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중에’의 나라에서 지금 축제하기

[워커스] 레인보우

[출처: 김용욱]

‘나중에’라는 이 세 글자만으로도 많은 이들이 같은 장면을 떠올릴 것이다. 2017년 2월 16일 ‘새로운 대한민국, 성평등으로 열겠습니다’라는 부제를 달고 열린 대한민국 바로 세우기 제7차 포럼에서 있었던 일이다. 주최 기관인 ‘정책공간 국민성장’의 중심인물이자 당시 지지율 1위의 대선 주자였던 문재인 현 대통령은 자신의 연설을 자르고 차별금지법에 대한 의견을 묻는 성소수자 인권활동가에게 “나중에 말씀드릴 기회를 드릴게요”라고 답했고, 그의 지지자들은 이내 “나중에”를 연호했다.

이 ‘나중에’라는 말을 문자 그대로 자신의 발언이 끝난 후, 행사가 종료되기 전을 의미하는 뜻으로 선해하려 하는 이들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많은 이들은 이 장면을 성소수자 인권을 정책 후순위에 두는 새 정권의 태도를 상징하는 순간으로 기억한다. 전국에 방송되는 대선 후보자 토론회에서 “동성애 좋아하지 않습니다”라는 문장이 같은 사람의 입을 통해 새어 나온, 지난해 4월의 순간과 함께 말이다.

행정안전부 장관이기도 한 김부겸 의원은 지난 2월 혐오표현규제법안을 제출했다가 보름 만에 철회했다. ‘동성애 비판을 금지하는 법’이라는 개신교 보수 세력의 반발에 물러선 것이다. (정작 이 법안이 보호 대상으로 나열하는 사유에 ‘성적 지향’이나 ‘성정체성’과 같이 성소수자를 직접적으로 가리키는 표현은 포함돼 있지 않았다.) 달포 전인 8월 초에 법무부가 발표한 ‘제3차 국가인권정책기본계획(2018~2022년)’ 2차 계획은 물론 3차 계획 초안에도 있었던 ‘성적 소수자의 인권’ 항목을 담고 있지 않았다.

성소수자 인권에 있어서는 말 그대로 ‘나중에’의 나라다. 사회적 합의가 ‘아직’이라는 핑계로 끝없이 뒤로 밀린다. 행정부와 입법부, 그리고 사법부, 그러니까 그야말로 ‘국가’는 사회적 합의를 앞지르려는 시도는커녕 사회적합의를 이끌어 내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은 채, 성소수자 국민들에 대한 자신의 책임을 방기하고 있다. 흔히 말하듯 인권은 합의의 대상이 아니다. 인권이라는 개념을 사회의 상식에 포함하려는 노력이야 물론 필요한 일이겠지마는, 인권이라는 것은 애초에 합의가 아니라 선언에서 비롯된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것을 잊을 수 없는 사람들, 몸으로 이미 알고 있는 사람들, 사회가 무어라 하든 자신의 삶을 이어 가야만 하는 이들이 있다. ‘인권 문제’의 당사자라 불리는 이들, 인권 없이 인간으로 살고 있는 이들이다.

이들이 택한 투쟁의 방식은 흥미롭게도 (물론 이것이 전부는 아니지만) ‘축제’다. 서울과 대구의 퀴어문화 축제는 이미 긴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광주, 부산, 인천, 전주, 제주 등지에서도 최근 퀴어문화축제가 열렸거나 열릴 예정이다. 이것이 흥미로운 것은, 축하할 일은커 기념할 일조차 딱히 없는데도 축제를 열고 있기 때문 이다. (한국만의 일은 아니다. 세계 여러 나라의 대규모 성소수자 행사가 미국 성소수자 운동의 기점인 1969년 스톤월 항쟁을 기리며 6월경에 열리곤 한다.)

