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천경찰서, 성고문에서 감빵투쟁까지

[워커스 인권의 장소] 부천지역 노동자들의 투쟁이 만든 해방구

“인터넷에 부천소사경찰서를 치면 연관검색어로 성고문이 떠요. 제가 처음 여기로 발령 나고 가족들이나 친구들이 인터넷에 검색을 해봤나 봐요. 그것 보고 놀랐죠. 저도 별로 기분이 안 좋고.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 일어난 건데 저도 여기 발령 나기 전에는 몰랐어요. 그런 사건이 있었는지.”

부천소사경찰서 여성 경찰에게 성고문사건을 언제 알았냐고 물으니 이리 답한다. 지금은 경찰서가 여러 개 생겨 부천소사경찰서지만 그때는 부천경찰서였다. 30년이 지난 일이니 대부분의 사람은 모를 수도 있겠다 싶었다.

  부천경찰서 취조실이 있던 4층 복도 [출처: 사계]

최근에 피해자이자 여성학자인 권인숙 씨가 ‘법무부 성희롱·성범죄 대책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되면서 잊혔던 사건이 다시 알려졌다. 1986년 6월 경찰에 연행될 당시 권 씨는 스물 두 살의 서울대생으로 부천에 있는 성신 공장에 위장취업한 상태였다. 노조를 만들기 위해 들어갔다가 연행돼 신분이 밝혀졌다. 부천서 형사 문귀동은 그의 공문서변조(주민등록증 위조)에 만족하지 않고 고문을 했다. 문귀동은 옷을 벗기고 수갑을 채운 채 성추행을 하며 고문했다. 인천5.3항쟁(속칭 5.3사태)의 배후를 캐고 수배자를 붙잡으려 한 것이다. 인천5.3항쟁은 86년 당시 급진적인 민주화운동과 분리선을 그으려 했던 야당 신한민주당을 규탄했던 대규모 투쟁이다. 앞서 전두환 정권은 신민당에 화해 제스처를 보내며 개헌 논의를 허용하겠다고 발표했고 신민당은 이에 응답하는 듯 급진적인 학생운동을 비판했다. 그래서 노동자와 학생들을 주축으로 한 민주화운동세력은 5월 3일 신민당의 개헌추진위원회 경기·인천지부 결성대회를 무산시켰다.

문귀동은 가슴을 손으로 서너 차례 툭툭 건드린 것이 전부라고 거짓말을 했다. 그의 파면으로 사건을 마무리하려 했던 검찰은 폭언과 폭행 등의 가혹행위만 인정했다. 오히려 “권인숙이 조사받은 방은 안이 들여다보이는 곳이고 다른 경찰관들이 옆방에서 날씨가 무더워 모두 문을 열어 놓고 왔다 갔다 하는데 성고문이 있었다는 주장은 인정할 수 없다”며 ‘혐의 없음’을 결정했다. 반면 권 씨는 13개월을 감옥에 갇혀 있어야 했다. 검찰은 그것도 모자라는지 “급진좌파 사상에 물들고 성적도 불량하여 가출한 자가 성적 모욕이라는 허위사실을 날조·왜곡하여 자신의 구명과 수사기관의 위신을 실추시키고 정부의 공권력을 무력화시키려는 의도”라고 보도자료를 발표했다. 87년 6월항쟁 이후인 88년 2월에야 법원이 재정신청(검찰이 불기소처분을 내린 사건에 대해 법원에 직접 판단해달라고 신청하는 제도)을 받아들여 문귀동은 기소됐고, 그해 7월에 징역 5년 형을 선고받았다.

밝은 그곳에서

우리는 성고문이 일어난 취조실이 있던 4층으로 올라갔다. 지금은 정보과가 사용하는 사무실이라 안까지는 못 들어갔고 복도에서 취조실을 보았다. 검찰의 말마따나 복도에 햇살이 환하게 들어오는 어둡지 않은 건물이었다. 백주대낮에, 이렇게 환한 곳에서 버젓하게 성고문이 벌어졌다니. 성별화한 국가폭력의 현장이었다. 남성에겐 강한 물리적 폭력으로, 여성에게 성적 수치심을 주는 폭력으로.

