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랍인들의 증오가 향하는 곳

[INTERNATIONAL2]


1. 비동맹노선의 유산

“왜 아랍 국가들은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미국 편에 서지 않는가?”

지난 4월 7일, 유엔 인권위원회가 러시아를 퇴출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러시아의 침공을 규탄하고 인도주의적인 위기의 책임을 묻는 이전 두 번의 표결과 달리 이번에는 다소 힘겹게 통과됐다. 총 175개국이 참여한 표결에서 찬성표가 93, 반대표가 24였고 58개국이 기권했다. 이러한 결과는 러시아를 비난하는 국제사회의 공조에 금이 가고 있는 것으로 평가됐다.

아랍 세계 역시 이러한 분위기를 만드는 데 한몫했다. 상대적으로 소련과 가까웠던 알제리와 이란은 반대표를 던졌고 전통적으로 미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보여온 튀니지, 이집트, 심지어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연합, 카타르와 같은 걸프만 산유국들도 표결에 참여하지 않았다. 걸프협력회의 회원국들이 보여준 의외의 선택은 바이든 행정부에서 달라진 중동정책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평가된다. 대선 후보 시절부터 바이든은 사우디가 예멘에서 벌이고 있는 전쟁에 유보적인 태도를 보였다. 또한 석유수출국기구의 핵심 국가들인 사우디와 러시아는 석유 증산 거부에 보조를 맞추고 있다. 이집트에서는 군부 출신 알 시시 정권이 러시아와의 관계를 강화하는 등 외교관계의 다변화를 꾀했다. 전통적으로 친미 성향을 보여온 튀니지 역시 최근 이슬람주의자들과 권력투쟁을 벌이고 있는 카이스 사이에드 대통령의 노선에 미국이 노조의 권리 등을 거론하며 비판적 입장을 보여 내정간섭이라는 반발이 일었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대하는 아랍 국가들의 흥미로운 태도에는 이러한 상황적인 요인과 함께 러시아나 미국과의 관계, 그리고 전쟁에 대한 입장이 반영돼 있다. 이집트, 알제리 등 전통적으로 러시아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어온 나라들이 있으며 미국과 가깝지만 그렇다고 러시아에 등을 돌리지 않으려는 나라들도 여럿 있다. 매우 유동적인 외교관계를 고려할 때,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이번 표결은 냉전 시절 미국과 소련 어느 진영에도 속하지 않으려 했던 비동맹노선의 핵심인 중동 및 북아프리카 지역의 전통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음을 확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들의 신중한 태도는 전쟁에 대한 아랍세계의 고유한 감수성 때문일 수도 있다. 아랍 민중, 그리고 정권 또한 미국과 러시아 중 한쪽을 택하는 문제만큼 전쟁이 초래하는 피해에 대한 관심이 크다. 21세기 내내 어딘가에서 전쟁을 했던 중동은 전쟁으로 인한 민중과 사회 전체의 고통에 민감한 것이다. 이러한 배경에서, 그리고 지리적인 요인이 더해져서 확전이나 핵전쟁 등에 대한 우려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아랍인들은 그들이 처한 조건을 통해 우크라이나인들과의 연대만큼 반전 역시 절대적으로 견지해야 할 원칙이라는 것을 깨닫고 있다. 푸틴과 같은 외국의 압제자만이 아니라 이를 제압한다는 명분으로 벌어지는 전쟁에도 반대해야 하는 것이다.(1)

아랍인들의 입장에서 우크라이나인들이 겪는 고통은 수년 또는 수십 년간 자신이나 이웃이 겪어온 것이다. 이러한 공감이 반전의 동력이 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국제사회의 균형 잡힌 시각을 요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즉 우크라이나를 향한 연대의 열기가 아랍 등 세계 다른 지역의 상황에도 적용됐으면 하는 아쉬움과 바람이 있는 것이다. 특히 유럽을 찾는 우크라이나인들에게 국제사회가 보여주는 지지가 세계 다른 지역에서 동일한 고통을 겪고 있는 이들, 특히 유럽으로 향하는 난민에도 동일하게 적용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2. OO에게 죽음을

아랍 세계 하면 떠오르는 아래의 이미지를 생각하면 미국에 맹종하지 않는 것이 그리 이상한 것도 없다. “OO에게 죽음을” 이것은 중동을 상징하는 표현 중 하나이다. “이교도에게 죽음을”, “(금기를 깨고 알 아크사 사원을 방문한 전 이스라엘 총리) 아리엘 샤론에게 죽음을”, “(그의 소설 〈악마의 시〉가 이슬람을 모욕했다는 혐의를 받았던) 살만 루시디에게 죽음을”. 그리고 가장 익숙한 사례는 아마도 “미국에 죽음을”일 것이다.

