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모든 이념의 격전장, 파시즘에 맞선 스페인 내전

[혁명의 세계, 반란의 역사]

[출처: Wikimedia Commons]

“스페인에 처음 왔을 때, 그리고 그 후 얼마 동안, 나는 정치적 상황에는 관심이 없었을 뿐 아니라 알지도 못했다.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만 알았지, 어떤 종류의 전쟁인지도 몰랐다. 그런데 왜 의용군에 입대했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파시즘과 싸우기 위해서’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무엇을 위하여 싸우냐고 묻는다면 ‘공동의 품위를 위해서’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조지 오웰은 스페인 내전이 낳은 걸출한 문학작품인 《카탈로니아 찬가》에서 전쟁의 성격과 참전의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그는 1936년 스페인으로 향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는 영화로도 제작돼 스페인 내전을 세계적으로 널리 알린 문학작품이다. 헤밍웨이 역시 1936년 스페인으로 향했다. 이 두 작품은 전쟁을 기억하고 서술하는 방식이 다르지만, 스페인 내전을 전 세계 민중들에게 널리 인식시켜준 대표적인 걸작이다.

이들 말고도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앙드레 말로, 파블로 네루다, 시몬 베유 등 수많은 예술인과 지식인이 국적과 인종을 초월해 자발적으로 스페인 내전에 참전했다. 사진기자 로버트 카파는 스페인 내전을 상징적으로 대표하는 ‘어느 인민전선 병사의 죽음’이라는 사진으로 전 세계에 이름을 알렸다.

하지만 이들은 스페인에서 싸운 수많은 자원병 가운데 극히 일부의 유명인일 뿐이었다. 전 세계에서 수만 명의 민중들이 스페인으로 집결한 것은 스페인 내전이 단순히 ‘스페인’ 한 나라만의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스페인 내전을 세계의 미래를 결정짓는 전장으로 인식했던 것이다.

반혁명에서 내전으로

1936년부터 39년까지 벌어진 스페인 내전은 역사학자들로 부터 흔히 2차 세계대전의 최종 리허설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이는 아나키즘부터 왕정복고에 이르기까지 당대 유럽의 주요 개념이 총동원됐기 때문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그리고 소련과 같은 주요 국가들이 어떠한 형식으로든 직간접적으로 연루됐기 때문이다.

스페인 내전은 1936년 우파 군부 세력이 공화국에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시작됐다. 하지만 그 전부터 스페인 정세는 전쟁의 심연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20세기 들어 스페인은 남은 식민지마저 잃고 경제상황도 암울한 상태였다. 쿠데타도 빈번하게 일어났다. 정치 세력들은 정치적 입장 차이로 반목과 대립을 지속했다. 누가 집권을 해도 근본적인 변화는 불가능해 보였다.

1931년 제2공화정이 수립돼 헌법을 개정했는데, 제1조 1항이 “스페인은 노동자들의 공화국이다”였다. 이 얼마나혁명적인가! 귀족들의 각종 봉건적 특권 폐지, 가톨릭교회 개혁, 여성 참정권 부여 등 상상 이상의 혁명적 조치들이었다. 하지만 정부의 개혁정책은 좌우 모두의 불만을 증폭시켰고, 1933년 11월 선거에서 보수 세력인 CEDA(스페인자치우익연합)이 의회 제1당이 됐다. 우파정권은 토지개혁 중단을 비롯한 각종 개혁정책을 후퇴시켰다. 이에 반발해 1934년 10월 노총(UGT, 노동자총동맹)은 총파업을 단행했고, 유이스 콤파니스를중심으로독립파들이카탈루냐독립을 선언했으며, 아스투리아스 지역에서는 노동자들이 사회주의 코뮌을 수립했다. 이러한 총파업과 반란은 모두 진압됐지만, 우파정권의 지지도가 곤두박질치면서 1936년 의회를 해산하고 총선을 실시하기로 한다.

이때 분열돼 있던 중도 좌파와 좌파 세력들이 ‘인민전선’을 결성해 선거에 참여했다. 인민전선에는 공화주의, 사회주의, 아나키스트들과 POUM(마르크스주의 통합노동자당), 공산주의 세력 등이 참여했다. 이에 대응해 CEDA를 중심으로 한 우파세력도 반혁명 국민전선을 결성했다. 하지만 공화주의 우파들의 미적지근한 반응과 파시스트 정당인 팔랑헤당의 반대로 흐지부지 끝났다.

총선 승리로 권력을 장악한 인민전선은 정부를 조직하고 토지개혁 등 일련의 혁명적 정책을 단행했다. 이 과정에서 우파 정치인 칼보 소텔로가 살해당하자 스페인 군부와 우파세력은 이를 명분 삼아 7월 18일, 쿠데타를 일으켰다. 쿠데타의 우두머리는 아스투리아스 광산 노동자들의 봉기를 진압한 스페인령 모로코 주둔 수비대장 프란시스코 프랑코였다.

이들은 “조국의 분열과 볼셰비키 혁명을 차단하기 위해서”라는 명분을 내세웠다. 이후 스페인은 2년 반 동안 가혹한 내전을 치렀다. 쿠데타 직후 군부는 애초의 목표인 마드리드를 쉽게 점령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민중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혀 실패했다. 그렇다고 공화 정부가 쿠데타군을 완전히 진압한 것도 아니었다. 스페인 민중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군대를 조직해 격렬하게 싸웠다. 대도시에서는 반란군이 대패했다. 스페인 민중의 힘은 전 세계 지식인들을 흥분시켰다. 세계 각지에서 4만여 명의 외국인 용병이 ‘정의’를 외치며 국제여단이라는 이름으로 참전했다.