우리를 안내한 사람은 민주노총 경기도본부 부천시흥김포지부 권오광 의장이다. 당시 권 의장도 위장취업으로 해고된 후 부천서에 잡혀 조사를 받고 있었다. 그는 권 씨가 일하던 성신 공장 뒤에 있는 동양피스톤이라는 공장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그는 취조실이 당시 서너 개 있었다고 했다. 사무실 하나를 가리키며, “이 방인가. 넓고 붉은 색 방이었어요. 책상 하나가 있고. 난 4월에 잡혔고 권인숙 씨는 6월에 잡혔지. 유치장에 열흘인가 있었어.”

인천5.3항쟁 때 현장조직책으로 인천교도소에 들어간 권 의장은 그곳에서 성고문 소식을 들었다. 그곳에는 5.3항쟁으로 구속된 양심수가 30여 명이 남아있었다.

“당시 여사(여자수용사동)에 권인숙의 학교 1년 선배이자 청계천에서 1년 야학을 했던 이현경이라고 있었어. 그 친구가 운동하다가 권인숙을 만났는데 (얼굴이) 이상해서 너 왜 그러느냐 물었더니 그 사건을 얘기하더래. 이러저러하게 성고문을 당했다고. 그래서 이 사건을 외부로 알려야겠다 싶어서 이리 저리 알아봐서 명동성당을 통해 세상에 알리기로 했지. 당시에는 언론이 차단돼서 보도가 잘 안되니까. 그리고 우리한테 쪽지가 날라 왔어. 이러저러하니 도와달라고. 그때부터 남사(남자수용사동)에서 단식하고 문짝 두드리고, 교도소 역사에서 처음 있는 일이라고 할 정도로 감방투쟁을 잘했어.”

슬기로운 감빵생활, 저항의 장소가 되다

5.3항쟁으로 인천교도소에 수용된 사람은 모두 70명 정도였는데 당시에는 30여 명이 남아있었다. 5.3항쟁으로 잡힌 사람이 워낙 많아 아예 교도소 한 사동에 담을 쳐놓고 가뒀다. 그런데 그게 오히려 집단행동을 가능하게 한 것이다. 매일 30여 명이 밖의 소식을 듣고 회의를 했다. 그는 감옥에 들어가기 전 감옥투쟁에 대한 문건을 읽고 가서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문건에는 ‘감옥은 적과 싸우는 최일선이므로 편안하게 책보고 쉬어서는 안 된다’고 쓰여 있었다.

“처음에 우리 전술은 면회 나가면 들어오지 않기였어. 면회를 가면 교도관 둘이 따라붙는데 돌아올 때 방으로 돌아오면 안돼요. 양심수 다섯 명이 여기저기 도망 다니는 거지. 그러면 모든 교도관이 다 뛰어다니는 거예요. 두 번째 전술은 병사(病舍)를 점거하는 거. 여러 명이 아프다고 병동에 가서 문 잠그고 누워서 점거농성을 하는 거야. 그 다음에 주로 썼던 전술이 밤에 나무문짝을 발로 차기. 밤 12시부터 새벽 4시까지 문을 두드렸지. 굉장히 시끄러워서 이웃주민까지 못 잘 정도야. 2층에는 소년수가 있었는데 그 애들을 이용해서 교도관들이 협박을 했어요. 밤에 애들이 잠을 못 잔다고, 그만하라고. 그리고 면회를 안 시키는 거야. 면회 나가면 뛰어 돌아다니니까. 밖에선 면회가 안 되니까 안에서 무슨 일이 터졌나보다 한 거지. (교도소) 밖에서 가족들이 농성하고 명동성당에서 (성고문사건이) 터지면서 사건화가 크게 됐지.”

부천성고문사건은 당시 노동운동단체, 여성단체들의 투쟁뿐 아니라 감옥 안에서도 이를 알리기 위해 싸웠기에 여론화가 가능했다. 교도소가 언제까지나 ‘적들’의 장소만은 아니었다. 그 속성을 바꾼 것은 저항이다. 살아있는 사람들의 살아있는 투쟁.