한국과는 역사적 맥락이 다를 수밖에 없는 서구, 특히 미국의 성소수자 운동을 참조하(게 되)는 현상에 대해 따질 바가 없지는 않겠지만, 여기서 하려는 이야기는 그런 것이 아니다. 축하할 일이라고는 없는 이곳에서, 바로 지금, 축제를 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혹은 우리에게는 정말로 축하할 일이라고는 없는가? 오늘은 이런 질문들에 관심을 두기로 한다.

“금지된 우리의 삶, 그것은 가히 축하할 만한 일이다”

우리에게 축하할 일이 있다면, 그래서 우리에게도 축제가 필요하다면, 우리가 축제의 이유로 삼을 수 있는 것, 망설임 없이 축하할 수 있는 것은 아마도 서로의 살아 있음 그 자체, 서로가 살아가고 있음 그 자체일 것이다. 우리의 삶을 지켜 줄 생각이 없는 이 사회에서, 우리 삶의 방식은 잘못됐다는 말만 되풀이하는 이 사회에서, 때로 힘겨울지라도 여전히 우리가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 그래서 여기서 오늘 또 만날 수 있다는 사실 말이다. 삶을 공격하는 이들에 끊임없이 맞서 싸워야 하는, 혹은 견딜 수 없는 삶의 끈을 놓은 이들을 애도해야 하는 나날이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혼자는 아니라는 사실은 가히 축하할 만한 일이다. 이것이 지친 삶에 대한 거짓된 위로에 그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나는 하지 않는다. 축하할 가치가 없다고 여겨지는 것을 축하하는 축제는 그 자체로 저항이기 때문이다. 하루짜리, 길어야 한 주짜리 축제를 마치고는 일상으로 돌아가 죽은 듯 지내는 일을 정당화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을 나는 하지 않는다. “축제는 기본적으로 저항이며, 그리고 이 저항은 ‘평범한 삶’으로 돌아갈 생각을 결코 하지 않는다”는 말이 먼저 떠오른다.

금지된 축제를 여는 일은 저항일 수밖에 없다. 행사 종료가 선언된다 해도 그 축제의 참석자는 이미 범죄자 이므로, 그들은 더 이상 기존의 질서에 아무 일 없다는 듯 숨어들 수 없다. 국내 최대 규모인 서울의 퀴어문화축제가 철조망 속에서나마 ‘안전하게’ 치러진다는 이유로, 혹은 각지의 축제들이 먹거리나 소품과 같은 후원물품을 판매하는 부스들과 크고 작은 공연들로 구성된다는 이유로, 또 혹은 언론이 신나서 노는 듯한 모습만을 비춘다는 이유로 때론 잊히곤 하지만 그렇게 하루의 난장이 펼쳐지기까지 집회신고를 비롯한 지난한 과정이 이어진다는 것이 이를 방증한다.

지난 9월 8일 동인천역 광장에서 열린 (‘열릴 예정이었던’이라고 쓰고 싶지는 않다) 제1회 인천퀴어문화축제를 생각한다. (단순히 방해라고 칭하고 말 수는 없는) 물리적·언어적 폭력을 휘두르는 혐오세력들과 그것을 방조하는 경찰 앞에서, 준비한 부스 프로그램이나 무대를 진행하기는커녕 무려 열 시간 내내 그저 상처받을 수밖에 없었던 그날의 참가자들을 생각한다. 그러나 ‘그저 상처받을 수밖에 없었’다는 말은 옳지 않다. 많은 이들이 그 자리에서 나름의 방식으로 대거리를 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몸과 마음에 생채기를 입는 와중에도 우리는 서로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었고, 함께 행진할 수 있었다. 다시 말하건대, 그것은 가히 축하할 만한 일이다. 다들 알고 있듯, 이 사회에서 금지된 것은 단순히 성소수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축제를 여는 일이 아니다. 금지된 것은 우리의 삶 그 자체다. 그런 곳에서 우리가 축제를 열 수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축하하고 기념할 만한 거리를 가지고 있는 셈이며, 성대한 축제를 여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아무리 기를 써도 우리의 삶을 막을 수 없으리라는 사실을 축하하는 우리의 축제가, 때론 싸움의 꼴을 하게 된다고 해도 말이다.[워커스 4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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