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

[워커스 사전]


오늘날 우리가 쓰는 동물(動物)이란 말은 경멸이나 혐오 등 대부분 부정적 비유나 상징들과 관련되어 있다. ‘동물적’이란 말은 오직 감각적인 것, 육체적인 것으로 이해되고 이성이나 사유가 결여된 것을 뜻하며, 그런 방식으로 ‘인간적인 것’과 대비된다. 문명이나 문화와 반대되는 의미로서의 야만적 상태로서 자연적 상태를 뜻하기도 한다. ‘노동’ 역시 유사한 방식으로 ‘동물성’과 연결된다. ‘노동하는 동물(animal laborans)’이란 개념이 대표적이다. 이 개념의 반대쪽에는 ‘호모(homo)’로 대표되는 여러 가지 형태의 인간다운 삶이 놓인다. 이를테면 ‘호모 폴리티쿠스’는 정치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호모 사피엔스’는 생각하는 존재로서의 인간을, ‘호모 루덴스’는 유희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호모 파베르’는 기술과 도구를 사용하여 무엇인가를 제작하는 인간을 나타낸다. 여기서 ‘인간’으로 번역되는 ‘호모’는 ‘남자(man)’를 뜻한다. 이런 생각 속에서 아이들은 어른이 못된 자로 동물에 가까우며, 여자들은 남자가 아닌 자로서 동물에 가까운 존재에 귀속된다. ‘호모’에 딸려오는 수식어들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으로 규정되며 다른 생물 종과 인간 사이의 종차(種差)를 나타낸다.

노동은 ‘인간다운’ 행위라기보다 인간이 동물이기에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일로 설명된다. 인간이 노동을 하는 이유는 그들이 ‘동물’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생명을 가진 존재로서 인간은 먹고 살아야 하는 자연 법칙에 귀속돼 있고, ‘먹고 살기’를 해결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노동을 해야 하며 그것이 고대의 수렵 채취 사회로부터 현재의 임노동에 이르기까지 인간이 벗어날 수 없는 필연적 운명이라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특히 인간이 계몽을 통해 자연 상태로부터 벗어나 사회를 이루고 그 속에서 문명과 문화의 진보를 이룬다고 하는 ‘자연과 사회’의 서구적 이분법에 기초하고 있다. 사회/자연의 이분법은 정신과 육체, 지성과 감각의 이분법과 위계로부터 나아가 문명과 야만, 서구와 비서구라는 공간적 분리에도 적용되며 남자와 여자, 인간과 동물의 관계로도 확장된다. 자연에서 동물의 삶이란 단순히 살아있는 생명 덩어리의 물질대사일 뿐인가. 인간이 아닌 자연의 생명체들에겐 고유한 자기 생의 기쁨과 슬픔, 도전과 적응의 여정이 없는 것일까?

서양철학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존재의 위계는 가장 완전한 존재인 신으로부터 가장 불완전한 하등 존재까지의 서열을 보여준다. 동물들의 위계에서 가장 위에 있는 존재가 인간이다. 다시 말해 신에게 가장 가까운 존재 또한 인간이다. 이 위계를 인간 사회 내부에 투영하면 그 속에는 다시 동물에 가까운 인간과 신에 가까운 인간이 촘촘한 서열 속에 상징화돼 나타난다. 그 상징은 왕과 사제와 남자가 신에 가까운 인간인 반면, 여자와 아이들과 노동자들은 동물에 가까운 인간이라고 말한다. 물론 이것은 지배자들이 지배를 위해 만들어낸 상징이다. ‘가장권’은 여자, 아이, 노예, 가축 등 ‘동물-재산’에 대한 주인의 지배권이다.

하지만 동물이 언제나 인간 이하의 열등한 의미로 비하돼 쓰였던 것은 아니다. 오늘날 동물(animal)이라는 말이 유래한 라틴어 ‘아니말(animal)’은 ‘아니마(anima, 혼)를 가진 존재를 뜻한다. 이 아니마는 ‘숨’을 뜻하고, 생물적 대사만이 아닌 영적인 차원과도 관련된다. 모든 살아 있는 존재는 숨(혼)을 가진 존재다. 이러한 사유에서는 인간이라는 종에 대해서 동물 전체가 집단적 실체로서 나타나지도, 전체 동물이 인간 이하의 존재라고 인식되지 않는다. 기독교의 영향을 받기 전에는 서양 신화에서도 동물은 다양한 신들을 대표하고, 신성과 동물성은 종종 교환된다. 기독교적 세계관 안에서도 창조주인 신의 힘이 피조물에도 미치며 창조된 존재로서 동물에 대한 경외심을 요구한다. 특히 민중적 세계에서 동물은 형제, 동료, 가족, 친족으로 여겨진다. 인간과 동물의 절대적 구분과 위계가 성립한 것은 존재가 순수한 사유체(res cogitans)와 순수한 물질체(res extensa)로 구분되고 인간이 그 둘의 복합체로 이해되기 시작했을 때부터다. 정신과 물체로 나눠진 세계에서 인간과 동물은 ‘생각하는 동물’과 ‘오직 동물’로서 구분된다. 이것이 근대의 인식론적 사건이다.