위로부터의 친미화 경향에도 여전히 아랍 세계에 강한 반미 정서가 존재하는 것은 팔레스타인 문제 해결이 지지부진했던 것, 미국이 이라크에서 보여준 모습 등의 배경 때문이다. 보다 직접적으로는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파키스탄, 사우디아라비아 등에 미군이 주둔하며 군사적인 갈등을 심화시키는 것이 대중적인 반미주의를 유지하는 핵심 요인일 것이다.

미국이 이러한 반감의 유일한 대상은 아니다. 영국이나 프랑스 등 전통적인 관련 국가뿐 아니라 중동 문제에 상당한 지분을 가진 독일 역시 새로운 증오의 대상이 됐다. 이제는 독일 국기가 불타는 장면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그런데도 중동의 반서구는 주로 반미를 의미한다. 그리고 미국에 대한 반감의 이면에는 소련, 그리고 이제는 러시아가 된 북쪽 지역과의 상대적으로 밀접한 관계가 존재한다.

아랍의 봄도 미국에 대한 태도를 긍정적으로 바꾸지는 못한 것 같다. 중동 민주화를 표방하며 아랍의 봄을 지지했던 미국이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기대를 불러일으켰던 버락 오바마의 당선도 미국에 대한 이미지를 개선하지 못했다. 오히려 그가 당선 전부터 강조했던 새로운 중동 정책이 성과를 내지 못한 것이 미국에 대한 일말의 기대마저 꺾게 만드는 역할을 했다.

아랍인들의 증오는 이들에 대한 미국 등 외부 세계의 반감과 쌍을 이루고 있다. 일례로 2021년 8월 26일, 아프가니스탄 카불 공항 테러로 13명의 미군 병사가 사망한 사건은 미국 사회에 아랍인 혐오 현상을 야기했다. 당시 미국인들은 “당신네 나라로 돌아가시오!”를 외치며 아랍계 미국인에 위협을 가했다. 이러한 반아랍 정서의 기원은 9.11테러였다. 이 비극이 정당하게 기억되는 것이 불행하게도 미국에 거주하는 아랍인에 대한 거부감을 주기적으로 환기하는 역할을 했다. 물론 이러한 증오는 환상에 기댄 것이다. 공공장소에서 코란을 불태우는 등 반이슬람 행위들이 일어나지만 정작 아랍계 미국인의 과반수는 기독교인이다. 아랍인들이 세속적인 미국의 법이 아닌 이슬람법을 따른다는 등의 얘기들은 전혀 현실에 부합하지 않는다. 최근 프랑스 대선에서도 집권 문턱에까지 간 극우 세력들은 다시 한번 반이민 정서를 잘 우려먹었다. 특히 화재를 몰고 다닌 에릭 제무르는 아랍과 이슬람으로부터 프랑스를 지켜내자는 애국주의로 유권자들을 사로잡았다. 반이슬람 경향이 표로 전환되고 있는 것이다.


3. 외부의 적에서 내부의 희생양으로

‘증오의 전시장’은 지역분쟁의 대명사인 중동에 어울리는 또 하나의 표현일 것이다. 수년 전 IS가 보여준 행태는 증오가 전방위적으로 나타나는 지역의 현실을 극단적으로 보여준 사례였다. 기독교 또는 제국주의 세력으로서의 서구나 정교분리주의적인 정권 등 고전적인 적들뿐 아니라 자신의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다양한 사회집단에 증오를 표출했다. 증오가 확산하는 만큼 강도도 강하다. 죽이고자 할 만큼, 자신의 목숨을 버릴 수 있을 만큼 강하고 뿌리 깊은 증오가 존재하는 것이다. 근본적으로, 태생적으로 다른 집단에 속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을 이해하고 연대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적어도 현재 중동 지역에서는 그렇다.