전쟁이 장기화하자, 프랑코의 군부 세력은 점점 공화국을 공격적으로 밀어붙였다. 프랑코가 공세를 취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독일과 이탈리아의 지원이 컸다. 특히 독일 공군은 주요 전투에 참여했을 뿐만 아니라, 모로코에 있던 스페인 군대를 수송해오는 역할까지 맡았다. 내전은 처음부터 국제전의 양상을 띠었다. 독일 공군은 1937년 4월, 무고한 시민 수천 명이 사망한, 그 유명한 게르니카 폭격의 주범이었다.

반면 스페인 공화국을 가장 적극적으로 지원해준 국가는 바로 소련이었다. 하지만 너무 멀어서 수송이 오래 걸렸고, 무기의 질도 전체적으로 독일보다 떨어졌다. 영국과 프랑스의 인민전선 정부, 그리고 미국은 스페인의 군부 세력보다 좌파 세력을 더 위험하게 여겼다. 이와 함께 스페인에 투자한 자본을 보호해야 했으며, 프랑코 군에게 무기 판매도 필요해서 불간섭의 이름으로 스페인 공화정부를 고립시키는 간섭을 했다.

그런데도 세계 각국으로부터 민간 차원의 지원은 활발했다. 영국, 프랑스, 미국 정부는 스페인을 지원하지는 않았지만, 영국인, 프랑스인, 미국인을 비롯한 수만 명의 사람들이 파시즘과 싸우려고 스페인에 지원해 왔다. 스페인 내전의 상징으로 언급되는 ‘국제여단’. 그들 대부분은 전선으로 배치될 때까지 소총 다루는 법도 몰랐던 오합지졸이었다. 비록 공화정을 지키고 파시즘에 맞서 싸운다는 순수한 동기로 구성돼 도덕적 상징이 되었지만, 이들은 제대로 훈련받은 정규군이 아니었기에 전투력 면에서는 큰 도움이 되지는 못했다.

내부의 분열과 패배

프랑코는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를 제외한 스페인의 주요 지역들을 모조리 장악해 나갔다. 파시스트의 도움으로 프랑코는 2개 전선마저 뚫었다. 한쪽은 북부에서 바르셀로나로 가는 길이었고 프랑코가 지휘한 다른 한쪽은 남부에서 마드리드로 향했다. 하지만 공화국 내부에 균열이 생기고 있었다. 스페인 공산당과 아나키스트들의 가장 큰 입장차는 전쟁 성격에 대한 규명이었다. 공산당과 사회당은 “먼저 전쟁에서 승리한 후 혁명에 종사하자”고 주장했고, 아나키스트들과 POUM은 “전쟁과 혁명은 분리할 수 없으며, 반드시 동시 진행해야 한다”고 맞섰다.

전쟁은 프랑코 군에게 유리하게 전개됐다. 1938년 말이 되자 프랑코 군의 공격이 거세게 몰아쳤다. 마드리드는 계속 저항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마드리드 최후 공격이 시시각각 다가오면서 점점 많은 국가가 프랑코 정부를 인정했다.

결국 1939년 1월에 바르셀로나가 함락되자, 영국과 프랑스는 공식적으로 쿠데타 세력을 스페인의 정식 정부로 인정했다. 이를 바탕으로 3월 28일 프랑코 군은 마드리드에 입성했다. 최후의 보루인 마드리드마저 함락되고, 프랑코는 5월 19일 라디오 방송에서 자신의 승리를 공식적으로 발표하게 된다. 전쟁이 끝나고 곧이어 발발한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파시즘은 종말을 고하지만 프랑코는 1975년, 자신이 사망할 때까지 권력을 유지했다.

스페인 내전은 단순히 스페인에서 벌어진 권력 투쟁이 아니었다. 공화정이라는 가치와 파시즘이라는 가치를 두고 서구 정부와 시민이 벌인 일종의 대리전이었다. 서구 민주주의의 허구성을 드러내는 동시에, 이념과 계급과 종교가 뒤엉켜 폭발한 전쟁이었다. 사회주의, 공산주의, 아나키즘, 파시즘 등 온갖 정치 이념들의 격전장이었으며, 자본가·지주 계급과 노동자, 농민 계급이 맞붙은 계급 전쟁이었다. 자유와 평등이라는 인류 보편의 가치를 위한 전 세계 양심의 전쟁이었다. 그러나 혁명적 이상의 좌절과 배신 그리고 분열은 이 전쟁의 또 다른 얼굴이었다.

참고문헌
1. 제프 일리, 유강은 옮김, 《THE Left 1848-2000》(뿌리와이파리, 2008).
2. 윌리엄 A. 펠츠, 장석준 옮김, 《유럽민중사: 중세의 붕괴부터 현대가지, 보통사람들이 만든 600년의 거대한 변화》(서해문집, 2018).
3. 조지 오웰, 정영목 옮김, 《카탈로니아 찬가》(민음사, 2001).
4. 데이비드 파커 외, 박윤덕 옮김, 《혁명의 탄생-근대 유럽을 만든 좌우의 혁명들》(교양인, 2009).
5. 앤터니 비버, 김원중 옮김, 《스페인 내전–20세기 모든 이념들의 격전장》(교양인,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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