과거에 동물을 이해하는 방식은, 금(禽) 수(獸), 축(畜) 같은 용어에서 보듯이 날짐승, 들짐승, 집짐승처럼 주로 거처와 서식지에 따라 다른 이름과, 인간과 맺는 관계를 통해 나타난다. 동물은 신성과 연결되어 있어 그 상징 또한 길흉을 나타내거나 하늘로부터의 전조와 전령의 의미를 지니기도 한다, 12지신이 모두 동물의 형상을 하고 있는 것은 오늘날의 신적인 것과 동물적인 것의 개념 속에서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과학과 기술, 자본이 신적인 것을 대체하고, 존재의 신성함이 무너지자 동물성에 내재한 신성함도 힘을 잃었다. 인간의 신체와 동물의 신체가 오직 물질의 덩어리(res extensa)로만 환원된 곳에서 생명에 대한 경외심과 자연에 대한 윤리와 금도가 없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인간과 동물이 함께 거주하던 공동체가 파괴되면, 지상의 공동 거주민(demos)으로서 함께 살기 위해 맺고 지켜왔던 인간과 동물 사이의 공동의 규약도 힘을 잃는다. 사냥을 금지하는 기간 같은 촌락의 공동체 규약은 더 이상 지켜지지 않는다. 오늘날 축산공장과 도축장에서는 그 누구도 동물의 죽음에 예를 다하지 않는다.

근대 서구의 ‘사회계약’은 ‘시민들 간’의 생명과 안전을 위한 상호협약이었다. 부르주아들의 정치적 권리 투쟁은 새로운 정치적 인클로저(enclosure)를 만들어내 ‘비인간 동물’과 ‘시민이 아닌 인간’을 사회로부터 배제하고 공유지의 관습적 권리를 모두 박탈했다. 이후에 전개된 시민권 운동은 배제된 인간들에게 시민권을 확장하는 과정이었다. 시민권을 통해 노예는 자유인이 되고, 여자도 인간이 되고, 흑인도 시민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권리는 인간이 아닌 동물 앞에서는 멈춰 섰다. 동물은 권리 없는 존재, 절대적 무권리자로서, 신으로부터의 보호도, 자연으로부터의 보호도, 공동체로부터의 보호도, 모두 벗겨진 채로 완전히 ‘벌거벗은 존재’가 되고 말았다. 동물보호법이라는 협소하게 규정되는 법률들이 있지만, 그 법의 바깥에 있는 더 많은 동물에 대한 규정 외의 착취를 허용하는 역설을 가져올 뿐이다. 이것은 ‘비정규직 보호법’의 역설과 일맥상통하며, 불안정노동의 확대와 비정규직화는 노동자로부터 권리의 옷을 벗겨내는 과정이다.

과거 자연과 인간 사이에 공동으로 수립되어 있던 노모스라는 대지의 관습법은, 아무리 힘이 센 권력자라도 그것을 함부로 훼손할 수는 없었다. 오늘날 법의 범주는 하늘의 법도, 대지의 법도 모두 사라지고 오직 법전에 적힌 성문법의 한계로 축소되어 ‘법이 허용하는 대로’ 절차만 지키면 모든 것이 ‘합법적’이라고 승인된다. 갓 태어난 새끼를 어미로부터 떼어내거나 죽이지 않는다는 금도 같은 것은 없다. 1년에 10억 마리든 20억 마리든 도살하는 것에 아무런 문제가 없고, 학대하고 차별하며 비참하게 사육하고 참혹하게 살해하는 것도, 모두 규정대로만 하면 ‘합법’이다.