외부의 지배자, 내부의 지배자, 내부의 소수자. 아랍인들의 증오가 향하는 곳을 이렇게 구분해본다. 외부의 지배자에 대해서는 증오나 적대감이, 내부의 지배자에 대해서는 분노가, 내부의 소수자에게는 혐오나 증오가 좀 더 잘 어울리는 한국어 표현일 것이다. 조심스럽지만 증오의 대상이 외부에서 내부로 이전되는 경향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슬람주의가 이교도들의 세계가 아닌 이슬람 사회 내부를 비판하는 것으로 노선 전환을 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일 것이다. 1970년대 무슬림형제단의 지도자 사이트 쿠트브는 이집트 사회 전체가 자힐리야, 즉 신의 뜻에 따르지 않는 상태에 있다고 간주했다. 이슬람의 가르침을 존중하지 않는 통치자는 정당한 전쟁, 즉 지하드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물론, 이후 이집트의 무슬림형제단은 정권과 체제를 용인하고 제도권 정치에 진입하게 된다. 자힐리야로 규정했던 이집트 정치체제를 인정하는 또 한 번의 노선 전환으로 이집트 제1의 야권세력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행보는 이슬람주의 진영의 모델이 된다.

증오는 같은 아랍인을 향하기도 한다. 예멘을 초토화하는 아랍 연합군의 적대감은 유럽이나 미국에 대한 것보다 약하지 않다. 이제는 형제애와 상반되는 감정을 보여주는 사례를 찾는 것이 어렵지 않다. 다른 한편으로는 내부의 소수자에 대한 증오가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게 됐다. 콥트교, 시아파와 같은 종교적 소수집단이나 쿠르드인, 투르크멘인, 아르메니아인, 아시리아인 등이 공격의 대상이 됐다. 역설적으로 시민의 연대를 동력으로 한 아랍의 봄이 이들 소수집단에 대한 증오를 격화시키는 의도치 않은 결과를 낳기도 했다.

“독재자에게 죽음을.” 아랍의 봄은 죽음의 저주를 받는 새로운 대상을 창출했다. 아랍의 봄은 미국이나 이스라엘 등에 향했던 증오가 자유와 민주주의의 요구로 이전되는 양상을 낳았다. 2011년 이후 지속하고 있는 아랍 민중의 저항을 촉발한 분노는 정치계급을 중심으로 한 기득권세력에 대한 증오를 반영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흐름 속에서 여성 등 소수자의 현실에 대한 문제 제기도 본격화했다. 여성을 향한 적대적인 감정 역시 열등하고 불결한 것으로 여기는 것과 함께 두려움, 질투 등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증오라는 표현을 쓰는 것도 무방할 것이다. 다른 민족에 속한 사람을 부족한 존재로 간주하고 차별과 폭력을 가하는 것을 증오라고 표현할 수 있고, 아이들을 학대하고 방치하고 착취하는 것을 증오라고 말할 수 있듯이, 여성의 신체에 제약과 폭력을 가하고 훼손하는 것은 증오의 징표로 간주할 수 있는 것이다.

4. 외세를 암시하는 소수자들

아랍 세계 증오 현상의 특징으로 국제정치의 비중이 크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우리는 종종 아랍인들이 세계를 상대하는 것 같은 인상을 받는다. 소수민족이나 사회적인 의미의 소수자들에 대한 증오 역시 외부 세계, 특히 제국주의적 세력과의 관계가 증오의 한 근거가 됐다. 한국에서 기지촌 여성들에 대한 멸시와 혐오의 주된 배경이 바로 미국에 대한 심리적인 열등감, 피해의식이었던 것을 떠올릴 수 있겠다. 미국과의 관계에서 경험한 열패감과 모멸감이 같은 민족 중 일부에게 희생양처럼 전가됐던 것이다.

