 정권의 ‘세계화’는 자본의 요구이기도 했다. 마침내 1994년, 경제기획원과 재무부가 통합돼 탄생한 ‘재정경제원’은 국가주도 개발체제의 종말을 알리는 것이었다.

한편 1980년 공정거래법 제정과 공정거래위원회의 설치는 박정희 정권의 재벌중심 독과점 체제를 깨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3저 호황을 거치며 자본 조달이 자유로워진 재벌에게는 규제력이 없었다. 한국은 이후 1996년, 포괄적이고 급진적인 금융자유화를 요구하는 OECD에 가입하게 된다. 이로써 자본의 입출입은 더욱 자유로워졌고, 종합금융회사(종금사)를 통한 재벌의 사업다각화가 확대됐다. 삼성이 자동차에, 현대가 제철과 전자에 뛰어드는 등 투자가 확대되며 과잉중복투자에 따른 과잉생산의 결과가 노정됐다.

한편으로 재벌들은 동남아 시장에서 엔고를 이겨내기 위해, 제로금리 수준의 일본자본을 끌어들이며 엔 캐리 트레이드(Yen carry trade)3)에 나섰다. 이후 SK는 저금리 단기자금을 빌려주고 동남아에 고금리 장기자금으로 대출하는 장난을 치다 위험에 처하기도 했다. 상황이 그런데도 정부는 종금사에 대해 건전성 감독 기준을 아예 적용하지 않았고, 6대 재벌이 보험회사 주식을 인수 혹은 보유할 수 있도록 했다. 반면 사외이사제, 소액주주권 강화, 외부감사제도의 도입은 모두 연기됐다. 이 같은 과잉생산 위기를 배경으로 1995년 역플라자합의가 이뤄졌고, 엔저현상과 함께 미국의 금리가 인상되면서 외채위기가 찾아왔다.

전두환 정권 이후 지속된 신자유주의적 자본축적 체제가 IMF 외환위기를 계기로 한국사회에 완전히 구축됐다. 강경식과 임창열, 김기환 등 소위 테크노크라트들은 국가를 근본적으로 개조하는 길로 IMF 구조조정 프로그램을 받아들였다. 김대중 역시 그것을 관치금융과 재벌체제 개혁을 위해 필요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들은 뼛속까지 시장주의자로 IMF로 갈거다”, “가진 놈 중심으로 새 판 짜기”에 배팅한 유아인의 인생역전은 성공했다. 그리고 국민들이 금을 모아 기업들의 부채를 갚아낸 지 20년이 흐른 지금. 가계부채 1500조, 재벌 사내유보금 1500조 시대가 열렸다. [워커스 52호]

<각주>
1) 중앙일보, [그날에서 오늘을 읽다] 플라자합의 31년…풀리지 않는 엔고 봉인
2) 지주형. 한국신자유주의의 기원과 형성, 김동호. 대통령 경제사
3) 금리가 낮은 엔화를 빌려 금리가 높은 국가의 자산에 투자하는 행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