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함께 만들고 지킨 파주공장”

[연정의 바보같은사랑](139) 영풍의 네 차례 해고에 맞서 20년 투쟁하는 시그네틱스 노동자들 이야기③

노사합의 이행하라는 게 경영상 문제?

2000년 시그네틱스를 인수한 영풍그룹은 파주 본사 공장 이전에 관한 기존 노사합의를 무시했다. 시그네틱스를 인수한 영풍이 가장 먼저 한 일은 공장 이전 시 위로금을 받고 퇴사할 이주불가자를 모집한 것이었다. 그 결과 190명의 노동자가 회사를 떠난다. 그즈음 영풍은 안산 원시동에 공장을 만들기 시작했고, 2001년 2월 염창동 노동자들을 파주공장이 아닌 안산공장으로 배치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한다. (박일환, 『빼앗긴 노동, 빼앗길 수 없는 희망: 시그네틱스 노동자 18년 투쟁의 기록』, 우리학교, 2019.) 영풍그룹은 산업은행에서 대출받은 수백 억 원의 공장신설 자금 중 100억 원을 들여 2001년 3월 안산공장을 지었다. 파주공장에서는 고부가가치 제품을 생산하고, 안산공장에서는 부가가치가 낮은 제품을 생산했다.

“제가 위원장 되고 교섭다운 교섭을 제대로 해 본 게 몇 번 안 돼요. 상황이 본격화 되면서 회사는 아예 교섭 자체를 회피했어요. 공장이전을 할 때 6개월 전에 노동조합에 통보하고 대책을 먼저 합의해야 한다는 단체협약 위반과 이주불가자 모집하는 것을 중단하라는 요구를 했지만, 회사는 멈추지 않았어요. 사업장 근거지가 옮겨지게 되면 제일 먼저 고용불안 문제가 생기는 거잖아요. 백 번 양보해서 안산공장 가동을 하려면 앞으로의 회사 운영 계획을 제시하라고 했는데, 회사는 그것도 못 내놨어요. 우린 전 집행부에서 노사 합의한 내용을 근거로 얘기를 한 건데, 회사는 의식적으로 경영상 문제라면서 노동조합이 뭔데 관여하느냐는 태도로 일관했죠.” (정혜경, 2001년 당시 노동조합 위원장, 4차 해고자)


  6월 16일 시그네틱스 4차해고 규탄 해고자 복직을 위한 투쟁선포 기자회견 [출처: 전국실업유니온]

노동조합은 공장이전에 관한 특별단체교섭을 요구하였으나 회사는 거부했고, 공장이전 시 6개월 전 노동조합에 통보하고 합의한다는 단체협약을 이행하지 않았다. 시그네틱스 노동자들은 투자 계획이 없고 낡은 장비로 채워진 안산 공장으로 가는 것을 거부하게 된다. 이것이 노동조합과 정규직을 없애기 위한 영풍그룹의 시나리오라는 것을 알아챘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은 파주공장 출근을 요구하며 노조 위원장 삭발로 투쟁을 결의하고, 사측의 장비 반출을 막기 위해 공장 안 텐트농성에 들어간다. 당시 상급단체였던 한국노총의 소극적인 태도에 절망하고(박일환, 위의 책), 민주노총으로 상급단체 변경도 하게 된다. 2001년 7월 23일 회사는 일방적으로 염창동 노동자들에게 안산공장 인사발령을 낸다. 노동조합은 이를 거부하며 전면 파업에 들어가 용역과 구사대에 맞서 공장사수 투쟁을 전개했고, 회사는 파업에 참가한 노동자 130여 명을 해고했다. 이것이 시그네틱스 노동자들이 영풍그룹에게 당한 첫 번째 해고다.

고맙다고 아이스크림 돌렸던 회사가...

“저는 시그네틱스를 사랑했어요. 회사의 오랜 역사, 노동조합의 역사를 사랑했어요. 동료들과 좋은 분위기에서 정년까지 함께 일하는 걸 꿈꿨어요. 다 그런 마음으로 회사를 살리고 우리가 계속 다니기 위해서 상여금 반납하고 임금동결도 감수했어요. 이 시기만 잘 견디면 파주 새 공장으로 출근할 수 있을 거다. 워크아웃 졸업했을 때, 회사에서 고맙다고 아이스크림도 돌렸어요. 회사가 우리 노력을 알아주는구나. 우린 영원히 같이 갈 거다. 참 뿌듯하고 저 자신이 자랑스럽고 그랬어요. 근데 갑자기 영풍이 와서 투자계획도 없는 안산 공장을 만들어서 거기로 가라고 해요. 회사가 우리를 이용해 먹었다는 생각에 배신감이 들었어요. 우리 시그네틱스 노동자들이 그렇게 노력을 안했으면 회사가 그렇게 빨리 워크아웃 졸업하지도 못했을 거고 경영정상화도 안 됐을 거고 투자도 못 받았을 거 아니에요. 파주 공장도 우리가 함께 만들고 지킨 게 맞잖아요. 최소한 배은망덕은 하지 말아야 하지 않냐.” (남옥연)


  2014년 4월 시그네틱스 파주 공장 앞에서 집회 중에 율동을 하고 있는 시그네틱스 여성노동자들 [출처: 금속노조 시그네틱스분회]

남옥연 씨는 노동자들의 희생에 대한 보상을 요구한 것도 아니고 그저 파주공장 출근 약속만 지키라고 했던 것이었다며 파주공장으로 가기 위해 투쟁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영풍의 인수 소식을 듣고 영풍이 무노조경영과 석포제련소 환경파괴 기업인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노동자들의 뒤통수를 칠 줄은 몰랐다. 파주공장 준공식을 할 때, 회사는 전 직원에게 ‘축 파주공장 준공’이 적혀있는 수건을 돌렸다. 옥연 씨는 그 수건을 아직도 갖고 있다.

