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일기장을 들춰 본다

차별에 저항한 영상활동가 다큐인 박종필 감독을 추모하며(2)

2016년 1월 1일 ‘금연, 금주, 운동. 거의 매일 밤마다 술과 안주를 먹었다. 아주 가끔 밤에 운동을 했다. 진도 촬영 끝나고 서울 도착, 저녁 11시 허하다. 라면밖에 없다.’

그의 모든 삶이 이 한 문장 속에 들어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매달 첫날에는 금연을 시도했다. 수시로 금주를 선언하며 아침이면 지각을 할지라도 요가를 했다. 요가 후에는 볼일을 마치고 말끔하게 샤워를 했고 작업실로 출근했다. 아직도 그가 철문을 열며 작업실로 들어올 것 같다. 막걸리 한 잔이 생각나는 밤이면 산에 다녀오겠노라 했다. 그러면 술 생각이 덜 난다고 했다. 맨 정신에 잠을 잘 이룰 수 없었던 것이다. 여름에도 발이 시리고 가끔씩 엄지발가락에 감각이 없다고 했다. 뒷산에 다녀와서는 청하를 한 병 샀다. 그가 자신의 인생에서 했던 얼마 되지 않는 타협 중 하나다. ‘너도 혼자 먹을 때는 청하를 마셔봐. 다른 술보다는 깔끔해…’ 쉬는 날이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일과 일상의 경계가 없었다. 주말에도 작업실에 와서 쉬었다. 박종필은 다큐인이고 다큐인은 박종필이라는 말을 가끔씩 했다. 그러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을…. 집에 혼자 있는 것은 왠지 외롭다고 했다. 정확하게 그는 외롭다는 표현을 쓰지 않았다. 그냥 그의 표정에서 읽었다.

[출처: 박종필 감독 추모페이지]

‘다녀올게, 다큐인 잘 지키고…’

416연대미디어위원회에서 활동하고부터는 얼굴에 미소를 띠는 날이 많았다. ‘미디어로 활동하겠다는 욕구가 다시 살아나는 것 같다’고 했다. 그래서 그가 목포신항으로 내려가겠다고 했을 때는 말릴 수 없었다. 그가 다른 활동을 전면 중단하고 세월호 선체기록단으로 간다는 것은 다큐인으로서는 치명적이었다. 재정과 활동 그리고 그의 부재 중 일어날 일들을 계산하며 몇 차례 재고해 보길 이야기했지만 해맑은 그의 표정을 이길 수 없었다. 현장에서 연락이 왔을 때 그는 ‘다녀올게, 다큐인 잘 지키고…’라는 간단한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당시에는 아주 많이 서운했다. 밉기도 했다. 한 달 후 휴가를 받아 사무실로 올라온 그의 얼굴은 까맣게 타 있었고 배도 나와 있었다. ‘바닷바람에 살이 많이 타네, 움직이지 않고 하루 종일 촬영하다보니 배도 나왔어.’ 그는 웃으면서 말했다. 한 달이 더 지난 후에야 그게 황달이고 복수였다는 것을 알았다.

함께 병원에 갔다. 간단한 검사라고 생각했는데 의사는 우리를 한참 기다리게 했다. 간호사들이 우리를 쳐다보는 시선이 이상했다. 모든 외래진료가 끝나고 나서야 의사는 진료실로 들어오라고 했다. ‘간암입니다.’ 그의 표정은 담담했다. ‘얼마나…남았습니까?’ ‘말기입니다…큰 병원에 가보세요.’ 진료실을 나와 수납하러 갔다. 병원 복도에서 그가 외쳤다. ‘아! 망했다!’ 놀랐다. 그는 사람들에게 작은 폐를 끼치는 것도 싫어하던 사람이다. 정신을 가다듬은 그가 처음 한 말은 ‘사람들에게 알리면 안 된다…’였다. 그렇게 너무나도 짧은 투병생활이 시작되었다. 투병의 과정은 정말 잘 기억나지 않는다. 말기 암환자는 어디에서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병원과 요양원 너댓 군데를 거쳐 결국 강원도 어드메 있는 죽음을 준비하는 병동으로 들어갔다. 마지막을 병원에서 보내고 싶지 않다는 그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또박또박 쓰던 글자처럼 네모 반듯하던 그