여성의 상당수가 할례를 강요받고, 비판적인 목소리를 냈다는 이유로 처녀성 검사를 받고, 남편의 폭력이 ‘선의에 의한 것’이라면 처벌받지 않고, 여행을 가기 위해 남편의 허락을 받아야 하고, 남성 후견인의 허락 없이는 결혼이나 이혼을 할 수 없는 사회에서 페미니즘은 더 이상 다른 대의에 희생될 수 없다. 그런데 난점이 존재한다. 아랍 세계에서 여성의 입장을 대변하는 활동을 서구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식민지 시대부터 페미니즘은 ‘트로이의 목마’로 묘사되는 등 제국주의의 도구로 인식된 경향이 있었다. 식민지 페미니즘(colonial feminism)이라는 용어가 이러한 딜레마를 함축하고 있다. 성소수자 문제도 이들을 옹호하는 것이 강대국의 제국주의적 기획의 일환으로 비판받을 수 있다는 어려움이 있다. 성소수자 논의가 최근 활성화된 것에 미국과 유럽의 영향이 크다는 점이 대중적인 반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유사한 시각에서 조셉 마사드는 중동에 레즈비언과 게이 정체성이 도입되는 것을 또 다른 오리엔탈리즘과 신식민주의의 사례로 평가하고 ‘게이 인터내셔널’이라고 비판한 바 있다.(2)

제국주의 세력이나 국제사회가 아랍의 여성을 개입의 수단으로 활용해온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억압받는 여성, 그 배경에 있는 이슬람, 아랍 또는 무슬림 여성에게 자유를 찾아준다는 숭고한 사명 의식. 어딘가 닮은 구석이 있다. 억압받는 아랍인 또는 무슬림, 그 배경에 존재하는 권위적인 아랍 또는 이슬람 문화, 그리고 이 억압받는 이들에게 자유, 인권, 민주주의라는 서구의 선물을 제공한다는 자랑스러운 명분. 그 배경도 유사하다. 민주주의를 명분으로 한 이권 쟁탈전은 여성의 자유를 표방한 이데올로기 전쟁과 쌍을 이루는 것이다. 이러한 근거를 활용하면서 외세에 대한 반감이 여성에 대한 증오로 이어지는 것이다. 민족주의나 반제국주의가 증오의 알리바이로 작용하는 것이다.

아랍인들이 지닌 세계 인식의 특징 중 하나는 자본주의보다 서구를 강조하는 것이다. 아랍 또는 중동 지역에서 근대화는 가장 가까운 타자인 서구와 닮아가는 것이었고 그것에 종속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서구는 문명만이 아니라 광범위한 ‘식민’을 의미했다. 그리고 증오는 가까운 타자로 향했다. 물론, 이 증오는 애증 관계의 한 면이었다. 서구는 형제이자 선망의 대상이었다. 이제 더 가까운 타자로 향해지는 증오가 자기 자신을 향한 파괴로 이어진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자신과 이웃을 파괴하고 세계를 파괴하게 할 정도의 오래된, 그리고 깊은 분노와 절망을 낳는 보이지 않는 적을 드러내야 한다.


(1) Ben Burgis, “No, Left-Wing Opponents of War Aren’t Isolationists”, Jacobim 2022.4.14.
(2) 엄한진, 2020, <예외주의에 갇힌 중동의 소수자 담론>, 《Homo Migrans》 Vol.23(Nov. 2020): 92-93쪽.
태그

평등

로그인하시면 태그를 입력하실 수 있습니다.
엄한진(한림대 사회학과)의 다른 기사
관련기사
  • 관련기사가 없습니다.
많이본기사

의견 쓰기

덧글 목록
  • 문경락

    증오는 같은 아랍인을 향하기도 한다. 예멘을 초토화하는 아랍 연합군의 적대감은 유럽이나 미국에 대한 것보다 약하지 않다. 이제는 형제애와 상반되는 감정을 보여주는 사례를 찾는 것이 어렵지 않다. 다른 한편으로는 내부의 소수자에 대한 증오가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게 됐다. 콥트교, 시아파와 같은 종교적 소수집단이나 쿠르드인, 투르크멘인, 아르메니아인, 아시리아인 등이 공격의 대상이 됐다. 역설적으로 시민의 연대를 동력으로 한 아랍의 봄이 이들 소수집단에 대한 증오를 격화시키는 의도치 않은 결과를 낳기도 했다.

  • 이동건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