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들’ 곁에 비정규직이 만들어지는 중입니다

[워커스] 너와 나의 계급의식

비정규직 없는 사업장이 대한민국에서 자취를 감추고 있다. 어딜 가든 비정규직이 있다. 파트타임, 기간제, 무기계약직, 파견, 용역 등 서로 이름은 달라도 정규직이 아닌 것은 똑같다. 내가 일하는 공공운수노조도 현장마다 비정규직 천지다. 이번 ‘공공부문 비정규직 정규직 전환’의 1호 사업장이자 비정규직 비율이 90%에 달하는 인천공항이 대표적이다. 그런데 우리 노조에도 비정규직 천태만상에서 비켜난 특이한 현장이 하나 있다. 바로 어린이집을 중심으로 노사관계가 펼쳐지는 보육 부문이다.

  사진은 기사의 내용과 직접 관계가 없습니다 [출처: 자료사진]

‘아직은’이라고 해야 할지, 어린이집에는 비정규직이 없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구분이 없다고 하는 게 더 정확하겠다. 1997년 이전 웬만한 대한민국 직장이 다 이랬을 것이다.

물론 보육교사들의 처우는 전반적으로 좋지 못하다. 애초 어린이집 운영이라는 게 정부가 통으로 지원하는 보조금 안에서 재주껏 물품도 사고 월급도 주고 수익도 내야 하는 구조다. 가장 재주를 부려야 할 곳은 역시 인건비다. 인건비 절약에 원장들이 한마음 한뜻이니 어린이집마다 노동조건도 비슷하다. 임금이 낮은 것은 기본이요, 유급휴가는 언감생심에 초과노동과 권고사직이 만연하다. 정년은 무용하다. 마흔 줄이면 알아서 퇴사를 고민해야 한다. 일이 쉬운 것도 아니다. 법령과 정부 지침이 정한 ‘교사 대 아동 비율’은 교사 한 명만 비어도 난리통이 되는 수준이며, 서류업무는 상상초월이다. 굳이 비정규직을 만들 필요가 없다.

이러한 보육현장에도 최근 몇 년 새 말 그대로 ‘비정규적인’ 일자리들이 생겨났다. 바로 대체교사와 보조교사다. 생겨난 절차는 여느 비정규직과 비슷하다. 먼저 법 조항 신설이나 대통령령 등으로 제도가 만들어지고, 정부가 인건비를 지원하는 방식으로 채용과 사용을 촉진하는 사업을 벌인다. 보육교사의 휴가 보장이나 업무경감을 위한다는 그럴싸한 명분으로 홍보한다. 그러나 진짜 효과는 이들의 급여통장에 찍힌 숫자들로 나타난다. 정규 담임교사에 비해 기본급은 대폭 줄고, 근무환경개선비(약 20만 원)와 퇴직금은 쏙 빠져있다.

“정부 덕에 일하니 따지지 말라?”

대체교사는 대체인력 지원을 호출한 어린이집에 그날그날 보내지는 파견 교사다. 보육교사의 휴가 보장 대책인 셈이다. 지자체 시행기관이 퇴직금을 우려해 ‘쪼개기 계약’을 하는 게 보통이고, 실제 파견이 이뤄진 날만 일당을 주는 경우도 허다하다. 모든 비정규직이 그렇듯 이들도 여러 불안에 시달린다. 매번 일하는 곳과 업무 지시자(원장)가 바뀌는 고충은 물론이고, 월 15일의 업무량이 확보되지 않은 달엔 근무환경개선비를 못 받는다는 스트레스도 크다.

보조교사는 담임교사의 업무경감 대책으로 정부가 만들어낸 파트타임 교사다. 반일제로 아이들을 돌보는 일만 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서류작업이나 잡무를 시키면 안 된다는 정부 공문이 백날 내려와도 보조교사에게 ‘갑’은 원장이다. 정부 지원금으로 보조교사를 채용한 뒤 담임 반 업무를 통째로 맡겨버리는 원장도 많다. 다 인건비를 아끼기 위한 재주다.

대체교사와 보조교사의 자격 요건이 담임교사와 다른 것도 아니다. 똑같이 보육교사 자격증이 필요하다. 흔히 자격기준 완화가 더 나쁜 고용의 근거로 악용된다는 점에서 어쩐지 의아한 부분이다. 그럼에도 많은 보육교사 자격증 소지자, 심지어 경력자들이 대체교사, 보조교사 자리에 지원을 하고 낮은 처우를 감내하고 있다. 이들 대부분이 한국 노동시장에서 엄청나게 낮은 자격으로 통용되고 또 강요되는 ‘경단녀(경력단절여성)’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이른바 ‘일자리창출사업’의 대상자. 정부 덕에 일할 수 있는 게 어디냐, 그러니 처우는 따지지 말라는 게 요지인 사업이다.

사실 보육교사의 휴가 보장과 업무경감이 목적이라면 정규인력을 충원하면 될 일이다. 창출된 일자리의 처우가 좋은 것도 아니다. 결국 대체교사와 보조교사는 원장에게 가장 좋은 일자리다. 정부가 그걸 모를 리 없다.

그리고 이런 일들이 일어난다. 여전히 업무에 치이는 담임교사들 눈에 ‘우리’와 ‘저들’ 사이의 차이가 들어온다. 자신들을 도와주라며 정부가 월급까지 챙겨 보낸다는 대체교사, 보조교사가 고된 서류업무는 하지도 않고 무소불위 원장과도 오래 볼 사이는 아니라는 느낌말이다. 정규 담임교사보다 더 편할 것이고, 그러니 응당 처우가 달라야 한다는 생각도 자라난다. 조금씩 감지되기 시작한 이 느낌이야말로 비정규직이 탄생하는 생생한 과정이 아닐까. 지금 보육현장에는 비정규직이 만들어지는 중이다.

지난주 열린 한 비정규직 토론회에서 고용노동부의 한 사람이 “너무 많은 이해관계가 걸려 있어 되돌리기 쉽지 않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그 말에 이런 생각이 들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기 전, 흔히들 비정규직이 막 생겨났다고 회고하는 그때로 돌아간다면 우리는 제대로 막아낼 수 있을까? 과연 언제로 돌아가야 건강한 토론과 연대의 싹을 지키고 키워낼 수 있을까? 바로 지금이 훗날 되돌아가고픈 시점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르면 식은땀이 나기도 한다. 20만 보육교사의 틈을 비집고 나와 노조에 가입하고 비정규직 철폐를 외치는 보육교사들을 새삼 경외심으로 바라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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