그가 떠났다. 그의 다이어리를 들춰본다. 하나의 세상이 펼쳐진다. 몰랐던 과거를 알게 된다. 단어를 더듬거리며 문장을 이해한다. 다시 문장을 읽고 단어의 뜻을 곱씹어본다. 가슴이 아리다. 내 것이 아닌 누군가의 글을 들춰보는 것은, 그것도 허락받지 않은 채, 아주 오래 된 일이다. 그래서 그의 다이어리를 들춰보는 데는 용기가 필요했고 온갖 윤리적 변명을 스스로에게 대야 했다. 세상에 없는 이에게 허락을 받을 수는 없으니 아마 평생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그래도 보고 싶었다. 그 사람의 무언가라도 더 보고 싶었다. 8년을 넘게 매일처럼, 정말 매일처럼, 우리가 함께 작업하던 공동체는 여름휴가도 없었기 때문에 매일처럼, 명절에도 홈리스행동에서 함께 전을 부쳤기 때문에 매일처럼, 그래서 언젠가는 조금은 지겹다고 생각했던 그의 언저리라도 더듬고 싶었다.

두꺼운 인조가죽으로 만들어진 주황색 표지를 재낀다. 자음과 모음의 조합이 네모칸 안에 딱 맞게 떨어지도록 반듯하게 글자를 쓰는 것이 그의 필체다. 이렇게 글을 쓰려면 속도가 느려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렇게 글자를 썼다. 6mm테이프에 녹화를 하던 시절 이름표에 한 자 한 자 정성스레 테이프 제목을 쓰던 그의 마디 굵은 손이 생각난다. 참 좋은 습관이라고 생각했고 배웠다. 내가 다큐인에 들어와 배운 첫 번째 습관이다. 그의 필체를 복사하듯이 베껴 내가 기록한 테이프에 이름표를 붙여 넣으며 마치 스스로가 오랜 경륜의 다큐멘터리 작가가 되었다는 착각을 했다. 그렇게 또박또박 글자를 쓰면 왠지 든든하고 기분이 좋았다. 생각해보면 그는 밥도 그렇게 먹었다. 아주 느리게 꼭꼭 씹어서 흘리지 않고, 남기지 않고 네모칸에 글을 써내려가듯이 먹었다. 영상도 그렇게 만들었다. 모니터에 나오는 장애인들과 노숙인과 세월호 유가족의 한마디 한마디를 꼭꼭 씹어서 체하지 않게, 손이 더딘 장인이 커다란 그릇을 만들듯이. 그렇게 네모 반듯하던 그가 이제는 세상에 없다. 자연스럽게 내 삶에도 이제는 네모가 없다.

[출처: 다큐인]

[출처: 다큐인]

그는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 곧게 살아가려고 노력한 사람이었다.

다이어리에 담긴 내용들은 대부분 일정이다. 정말 바쁘게 살아왔구나 하고 생각한다. 조금만 그 짐을 나누어 지지…옆에 있으면서도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내가 함께 할 수 없는 시간과 공간을 그는 뚜벅뚜벅 걸어 나갔다. 다시 한 번 미안함과 후회가 일렁인다. 너무 늦었다. 일정을 훑어보다 4월 15일 밀생이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온다. 눈물이 왈칵 쏟아진다. 내 생일이다. 내 별칭은 밀가루. 홈리스야학에서 미디어교육을 하던 시절에 지어 지금까지 쓴다. 그를 처음 만난 것도 홈리스야학이다. 그는 미디어교실의 주교사였고 나는 보조교사였다. 교육은 평이했고 수업은 그저 그렇게 흘러갔다. 나중에 교육을 직접 해보고서야 그게 엄청난 것이란걸 알았다. 미디어교육이 끝나는 시기는 내가 졸업하던 시기와 맞물렸다. 무얼 해야할 지 몰랐다. 막연하게 홈리스운동에 함께 하고 싶었고 영상을 편집하는 일에 흥미를 느끼던 때였다. 그는 그거면 됐다고 다큐인에 들어오라고 했다. 좋은 사람과 일하게 되었다는 생각에 설레였다.

