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3차 희망버스, 폭력과 맞짱 뜨다

[파견미술-현장미술] 부산으로 떠나는 희망의 여정(5)


2011년 6월 11일 1차 희망버스는 2차, 3차, 4차, 5차 그리고 2011년 11월 10일 크레인에 오른 지 309일 만에 김진숙이 지상으로 내려오기까지 희망버스는 포기하지 않고 달렸다. 희망버스는 개인이 차표를 구입해야 하고, 씻는 것은커녕 잠도 길거리 한뎃잠을 자야 했다. 그것에 대해 누구도 불만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모두 스스로 선택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1차 희망버스 이후 시간은 급하게 돌아갔다. 경찰의 폭력적인 진압에 대한 기자회견과 사회원로의 시국선언 그리고 2차 희망버스를 준비했다. 시민에게 호소하기 위한 한진중공업 노동자의 상경투쟁문화제 <한진, 85호 크레인의 눈물>이 보신각에서 진행되었고, 1차 희망버스에 탑승했던 작가들은 급하게 <깔깔깔 희망의 버스> 책을 출간하기도 했다. 7월 9일로 예정된 2차 희망버스는 1차보다 많은 사람이 문의하고 탑승권을 구매했다. 즐거운 소식이지만 준비하는 사람들은 더 많은 것을 고민해야했다. 버스를 알아봐야 하고, 먹거리도 준비해야 하고, 참가자의 다양한 요구를 고려해야 했다.

희망버스를 함께 제안했던 쌍용자동차 노조 조합원들은 자신들의 투쟁과 한진중공업을 연결할 수 있는 투쟁으로 ‘걷기’를 선택했다. 쌍용자동차 공장이 있는 평택에서 한진중공업 공장이 있는 부산영도까지 걸어서 가는 것이다. <소금꽃 찾아 천리길>, 걷는 발걸음마다 우리의 투쟁을 알리고자 함이었다. 9일간의 긴 여정을 준비한 쌍용자동차노조는 발가락이 부르트고 얼굴이 시커멓게 타버린 모습이지만 환한 미소를 보이며 부산역 광장에 나타났다. 전국 각지에서 출발한 희망버스 탑승객의 집결지는 부산역. 부산역 광장은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으로 가득했다. 눈물이 왈칵 쏟아지는 순간이었다.

<소금꽃 천리길>에는 하루 참가자들이 끊이지 않았다. 파견미술팀 이윤엽과 신유아도 하루일정에 참가하기 위해 결합했다. 하루 40km를 걷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결국, 중간에 포기한 우리는 두어 시간 가량 걸어올 수 있는 앞쪽에 차를 대고 쌍용자동차노조원이 행진차량으로 사용하는 봉고차에 조형물과 현수막을 만들어 설치하는 일을 했다.






부산역 광장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광장 무대에서 신나는 밴드의 노래가 힘겨움을 덜어주었고 준비팀은 영도까지 가기 위한 행진을 준비했다. 피켓과 현수막과 걸개그림을 펼치고 행진을 하는 사람들은 김진숙의 크레인을 다시 본다는 생각으로 힘들거나 지쳐 하지도 않았다. 영도다리를 건너 봉래삼거리에 도착한 우리는 말문이 턱 막혔다. 코앞에 크레인이 보이는데 바로 그 앞에 경찰들이 차벽으로 도로를 완전히 막아버렸기 때문이다. 밤새 최루액에 눈을 비벼대며 차벽을 넘어서기 위해 몸부림쳤다. 그러던 중 마이크를 잡았던 사람은 붙잡혀갔고, 차벽 여기저기에서 악쓰며 싸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빗물에 씻겨나간 최루액 가루가 바닥에 노랗게 깔려있었다. 우리는 놀았다. 그 와중에 우리는 신나게 놀았다. 악쓰며 놀았다. 새벽이 다가오자 커피를 끓여주는 사람들, 주먹밥을 준비하는 사람들. 발언을 하고 공연을 하며 모두 길바닥에 앉아 긴 시간을 즐기며 보냈다. 아침이 되자 언제 비가 내렸냐는 듯 햇살은 뜨거워졌고 사람들은 뜨거운 태양에도 거리를 떠나지 않았다. 멀리서 김진숙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땅에 더 이상 정의가 없을 줄 알았습니다. 이 땅에 진실을 들어 줄 귀가 없을 줄 알았습니다. 이 땅에 더 이상 연대가 없을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먼 길 달려와 비와 최루액과 물대포를 맞아준 여러분이 있었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3차 희망버스가 다시 간다. 7월 30일. 탑승객은 더 늘어났고 준비할 것은 더 많아졌다. 한진중공업 본사는 서울에 있다. 서울에서도 압박이 필요했다. 한진중공업 서울본사에 본때를 보여주자는 의미로 24시간 릴레이 1인 시위를 준비했다. <주경야독> 그리고 몇 차례 규탄기자회견과 희망버스에 함께 오르자는 제안 기자회견을 했다. 서울에서, 대전에서, 군산에서, 제주에서 많은 사람이 부산으로 가기 위해 휴가를 내고 있었다. 부산으로 가는 3차 희망버스의 컨셉이 <희망을 만드는 휴가, 우리가 소금꽃이다>. 한진중공업 노동자도 가만히 앉아서 사람이 와주기만을 바라고 있을 수는 없었다. 희망 자전거를 타기로 결심했다. 대한문에서 부산까지 그들은 달리고 달렸다. 한여름 폭염과 폭우와 그리고 자신과 싸우며 달렸다.

부산에 도착한 사람들은 2차 때와 같이 부산역에서 시민과 함께하는 문화제를 하고 도로로 나와 행진을 준비했다. 영도다리를 건너자 다시 봉래삼거리. 역시나 차벽에 막혀있었다. 하지만 똑같이 당하고 있을 우리가 아니었다. 영도는 산동네다. 골목골목 산으로 오르다 보면 반대편 도로에 닿을 수 있었고 우린 85호 크레인이 보이는 수변공원을 도착지로 정하고 삼삼오오 산복도로를 오르기 시작했다. 골목마다 경찰이 방패를 들고 막아섰지만, 그들도 모든 골목을 다 막을 수는 없었다. 산복도로를 오르다 보면 멀리 크레인이 보였고 크레인이 보이는 곳이면 어김없이 사람들이 모여 손을 흔들고 있었다.

밤새 산복도로 골목을 누비며 돌고 돌아 수변공원에 모인 시간은 새벽 3시가 넘어서였다. 대여섯 시간을 걷고 또 걷고 경찰과 싸우고 또 싸우면서 모인 사람들. 우린 다시 판을 벌였다. 노래도 하고 춤도 추고 이번에는 사진가들이 준비한 사진관에서 사진도 찍고 밤을 즐겼다. 담장 너머 김진숙이 들리도록 큰소리로 놀았다. 희망버스의 힘은 신나게 즐겁게 노는 것이었다.

밤새 산을 오르락내리락 힘겨웠던 사람들은 수변공원 바닥에 누워 잠을 청했다. 새벽녘 사진 속 모습은 마음이 찡하다. 이것이 진정한 ‘연대’이구나.













덧붙이는 말

이 글은 문화연대가 발행하는 이야기 창고 <문화빵>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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