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당과 민주당이 만든 70년 헌정사

[1단 기사로 본 세상] 무한반복 재생되는 한국 현대사

[편집자주] 주요 언론사가 단신 처리한 작은 뉴스를 곱씹어 세상을 보는 눈을 키우려고 한다. 2009년 같은 문패로 연재하다 중단한 것을 이어 받는다. 꼭 ‘1단’이 아니어도 ‘단신’ 처리한 기사를 대상으로 한다.

미래통합당은 7월 9일 이철승의 딸 이양희 성균관대 교수를 당무감사위원장에 임명했다. 이 교수는 이미 2011년 박근혜 비대위에서 비대위원을 지냈기에 놀랄 일도 아니다.

  7월 10일자 중앙일보 18면(왼쪽)과 세계일보 6면

이 교수의 통합당 당무감사위원장 임명을 계기로 그의 아버지 고 이철승 전 신민당 대표의 화려했던 정치 편력이 재조명되고 있다. 이철승 전 의원은 우익 학생운동을 대표하며 이승만의 친위부대로 잠시 자유당에 몸담았지만 오랫동안 야당이었던 민주당에서 활동했다. 야당 대표 이철승은 박정희와 화합하는 온건노선을 걸었지만 기질은 반골인 특이한 정치인이었다. 이철승의 정치는 1946년 고려대 3학년 때부터 시작된다.

미국, 영국, 소련 3개국 외무부장관이 1945년 12월 모스크바에 모여 조선의 신탁통치를 결정했다. 이른바 ‘모스크바 3상회의’다. 신탁통치안은 미국이 먼저 제안했다. 동아일보는 이를 소련의 주장이었다고 보도했다. 고의적 왜곡은 아니지만 명백한 오보였다. 동아일보가 직접 취재한 게 아니라 미 태평양사령부가 발간한 태평양지역 성조지 보도를 전한 합동통신 보도를 인용했다.

좌익 학생들은 1946년 1월 3일 서울운동장에서 모스크바 3상회담 지지 시민대회를 열고 종로로 진출했다. 이날 고려대 정치학과 3학년생이었던 우익 학생 이철승은 반탁 학생운동 준비회를 만들어 좌익 학생들과 첫 충돌했다.

이철승은 나흘 뒤 ‘반탁전국학생총연맹’(학련)을 결성했다. 좌익 학생들은 다시 이틀 뒤 ‘재경학생 행동통일촉성회’(학통)를 구성했다. 이후 학련과 학통은 볼썽사나운 한국현대사를 변주했다.

이철승은 1946년 1월 18일 오후 2시 서울 정동교회에서 학련 주최 반탁·반공 전국학생대회를 열었다. 학련은 미소 영사관에 몰려가 결의문을 전달하고, 을지로에 있던 인민보사를 부수고, 인사동 인민당을 짓밟고, 안국사거리 서울시 인민위원회와 부녀총동맹 사무실을 부수며 좌익단체 본부를 모조리 박살냈다. 좌우 대립으로 그 해 3.1절 행사를 우익은 서울운동장에서, 좌익은 남산에서 따로 열었다.

1946년 3월과 5월에 서울에서 1, 2차 미소 공동위원회가 열리자 이철승의 학련은 회의가 열리는 덕수궁 앞에 진을 치고 소련 대표들에게 돌을 던졌다.

이철승의 학련은 문화예술계에도 손을 뻗쳤다. 좌익의 득세에 숨죽였던 우익 예술가들은 극예술협회(극협)를 만들어 1947년 5월 창립공연 ‘자명고’(연출 유치진)를 무대에 올렸다. ‘자명고’는 좌익의 테러에 맞서 학련의 보호 하에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극협은 1950년 극단 ‘신협’으로 확대발전해 오늘날 연극계를 장악했다.

이철승의 학련은 이승만의 비호 하에 1948년 10월 여순사건 이후 목포까지 내려갔다. 이들은 적산건물에 ‘학련 군산지부’라는 간판을 걸고 사람들을 붙잡아 매질했다. 사람들은 권력의 비호 하에 날뛰는 철없는 학생들에게 얻어맞은 것이 창피해 말도 못했다.

1948년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청년단체를 하나로 모아 자기편으로 만들려고 했다. 그렇게 1948년 12월 대한청년단(한청)이 탄생했다. 한청엔 이철승의 학련과 서북청년회 등 여러 우익단체가 합류했다.

극우주의 테러리스트에 가까웠던 이철승은 친일문제만큼은 철저했다. 이승만이 친일 경찰을 대거 채용하자 이승만과 결별하고 야당의 길을 걷는다. 이철승은 1954년 총선 때 전주에서 무소속으로 당선돼 1988년까지 7선 국회의원을 지낸다. 재선부터는 모두 민주당(신민당) 소속이었다.

