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이 인민재판보다 우월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워커스 사회주의탐구영역]


#1. 당신은 정말 재판관을 존경합니까?

“존경하는 재판장님.”

근래 유행했다는 각종 법정드라마는 물론이고 실제 재판에서의 진술문, 탄원서 등에도 종종 등장하는 문구죠. 그런데 대체 왜 재판장을 존경해야 하는 걸까요? 그 어렵다는 사법고시를 통과한 똑똑한 사람이라서? 아니면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어서? 물론 우리말에서 ‘존경하는’이라는 수식어는 실제로 존경을 담고 있다기보다는 상대방을 높이는 의미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죠. 가령 정치인들은 항상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이라는 말을 달고 사니까요. 그렇다고 정말 정치인들이 국민들을 존경하고 있다고 믿는 사람은 거의 없지요. 다만, 형식적이라 하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재판장에게 존경의 수식어를 붙이는 것은 공명정대한 사리분별로 정의를 구현해주길 바라거나 혹은 그럴 수 있는 권위가 재판장에게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겁니다.

그런데 과연 재판관들이 ‘존경’이라는 수식어를 받을 만한지 의구심을 품을 수밖에 없게 하는 사건들이 터지고 있지요. 사법부 스스로 판사들의 정치성향을 은밀히 조사한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대법원이 재판결과를 놓고 박근혜 청와대와 정치적으로 거래하려 했다는 의혹까지 나왔습니다. ‘사법행정권 남용’, ‘재판거래’, ‘사법농단’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는 이 사태에서 주요한 피해자들은 노동자들이었습니다. 노동자들에겐 생존이 걸린 문제가 권력자들에겐 거래의 대상에 불과하다는 현실이 드러났죠.

문재인 정부가 이 문제를 얼마나 제대로 해결하려 할지는 미지수입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임명한 김명수 대법원장은 검찰이 수사한다면 성실히 협조하되 직접 고발하지는 않겠다면서 검찰로 공을 넘겼고, 대법관들은 성명을 내 ‘재판거래는 없었다’며 스스로 의혹을 부인하고 나섰죠. 보수진영은 ‘정부가 근거도 없이 파장을 키우고 있다’면서 사법부에 대한 수사는 법원의 독립성을 침해한다고 주장합니다. 반대로 이 사태는 사법부 스스로 독립성과 재판의 공정성을 무너뜨린 사건이므로 엄중한 사법개혁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느 쪽 주장에서든 ‘사법부의 독립성’은 절대적 가치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 점은 문재인 정부 역시 공유하고 있죠. 지난 2월 서울고등법원이 삼성 이재용 부회장에게 집행유예를 선고하며 석방하자 해당 재판을 맡은 정형식 판사를 파면하라는 청와대 청원이 빗발쳤고, 3일 만에 20만 명 이상이 동의하자 청와대가 답변을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청와대는 답변에서 “판사를 파면할 권한이 없다”고 하면서 그 이유로 “헌법상 권력분립 원리가 있고, 법관이 재판내용으로 불이익을 받을 위험이 있다면 사법부 독립이 흔들릴 수 있다”고 했죠. 더불어 “법관의 사실인정, 법리해석, 양형이 부당해도 법률 위반은 아니며 법관의 재량권을 인정”하고, 법관은 특별감사 대상도 될 수 없으며 사법부가 독립적으로 모든 권한을 갖고 있다고 했습니다.

결국 사법부의 독립은 통제로부터의 독립이고 대중으로부터의 독립입니다. 선출되지 않는 이 권력집단은 그 누구도 책임지지 않으면서 스스로 신성하다고 주장하죠. 노동자들의 통념과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판결이 나오고 그에 대해 항의하면, 우리는 흔히 (특히 보수언론으로부터) ‘법 감정으로 재판을 재단하지 말라’거나 ‘인민재판을 강요하지 말라’는 얘기를 듣곤 합니다. 그런데 정말 그래야 하는 걸까요? 사법부의 독립성과 공정성은 절대적 진리일까요? 우리는 언제까지 우리가 권력을 위임한 적도 없는 집단에 유무죄를 판결받으면서 꼬박꼬박 존경을 표해야 하는 걸까요?

