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쟁은 생존과 실존의 문제

[워커스 서평] 아사히 비정규직지회, <들꽃, 공단에 피다>(한티재, 2017)

1987년에 개봉한 영화 <바그다드 카페>의 배경은 이라크가 아닌 자본주의의 상징 캘리포니아 모하비 사막 지대, 라스베가스 끝단 66번 고속도로 상에 위치한 곳이다. 사막 지대에 자리 잡은 만큼 인적도 드물고, 찾는 사람 또한 많지 않다. 사막은 우리에게 가도 가도 끝없는 막막함과 모랫 바람의 서걱함으로 황량한 절망의 공간으로 인식된다. 그래서 사막 중간의 오아시스는 고달픔을 잠시 잊게 해주고 삶의 절망을 희망으로 전환시켜주는 마술 같은 곳이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화려함 이면에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비롯한 사회적 약자들이 사막에 둘러싸여 좌절과 결핍 그리고 소외의 일상을 지속하고 있다.

“아사히글라스 공장에 첫 출근하던 날, 점심시간에 식당까지 10분을 걸어서 갔다. 식당의 따끈한 밥은 너무 맛있었다. 매일 그렇게 점심식사를 하는 줄 알았다. 10분을 걸어서 가는 게 너무 멀다 싶긴 했다. 그러나 다음날 출근하고부터 공장에서 쫓겨나올 때까지 그 식당은 두 번 다시 갈 일이 없었다.”(42쪽)

현실은 코미디 같은 지옥이다. 예전에 손학규가 ‘저녁이 있는 삶’을 행복의 척도라고 주장했지만, 아사히 노동자들은 ‘점심이 있는 삶’조차 버거웠다. 따라서 이들에게 노동조합과 민주노조운동은 오아시스의 또 다른 이름이다. 그렇다고 노동조합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만능보검은 아니다. 노동조합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노동자들의 권리를 찾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노동조합은 만들 수밖에 없는 필요조건이다.

하지만 노동조합을 만드는 과정은 매우 험난하다. 그것은 우선적으로 노조를 건설할 주체형성이 관건이기 때문이다. 민주노조운동이나 노동조합에 관심 있는 노동자들이 그리 많지는 않다. 현재 한국의 노동조합 조직률이 10% 안팎인 것을 감안하면 현실적 문제는 매우 심각하다. 노조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편견과 선입견으로 가득 차 있다. 반공주의로 일치단결한 보수수구세력이 해방 이후 지난 60여 년을 지배해왔으니 오죽하랴. 노조가 건설되면 사측의 노조파괴공작이나 정리해고는 기본 초식이다. 회유나 협박 등도 익숙한 방식이다. 영화 <카트>처럼 노조위원장의 성질을 돋구어 사고를 치게 만들어서 노조를 약화-와해시키기도 한다.

노동조합은 사회 변화의 주체

그러니 비정규직이 노동조합을 만드는 것조차 힘겹고 만든 후에도 제대로 할 수 있는지 회의감이 드는 것은 당연하다. 금속노조 아사히 비정규직지회가 2015년 5월 29일 구미공단에 처음으로 비정규직 노동조합을 만들었지만, 138명으로 시작한 조합원이 지금은 22명만 남았다. 그들 자신들조차도 “원청에도 없는 노동조합을 하청 비정규직이 만들 수 있을까?”(10쪽)하고 주저했지만, 노조 설립에 대해 “설렘과 희망”(91쪽)을 느낀 조합원도 있었기에 가능했다.

하지만 불과 2년 밖에 안 된 신생노조라 어디에도 명함을 내밀기 힘들었다. 5-6년은 기본이고 10년은 돼야 장기투쟁사업장이라고 헛기침이라도 낼 수 있다. 그럼에도 이들 22명의 노동자들이 투쟁의 과정과 소회를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냈다는 것은 2년이라는 시간이 결코 짧지 않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2016년 4월 21일 구미시청 앞 농성장에서 행정대집행이 있던 날 “동지들은 다섯 시간이나 비를 맞으며 버티고 있고, 내리는 비 때문에 보이지도 않는 차창 밖을 지켜보며 타는 속을 달래야 했”(94쪽)다. 이들에게 보이지 않는 것은 희망찬 미래의 전망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노동조합을 어떻게 유지하느냐가 중요하다. 조합원들의 의식부터 투쟁 방식 등이 실로 다양해서 의욕을 갖고 조직적-체계적으로 투쟁하려고 준비하다 보면 동지는 간데없고 깃발만 나부끼기 십상이다. 깃발만 나부끼는 것도 다행이다.

자본은 노동자들보다 두세 수 앞을 내다본다. 그리고 전광석화처럼 재빠르게 움직인다. 그래서 늘 약자인 조합원들이 중간에 포기하는 숫자가 늘어날 수밖에 없다. 자본을 비롯한 지배세력에 ‘인간적인 것’을 기대하는 것은 연목구어에 불과하다.

신자유주의가 전면화되고 경쟁이 격화되면서 자본의 회전율이 빨라졌고 그만큼 노동강도도 세졌다. 한국의 지배세력은 인지거리가 자기 주변까지만 닿기 때문에 인지거리 바깥쪽은 신경 쓰지 않는다. 이들의 인식은 대부분 ‘이익’에 맞춰져 있기 때문에, 자신의 이익에 반하는 건 모두 반대한다. 노동자들의 인권, 복지 향상이 자신의 이익에 반하는 결과를 가져온다고 인식하는 것이다.

그러니 이들에게 노동자들은 상품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특히 비정규직에 대해선 유통기한이 다 되면 갖다 버리는 소비품으로 인식한다. “자본이 만들어 놓은 자동화와 단순노동으로 짜여진 틀에서 자신의 재능이 무엇인지 모른 채 소모되다 삶의 시간들을 다 소비”(131쪽)하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이 노동자들을 소외시키는 주된 원인이다. 영화 <화차>의 주인공 선영이가 다른 사람의 이름, 나이, 가족 등 인생을 훔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소외 때문이었다. 선영이가 소외될 때 주변에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비정규 노동자들의 소외가 그런 것이다. 그래서 관심과 연대가 소중하다.

연대는 투쟁의 원동력이고 승리의 관건이다. 그것은 투쟁과정에서 절실함을 더욱 느끼게 한다. 연대는 “투쟁하면서 노동문제뿐 아니라 사회문제에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데, 여러 단체들에 전화를 하면서 처음 들어본 이름도 많았고 이 단체들이 무슨 일을 하는 곳인지 궁금해지”(123쪽)면서 시작된다. 연대는 지금의 헬조선에서 우리 모두의 생존을 위한 필요-충분조건이 됐다. 지금은 각자도생-각개약진을 할 때가 아니다. 이는 곧 실존의 문제이기도 하다.

이렇게 노동조합은 주체, 의지, 전략, 연대 등 어느 하나 중요치 않은 것이 없다. 노동조합은 사막을 가로 질러 그 너머의 신세계를 만나게 해주는 오아시스와 같은 공간이자 변화의 주체다. 노동조합을 만들었더니 “노예처럼 일하던 공간이 ‘현장’으로 바뀌었다. 우리는 공장에서 처음으로 해방감을 느꼈다”(11쪽)는 발언이 적확하다.

“노동이 존중받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싸우고 싶다”(39쪽)는 어느 조합원의 말처럼 ‘투쟁하지 않으면 권리를 찾기 어렵다’는 보편타당한 진리를 다시 한번 생각한다.[워커스 3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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