예상은 빚나갔다. 그는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 곧게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사람이었다. 쉬운 사람이 아니었다. 아주 사소한 것들부터 갈등이 생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18살이 어린 내게 별칭을 쓰고 존댓말을 하고 매사에 진지한 태도로 소통하려고 노력했다. 무엇보다 정직했다. 단 한차례의 작은 거짓말도 하지 않았다. 그 연령대의 남성에게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모습이 그에게는 없었다. 그는 언젠가 꼰대가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했다. 다큐인 안에서 그는 천상 살림꾼이었다. 나는 다큐인에 들어온 이후로 그에게 밥을 짓고 요리하는 법을 배웠다. 망치질하는 방법과 벽에 드릴로 구멍을 뚫는 법을 배웠다. 화장실 청소를 깨끗이 하는 방법을 배우고 쓰레기를 종류별로 분리수거하는 법을 배우고 커피를 드립하는 방법을 배웠다. 그리고 카메라를 허락해 준 사람들에 대한 예의를 배웠다. 그는 단 한 차례도 ‘이걸 잘 하려면 이렇게 해야 해’라고 이야기 하지 않았다. 그냥 내가 보는 앞에서 당신이 손수 그 일을 했다.

언젠가 작업실에 그와 나, 둘이 남고부터는 월세를 절반씩 냈다. 활동비를 지급할 생각은 할 수 없는 재정구조였고 작업과 아르바이트를 병행해도 한 달에 30만원을 손에 쥐기 어려웠다. 매 달 월세를 낼 때가 오면 다큐인을 그만두겠다는 소리가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일 년만 참아보자는 생각을 반복하며 3년을 보냈다. 어느 날 작업을 제대로 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그가 말했다. 그냥 그런가보다 했다. 다음날 통장에 돈이 들어와 있었다. 오백만원이었다. 내 책상에는 컴퓨터가 올라와 있었다. 그가 사용하던 컴퓨터가. 함께 카메라를 구입했다. 작업이 흘러가야 할 방향에 대해서 매일처럼 이야기를 나눴다.

‘계속해서 세상에 이야기해야 한다’

그렇게 쪽방 사람들을 기록한 <사람이 산다>라는 영화가 시작되었다. 이 영화가 야마가타 국제다큐멘터리에 경쟁으로 진출한다는 소식을 들은 건 그가 암투병을 할 때였다. 옆으로 돌아눕는 것조차 힘들어하던 몸으로 그는 팔을 들어 올려 내 어깨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내 눈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가만히 끄덕였다. 홈리스작업으로 첫 영화를 만들었던 그는 작업 중 죽어갔던 당사자들을 생각하며 부채감을 떨치지 못했다. 그는 나에게 ‘홈리스에 대한 작업을 하는 것은 중요하다’고, ‘계속해서 세상에 이야기해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그 즈음부터 그는 말을 하는 것조차 힘들어했다. 하지만 원래 말이 없는 사람이었으니 그것이 이상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통증이 시작되고 그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3일 동안 수면제와 진통제로 연명했다. 그리고 평안히 눈을 감았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 돌아온 작업실은 참으로 생경했다. 크다고 생각했는데 들어서니 아주 작은 작업실이었다. 그의 빈 책상에 앉아본다. 8년 전 다큐인활동가들은 작업실 바닥을 붙이고 벽을 칠하고 책상을 들이고 파티션을 만들고 없던 창문을 내고 벽을 파서 수도를 끌어오고 개수대를 만들었다. 촬영장비들과 편집장비들을 하나씩 마련해나갔다. 8년이라는 시간동안 그와 함께 만들어간 공간이었다. 이 생경해져버린 공간에서 그의 냄새는 얼마나 남아있을까?

다이어리를 닫는다. 동지를 떠나보낸 건 나 뿐 아니라는 위로 아닌 위로를 스스로에게 해본다. 검질기게 밀려오는 지난날들을 꾸역대며 삼킨다. 큰 나무 같았던 그가 부재하는 다큐인을 생각하면서 오래 전 이곳에서 도망치고 싶어 했던 기억을 떠올린다. 다큐인이 민중들의 눈과 입이 되고, 미디어활동가들을 재생산하는 공간이 되도록 하자던 그의 말들도 떠올려본다. 나도 다시 일기를 써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보고 싶다. 그가. 아주 많이 보고 싶다.

[출처: 다큐인]

[출처: 다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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