#2. 누구의, 무엇을 위한 ‘공정’과 ‘독립’인가

“재판의 본질을 훼손하는 재판거래 의혹에 대하여는 대법관들은 이것이 근거 없는 것임을 분명히 밝히고, 이와 관련하여 국민에게 혼란을 주는 일이 더 이상 계속되어서는 안 된다는 깊은 우려를 표시합니다. (…) 사회 일각에서 대법원 판결에 마치 어떠한 의혹이라도 있는 양 문제를 제기한 데 대하여는… 대법관들 모두가 대법원 재판의 독립에 관하여 어떠한 의혹도 있을 수 없다는 데 견해가 일치되었습니다.”
- 2018.6.15.〈 사법행정권 남용 사태에 관한 대법관들의 입장〉

대법원의 재판거래 의혹이 커지자 지난 6월 15일 대법관들은 위와 같은 입장문을 발표했습니다. 의혹의 당사자들이 사태 확산에 짐짓 ‘우려’까지 표명하며 스스로를 변호한 셈인데요. 요지를 보면 ‘의혹은 근거 없는 것이며 재판은 독립적이고 공정했으니 결과를 받아들이라’는 겁니다.

대법원이 실제로 박근혜 청와대와 모종의 거래를 했는지는 철저히 조사해 밝혀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 사태를 촉발한 대법원 ‘사법행정권 남용의혹 관련 특별조사단’의 조사보고서를 보면, 사법부는 해당 재판들의 정치적 성격을 아주 잘 알고 있었으며 재판결과가 정부와 자본에 이익이 된다고 스스로 규정하고 있었음이 드러납니다. 즉 실제 거래여부와 무관하게, 재판이 공정하다는 전제 자체가 흔들리게 된 것이죠. 이번에 공개된 문서를 보면 대법원은 “사법부는 그동안 대통령의 국정운영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최대한 노력”해왔다며 그 근거로 통상임금이나 KTX 해고승무원 문제, 전교조 법외노조 판결 등 노동자들에게 타격을 준 재판결과들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가령 통상임금 판결에서 대법원은 정기상여금이 통상임금에 포함된다면서도 뜬금없이 ‘신의성실의 원칙’을 들이대며 소급적용을 막아 결과적으로 회사가 떼어먹었던 임금을 노동자들이 돌려받을 수 없도록 만들었는데, 해당 문건에서는 이 판결이 “우리 경제 전체가 안게 될 부담을 고려”한 것이라고 적어놓았습니다. 말은 ‘경제 전체’의 부담이라고 써 놓았지만 사실은 자본이 지불해야 했을 임금부담을 없애주는 판결이라는 것을 알고 있던 것이죠.

특히 노동사건에 대해서는 KTX 승무원에 대한 철도공사의 고용책임을 부정한 판결, 쌍용차와 콜텍의 정리해고를 정당화한 판결, 철도노조 파업을 불법이라고 규정한 판결을 거론하며 “노동시장의 유연성 확보와 바람직한 노사 관계의 정립을 위하여 노력”했다고 적었습니다. 나아가 전교조에 대한 법외노조 통보를 인정한 판결에 대해서는 “교육 부문과 관련하여 전교조 사건이 다수 존재”하며 “역시 4대 부문 개혁의 취지를 뒷받침하는 방향을 모색”했다고 자평했죠.

대법원은 노동자들의 임금을 떼어먹고, 생존권을 박탈하는 해고를 정당화하고, 노동조합과 파업의 권리를 불법화하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그것이 정부와 자본의 이해관계에 부합한다고 스스로 규정까지 하면서 말이죠. 최근 대법원은 논란으로 떠오른 KTX 해고승무원 판결에 대해 재차 재판거래 의혹을 부정하며 “재판연구관실에서 집단지성에 의해 심층연구와 검증을 거친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 재판의 정치적 의미에 대해 면밀하게 파악하고 있던 그 대법원의 ‘집단지성’은 알고 있었을까요. 바로 이 재판 때문에 해고승무원들은 자신들이 일하던 열차에 무려 12년간 돌아가지 못한 채 도리어 각자 1억 원씩의 빚까지 짊어지게 됐고, 그중 한 명은 3살배기 딸을 남겨둔 채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했으며, 지금도 승객 1천 명을 싣고 달리는 KTX에 안전담당 인원은 단 1명에 불과하게 된 우리의 현실을 말입니다. 이것이 ‘독립적이고 공정했다’는 재판의 결과라면, 대체 그 ‘독립’과 ‘공정함’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 걸까요?

#3. 판사를 선출하지 말란 법이 있습니까?