염창동 공장을 매각한 영풍은 노동자들의 예상대로 파주공장 생산라인을 비정규직 노동자 천 명으로 채웠다. 처음에는 시그네틱스 지분 99.7%를 소유한 자회사 STI 소속으로 고용하다가 2004년 불법파견 문제가 제기되자 공정별로 소사장제를 도입해 30~60명의 인원이 소속된 2차 하청업체 10여 개를 만들어 운영하고 있다. 2002년에는 파주공장에서 생산량을 올리기 위해 안전설비가 되어있는 기계를 뜯어고쳐 현장 실습을 나온 19세 고등학생의 손목이 프레스에 눌려 절단당하는 산재 사고가 발생하는 일도 있었다.

하루라도 더 싸워보자

7월 14일 저녁 7시, 시그네틱스 해고노동자들이 광화문 주변으로 흩어진다. 가능하면 사람이 많이 다니는 곳에 자리를 잡고 피켓을 펼친다. 오래 하다 보니 각자의 고정 위치가 있다. ‘내가 세운 파주 공장에서 일하고 싶다 가자 파주로!’ ‘20년간 4번째 해고한 영풍회장 즉각 구속하라!’ 최근에 새로 만든 형광색 조끼 덕분에 이들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광화문 네거리 신호등 옆에서 1차 해고자 임은옥 씨가 피켓을 들고 있다.

임은옥 씨는 덥고 몸이 힘들어서 나올까 말까 고민했다고 한다. 수도권 인근 전철역에서 한 시간 반 버스를 타고 가야하는 곳에 살다보니 이곳에 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코로나19 확산으로 대중교통 이용하는 게 부담되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도 오는 게 마음이 편하겠더라고. 이럴 때 왠지 더 와줘야 될 거 같은 느낌? 이번에 신랑한테 그랬어요. 우리 이번이 진짜 마지막일지도 몰라. 싸울 수 있는 주체가 많이 줄어들은 상황이고, 이번에 우리가 잘 해서 이기면 영풍도 혹시 마음을 고쳐먹지 않을까 하는 조그만 기대감도 있어요. 우리도 나이를 먹다보니까 이렇게 같이 싸울 수 있는 게 이번이 마지막이지 않을까 하는 위기의식도 있고 절실함도 있고. 그랬더니 신랑이 그래요. ‘당신이 가면 돼? 4차는 몰라도. 솔직히 말해봐. 가능성 없잖아.’ 4차에 비해선 가능성이 없을 수도 있지만, 우리 힘으로 회사랑 싸워서 노동조합 인정받고 복직하는 건 4차나 1차나 똑같은 거지. 더 나이 먹고 기운 없어지기 전에 하루라도 더 싸워보자 그 생각도 있어요.”


은옥 씨는 나중에 복직해서 ‘나 너무 힘들어서 못 다니겠어’ 할 때 스스로 사표를 낼 순 있어도 이렇게 해고된 상태로 투쟁을 그만둘 수는 없다고 했다. 싸우다 정년을 맞는 것과 스스로 포기하고 정년을 맞는 것은 다르다. 은옥 씨는 2001년 시그네틱스에서 해고를 당해 20년 동안 복직투쟁을 해온 이른바 ‘1차 해고자’다. 은옥 씨 등 노동조합 간부와 사측이 말하는 ‘강성 조합원’ 29명은 2007년 대법원에서 부당해고 판결을 받지 못한 이후 복직하지 못하고 있다.

  7월 14일 동화면세점 앞에서 피켓팅을 하고 있는 시그네틱스 1차 해고노동자 임은옥 씨 [출처: 연정]

“이정도 인원이 남아있는 것도 참 대단한 거 같아. 이게 공적인 투쟁이기도 한데, 또 한편으론 사적인 내 인생이나 삶이기도 하잖아. 20년 넘으니까 여기 사람들이 나한테는 친정식구 같아. 멀리 있는 친척이나 형제보다 더 애틋하고 소중해. 여럿이 집회도 할 수 있고 다른 동지들이 연대도 해주고 상급단체 지원도 받을 수 있고. 어떻게 보면 복 받은 처지라고 생각 되서 감사해요. 이제 뼈도 삭고 디스크도 있고 삭신이 쑤시고 아프고 저리고 해서 나도 모르게 사실 몸을 사리게 되기는 해. 근데 뭐 내가 하루만 싸울 것도 아닌데, 안 아프고 쌩쌩하게 싸워야지. 같이 할 수 있을 때 까지 같이 하고 같이 마무리 하고 싶어요. 조합원들에게 해주고 싶은 얘기? 지금 이 자리에 같이 있어줘서 고맙다. 끝까지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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