1958년 7월 연계자금 파동 때 민주당의 젊은 이철승 의원은 서류보따리를 들고 자유당 의원석으로 던지려고 했다. 이때 자유당 김성곤 의원이 뛰어나가 “던져봐라, 어디...”라고 했다. 이철승 의원은 보따리를 슬며시 내려놓았다. 둘은 고려대 선후배였다.

5.16 쿠데타 직후 군정 반대운동을 벌였던 이철승은 1969년 박정희가 3선 개헌을 추진하면서 장기집권 음모를 노골적으로 드러내자 3선 ‘개헌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범투위)를 조직했다. 범투위 조직위원장은 이철승, 선전위원장은 장준하가 맡았다.

70년대 후반 신민당 당권을 잡은 이철승은 ‘중도통합론’을 내걸고 점진적 온건노선을 걸었다. 박정희도 이에 화답했다. 박정희는 1977년 6월 27일 이철승 신민당 대표와 면담하고 서로 노력하자고 합의했다. 신민당 안팎에선 이철승 대표를 ‘사쿠라’라고 비난했다.

1979년 5월 30일 신민당 대표 선거에선 이철승과 김영삼이 피터지게 싸워 근소한 차로 김영삼이 당 대표가 됐다. 김영삼은 1979년 6월 11일 “조국의 민주적 통일을 위해 김일성을 포함하는 북한의 책임 있는 사람과 만날 용의가 있다”고 말했다. 북한은 김영삼의 제안에 화답했다. 북한은 박 대통령이 제의한 정부 당국자 회담은 외면한 터였다. 남한 내 우익이 궐기했다. 대한상이군경회와 반공청년회원 120명이 79년 6월 21일 신민당사에 몰려와 “김일성 앞잡이 김영삼을 처단하라”고 소리 질렀다. 김영삼 축출을 위한 박정희의 공작정치가 시작됐다.

1979년 8월 9일 YH 여성노동자들의 신민당사 농성이 이틀 뒤 강제진압 당했다. 서울 민사지법이 79년 9월 9일 신민당 총재단에 직무집행정지 가처분결정을 내렸다. 박정희의 공작정치가 또 한 번 적중하는 듯했지만 10.26을 불러왔다.

이철승은 1985년 2.12 총선에서 돌풍을 일으킨 신민당 후보로 마지막 국회의원을 지냈다. 신민당은 돌풍을 일으켰지만 전두환 정권과 정면으로 맞서려 하진 않았다. 박정희, 전두환의 오랜 군사정권에 반발하는 국민들의 대통령 직선제 요구에도 신민당 이민우 총재와 이철승 최고위원 등은 오히려 전두환 편을 들었다. 이에 반발한 김영삼, 김대중은 70여 명의 의원과 함께 신민당을 탈당해 통일민주당 창당을 추진했다.

1987년 4월 20~24일 통일민주당 20여 개 지구당에 폭력배가 난입하여 기물을 부수고 당원을 폭행하는 등 난동을 부렸다. 통일민주당은 정부가 개입한 비열한 정치공작이라며 엄정 수사를 촉구했지만 흐지부지 됐다. 1987년 4월 통일민주당 창당대회를 정치깡패들이 방해한 일명 ‘용팔이 사건’은 전두환 정권의 지시로 안기부가 개입한 또 하나의 정치공작이었다.
1988년 9월 용팔이와 이선준 전 신민당 청년부장이 잡히차 검찰은 신민당 이택희, 이택돈 의원이 청부폭력을 지시했다고 결론을 내리고 서둘러 덮었다. 이선준 전 청년부장은 이철승의 비서로부터 거사 자금을 받았다고 털어놨지만 며칠 뒤 이철승은 자신의 개입을 부인하는 성명을 냈다. 김영삼 대통령이 취임한 1993년 사건을 재조사해 강력한 야당 출현을 막기 위해 장세동 당시 안기부장이 이택희, 이택돈 의원에게 5억 원을 제공한 사실이 드러났다.

1988년 총선에 낙선한 이철승은 정계에서 은퇴하고 자유총연맹 총재를 맡으며 2016년 94살에 숨질 때까지 다시 반공투사로 활약했다. 이승만의 비호 하에 우익 청년의 표상이 됐지만, 친일 경찰을 등용하는 이승만과 결별했다가 다시 말년엔 이승만을 존경했다. 이철승은 민주주의를 주장했지만 박정희와 화합했고, 김대중 노무현 정부 10년을 ‘도둑맞은 10년’이라고도 불렀다. 70년의 시간을 돌아 역사는 반복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