대법원의 판결은 불가역적입니다. 예외적으로 재심을 진행하지 않는 한 말이죠. 그에 따라 사람이나 집단, 혹은 정책의 운명이 결정됩니다. 그런데 그 결정권을 쥔 사법부는 어떤 대중적 통제도 받지 않습니다. 선출되지도, 책임지지도 않는 권력인 것입니다.

사회주의의 핵심 원리 중 하나는 대중의 자기통제입니다. 대중의 통제로부터 자유로우며 자체적인 이해관계를 갖는 권력을 인정하지 않죠. 이 때문에 사회주의자들은 모든 주요 공직자에 대한 선출과 소환권을 요구하고 일체의 특권을 폐지하자고 주장합니다. 당연히 재판관도 예외가 아니죠. 법을 만드는 국회의원도 선출하는데, 그 법을 적용해서 판단하는 사법부를 선출하지 못할 이유는 없습니다.

물론 세심한 전문적 고려가 필요할지도 모릅니다. 예컨대 억울하게 누명을 쓴 사람에게 죄를 물어선 안 되겠지요. 어떤 법을 어떻게 적용해야 할지, 수사과정에서 오류나 허점은 없는지 세밀하게 살펴야 할 점들도 있을 겁니다. 그런데 이것이 선출을 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될 수는 없습니다. 정말 전문지식이 필요한 부분에서는 전문가의 도움을 받으면 됩니다. 가령 지금도 국회의원을 뽑을 때 자격요건으로 특정 분야의 전문성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다만 입법활동에서 고려해야 할 사안들에 대해서는 보좌관이나 입법조사처처럼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지요. 중요한 것은 선출된 자가 결정권을 행사하고 그에 대한 대중적 통제와 책임이 수반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되면 법에 따라 재판을 하는 게 아니라 재판관들이 대중의 눈치를 보느라 인민재판이 판을 치게 될 것이라고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거꾸로 되물어보면, 인민들이 사법의 주체가 되면 안 되는 건가요? 그리고 재판의 기준이 되는 법이라는 것도 진정한 민주주의라면 만들어지는 과정과 내용 자체가 대중의 이해와 의사를 반영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대중적 의지에 따라 법을 만들고, 그 법을 적용하는 과정 역시 대중적 통제 하에 두는 것이야말로 민주주의를 충실하게 구현하는 것 아닐까요?

대개 ‘인민재판’이라는 말은 마녀사냥과 등치되고, 선동에 휩쓸려 아무 근거도 없이 폭력적이고 비합리적인 판결을 내리는 것으로 묘사되곤 합니다. 대중은 무지몽매하다는 전형적인 보수주의적 편견이죠. 이런 식이라면 민주주의 자체가 해악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사법부를 선출하고 대중적으로 통제하자는 것이 아무 기준과 절차도 없이 재판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묻고 싶은 것은, 앞서 언급했듯 해고노동자를 죽음으로 내몰았던 대법관들과 재판연구관들의 ‘집단지성’은 합리적이고,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결정하겠다는 대중의 집단지성은 비합리적인 폭정이라고 단정하는 근거가 대체 무엇이냐는 겁니다. 아, 지금의 지배자들에게는 폭정일 겁니다. 소수의 지배자로부터 권력을 빼앗는 것은 그들의 입장에선 폭력적이겠지요.

물론 선출과 소환은 제도적 기초이고, 그 자체가 대중의 통제를 담보하는 것은 아닙니다. 가령 우리는 지금도 국회의원을 선출하지만 국회가 처리하는 법안들을 보면 오히려 노동자들에게 적대적인 경우가 많죠. 당장 얼마 전 강행한 최저임금 개악법은 노동자들의 임금을 삭감하는 것이었으니까요.

이는 선출된 개개인이 그저 악질적이기 때문은 아닙니다(물론 그런 인물도 있죠). 그들은 나라 전체의 이익을 위해 어쩔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비정규직을 양산하는 것도, 해고를 쉽게 하는 것도, 임금을 깎는 것도 다 “전체 경제를 위해서”라는 거죠. 결국 자본의 이익이 사회 전체의 이익으로 포장되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입니다. 그리고 이는 단순히 포장에 불과한 것만은 아닙니다. 자본주의에서 생산은 자본의 이윤논리에 따라 이루어지기 때문에, 국가는 자본의 이윤창출을 곧 경제발전과 등치시키죠. 따라서 이 시스템의 물질적 기반, 즉 자본이 생산의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조건이 바뀌어야 합니다. ‘사법개혁’이 그저 절차와 제도를 보완하는 것으로는 달성될 수 없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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