욕먹던 일상에서 벗어난 해방구

87년 6월 항쟁이후 노동자 투쟁과 노조결성의 흐름은 부천에서도 비슷했다. 87년 7월 우성밀러의 투쟁을 시작으로 8월 중순 원방, 동양에레베이터, 삼령정밀, 대흥기계 등 65여 개의 신규노조가 결성되고 경원세기가 민주화됐다. 권 의장은 무엇보다 1989년 4.15총파업은 역사적인 투쟁이었다며 자랑스러워했다. “구로동맹파업이 5개 사업장으로 시작한 최초의 동맹파업이라면, 89년 부천4.15투쟁은 지역총파업으로는 가장 큰 규모의 투쟁이에요. 45개 사업장 4000명의 조합원이 참여했으니까. 한국노총 사업장도 같이 한 파업투쟁이었지.” 4월 9일 임금인상공동투쟁본부장인 한국신광전자 한경석 위원장과 상황실장이 구속되자 지역총파업을 앞당겨 가두투쟁을 벌였다. 이후에 대흥로크, 우일, 영풍금속 등에 공권력 투입을 막고 신규노조를 만들어 임금인상도 이뤄냈다. 그 힘으로 부천지역노동조합협의회(부노협)이 만들어졌고 민주노총의 기반이 됐다.

우리는 총파업투쟁 당시 노동자들이 모였던 춘의사거리로 향했다. 부천비정규노동센터 이종명 소장이 당시 분위기와 거리를 안내했다.

“부천IC 쪽에 있는 공단에서 파업하고 내려오는 대오들이 거리로 계속 붙어서 수가 불어나요. 그리고 부천역 남쪽 공단에 있던 사람들이 부천역에서 같이 합류해서 올라와 이곳에서 싸웠죠. 춘의사거리에서 부천역을 가기위해 투석전이 벌어지고 화염병도 날라 오고 그랬지요. 한번은 춘의사거리 파출소에 있던 경찰이 총을 쐈어요. 우리가 전경을 뚫고 사거리를 넘으니까 혼비백산해서 하늘로 총을 쏜 거예요.”

지금 그 파출소는 빈 건물로 남아있었다. 이 소장은 당시 공장에 들어갔지만 노조는 만들지 못했고 가두투쟁에만 참여했다고 했다. “노조가 없는 곳에서 일했으니까 매일 욕먹고 살았는데, 집회 현장에 나오면 신나는 거예요. 노동자들이 힘을 모아 경찰도 밀어붙이고. 한마디로 해방구였죠.” 그때 그는 가슴이 벅찼다. 지금 생각하면 그 거리가 인권의 장소가 아니겠냐고 했다. 중소영세사업장이 많던 부천지역에서 지역투쟁이 일던 이 거리는 노조가 없던 노동자들에게도 한 가닥 희망을 열어줬다.

유동성이 높아진 시대, 노동자의 권리는 낮아져

그러나 투쟁의 영광은 지속되지 못했다. 89년 이후 구조조정으로 도산한 공장도 많았고 유성기업처럼 충청지역 이남으로 공장을 이전한 사업장도 많아지면서 제조업 사업장은 많이 줄어들었다. 지금은 학교비정규직 노조를 비롯해 서비스직종의 노조가 많다. 이 소장은 아파트형 공장에 영세사업장이 많이 있지만 노조를 만들기 더 어려워졌다고 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제조업 사업장 노동자 수 차이는 크지 않아요. 파견도 많아졌고. 아파트형 공장이 생기고 나서 쉽게 이전하는 거예요. 얼마 전에는 한국노총에서 노조를 만들었는데 그 사업장이 이사 가니까 힘들어졌죠.” 영세화되고 유동성이 높아진 사업장에서 노동자들은 자신의 권리를 찾기 더 어려워졌다. 특히 부천은 서울과 인천의 중간이라 노동자들의 삶터와 일터가 다른 경우가 많다. 서울로 출근하는 노동자, 서울에서 출근하는 노동자, 인천으로 출근하는 주민, 서울로 출근하는 주민. 서울의 팽창은 부천지역의 장소성을 좀 더 흩뜨려놓는데 일조했다.

그러나 86년 인권의 장소가 때로는 교도소였고, 때로는 거리였던 것처럼 유동성이 인권의 장소를 아예 가로막는 것은 아니다. 마침 이 소장이 교육공무직(학교 비정규직)노동자들의 투쟁 소식을 전해준다. 유동하는 시대, 우리의 해방구는 어디선가 또 송곳처럼 뚫고 나올 것이다.[워커스 4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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