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6일 일하며 버틴 6년…무기계약 대신 계약해지

지자체에선 더 소용 없는 공공부문 정규직화 가이드라인

천의 절경을 자랑하는 강원도 철원군의 고석정. 김향미(46) 씨는 6년째 이곳으로 출근 중이다. 김 씨는 고속정의 입장권 발권과 고속정 암벽투어를 안내하는 일을 한다. 2년마다 한 번씩 계약을 갱신해 지금껏 다니고 있다. 원서를 접수하고 면접을 보는 일은 지긋지긋했다. 군청은 무기계약직으로 전환을 해준다며 기다리라고 했다. ‘조금만 참아라’ ‘기다리면 (무기계약직으로 전환)해준다’는 말을 믿고 그렇게 6년을 기다렸다. 이렇게 하면 잘린다, 저렇게 하면 잘린다는 입소문도 많았다. 어김없이 다가온 재계약 시즌. 이번엔 분위기가 다르다. 정부에서 공공부문 비정규직 노동자를 정규직으로 전환해주겠다고 한다. 무기계약직 전환 소문이 무성하게 퍼질 때, 재계약을 위한 채용절차가 진행됐다. 언제나처럼 면접을 봤다. 하지만 함께 일하는 세 사람 중 김 씨만 똑 떨어졌다. 상상도 못 했던 일이었다.
왜 김 씨는 예외적 인물이 됐을까?

-꾸준히 재계약을 했는데 이번엔 탈락했다. 본인이 생각하는 이유가 있나?
"갑자기 재계약을 해야 한다고 채용 공고를 내고 채용 절차를 시작했다. 무기계약직으로 전환된다는 소문이 퍼져있었는데 무기계약직으로 나중에 전환이 되더라도 채용에 응시해야 한다고 해서 지원서를 또 넣은 거다. 12월 19일에 면접을 봤다. 그런데 6년 일한 나는 떨어지고, 같은 고석정에서 근무하는 공무원의 자녀가 신규 채용됐다."

-그 사실은 어떻게 알았나?
"안내소에서 함께 커피도 마시고 했던 사이였다. 나중에 그분의 자녀가 채용에 응시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올해 정년퇴직하시는 분이라 관내에 이분을 모르는 공무원이 없다. 공무원들이 쓰는 프로그램엔 누가 면접 심사를 하는지 알 수 있는 것도 있다. 재계약 하는 사람이 우선순위라고 구두로 말해왔기 때문에 이번 채용에서 탈락한 게 너무도 억울하다."


정부의 7.20 가이드라인에 따르면 전환계획 확정 전 계약 기간이 만료되는 기간제 노동자에 대해선 정규직전환 심의위원회에서 해당 직종의 정규직 전환대상 여부 등을 최우선으로 판단해야 한다. 또 일정 기간 계약연장 등을 통해 해당 근로자에게 불이익이 발생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하지만 김 씨의 경우 어떤 조치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김 씨의 업무는 연중 9개월 이상 계속되고, 향후 2년 이상 사업을 지속할 것으로 예상하는 ‘상시 지속 업무’로, 정규직으로 전환돼야 마땅했다.

철원군청 관광과 공무원도 김 씨의 업무가 상시 지속업무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정부의 가이드라인대로라면 상시 지속업무를 수행하면서 꾸준히 일한 기간제 노동자는 무기계약직으로 전환돼야 한다. 하지만 해당 공무원은 이번 신규 채용이 불가피했다고 이야기했다. 그는 “그분 개인적으로 억울한 면이 있지만, 인사부서에서 무기계약 전환에 대한 판단이 먼저 나와야 할 문제”라며 “구제 방법은 뚜렷하게 없지만 다른 곳에서 기간제 채용 공고가 나면 먼저 알려주는 방법 등은 있을 수 있다”고 했다. 김 씨가 주장한 채용 비리에 대해선 “면접 점수에 의해 최종 당락이 결정됐는데 심사는 면접관의 고유 권한이라 우리는 관여할 수 없다”며 절차상 문제는 없다고 했다.

철원군청의 자치행정과 소속 공무원 역시 “내년 초쯤 정규직전환심의 결과가 나올 것”이라며 “계약 해지당하는 분들, 지금 계약되신 분들의 관계에 대해선 내년에 심의 결과가 나와봐야 정리를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밝혔다.

-기간제 근로자로서의 처우는 어땠나?
"재계약을 할 때마다 신입이 되니 전보다 나아질 게 없다. 관광지이기 때문에 휴일, 공휴일엔 더 바쁘다. 화요일이 정규 휴일이고 월요일이나 수요일 하루 더 쉬어야 하지만 관광지가 너무 바쁘니 눈치를 보게 된다. 쭉 6일을 일하는 날이 많다. 부당하다고 느껴도 ‘잘린다’는 소문이 퍼지니까 보장된 휴일에도 쉰다고 말할 수 없었다. 기간제로 일하니까 ‘못해요’ ‘안 해요’ 한 적도 없이 고분고분 일만 했다. 함께 일했던 사람과 트러블 난 적도 없다. 홈페이지에 이용객들이 작성하는 칭찬 코너에도 몇 번을 올라갔다. 열심히 일하다 이런 일을 겪으니까 너무 허무하고 배신감이 든다. 자기들끼리 머리 썼다는 게 화가 난다."

-현재 심경은?
"얼마나 신경을 썼는지 어제는 멀쩡하던 이가 하나 빠졌다. 머리카락도 한 움큼씩 빠진다. 이 일 말곤 할 수 있는 게 없는데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겠다.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노조에 연락했고, 가입까지 했다. 너무 억울해서 이렇게는 떠나지 못할 것 같다."


김 씨는 1월 2일부로 7년 가까이 일했던 일터를 떠나야 한다. 임성혁 민주일반연맹 철원지회장은 “정규직 전환 대상자임에도 이미 해고된 사람도 있고, 올해 말로 계약이 만료되는 사람들이 꽤 된다. 정부가 제시한 최소한의 가이드라인조차 지켜지지 않고 있는 현실”이라고 했다. 임 지회장은 “작은 단위의 지자체일수록 노조의 권한이 너무 약해 단체장의 역할과 의지가 중요하다. 단체장이 노조, 노동자들과 소통을 해야하는데 담당 공무원에게만 일을 맡겨 아쉬움이 크다”고 지적했다. 연말연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설 곳은 더 좁아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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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ㅇㄹ

    열심히 일한 경력직직원을 우대해야 하는데 정말 억울하실것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