문제는 동물의 이러한 상태가, ‘동물에 가까운 존재’로 규정되는 인간, ‘노동하는 동물’에 대해서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자본이 자연에 가하는 생명에 대한 폭력적 변형과 삶의 재조직화는 인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일어난다. 수익을 위해 밤낮없이 알을 낳도록 강제되는 양계장 닭들의 야간 노동과 ‘가치사슬’이란 이름의 24시간 지구 생산체제 속에서 잠과 밤을 빼앗긴 채 일해야 하는 노동자들의 심야 노동을 조직하는 원리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사룟값을 최소화하고 고깃값을 최대화하는 방향으로 조직되는 축산업은, 노동자에 대한 비용은 최소화하고 노동으로부터의 착취 이익은 최대화하려는 노동정책과 동일한 논리에 따라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구로 벤처타운 콜센터 노동자들이 코로나19에 집단감염 된 후 콜센터의 내부 도면이 드러난 적이 있다. 나는 그때 큰 충격을 받았다. 그 도면이 예전에 봤던 공장식 축사, 그리고 노예선의 구조와 똑같았기 때문이다. 최소 면적에 최대 인원을 배치해 관리자가 가장 효율적으로 노동자를 통제할 수 있게 만든 공간 배치였다. 사슬과 채찍이 없어도 공간이 신체를 통제하고 콜 수가 자발적 경쟁을 시키는 그곳에서, 쉬는 시간도, 위험을 피할 방법도, 아무것도 스스로 결정할 수 없는 노동자들이, 자유를 빼앗긴 돼지들과 같은 상태에 놓여있었다. 폭력적 축산업의 문제를 고발한 다큐멘터리 ‘도미니언(dominion 2018)’에는 푸른 초원 위에 아마존이나 쿠팡의 물류센터를 닮은 거대한 사각형의 축산 공장들이 등장한다. 구로공단이 사라진 자리에 들어선 실리콘 밸리 이름을 딴 ‘G-밸리’가, 미싱사와 봉제공이 사라진 자리에 콜센터 노동자라는 새로운 취약 여성 노동자가 태어났다는 사실을 감추듯이, 겉으로는 깔끔하고 세련된 브랜드 로고가 새겨진 건물들은 그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완벽하게 감춘다. 그 속에 자신의 생명의 에너지를 밤낮없이 죽은 자본의 증식을 위해 갈아 넣어야 하는 존재가 있다.

동물권을 말하면, 일각에서는 그것이 인간의 권리나 노동자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처럼 맞세우기도 한다. 채식주의는 친환경 유기농 식품처럼 부르주아의 선택권에 속하고, 비싼 채소를 먹는 자들이 노동자들이 먹는 값싼 고기를 비난하는 것은 위선이라고 말한다. 그런 면도 성찰해봐야 한다. 하지만 저렴한 식량은 노동자를 위한 복지가 아니다. 저렴한 식량은 저렴한 노동을 떠받치고, 저렴한 노동이 다시 저렴한 식량을 떠받친다.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는 착취의 악순환은 노동자의 삶을 계속 악화시킬 뿐이다. 무급의 가내노동과 노동시장에 유입된 여성 노동의 평가절하가 임금상승을 억제하는 수단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노동이 노동을, 생명이 다른 생명을 착취하게 함으로서 자본은 이익을 창출하고, 분노하는 힘들이 서로를 향하도록 함으로서 분열 시켜 통치한다. 자본의 통치는 상급 노동자가 하급 노동자를 괴롭히고, 지친 노동자들이 지친 동물들을 학대하며, 약자가 더 약자를 향해 욕을 하고 침을 뱉게 만든다. 그 착취의 고리를 끊으려면 우리는 누구와 연대하고 분노의 방향을 어디로 돌려야 하겠는가.

동물권 운동은 자본에 맞선 ‘삶-권리’로서의 생명권 투쟁으로서, 생존권과 민중권, 노동권 투쟁으로 연결되고 확장돼야 한다. 동물해방은 노동해방, 여성해방과 함께 생명들의 반자본주의 투쟁에서 피억압자들의 공통 목표가 되어야 한다. ‘새끼만 낳는 짐승’이라는 프롤레타리아의 경멸적 의미도 해방의 주체로 바꿔내지 않았던가. 우리는 자본과 임노동의 관계가 아닌 다른 생산 관계를 상상할 수 있듯이, 인간과 동물이 맺는 다른 관계의 방식도 상상할 수 있다. 그러니 만국의 노동자들이여, 돼지와 단결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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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효정(정치학자,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해고강사)의 다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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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경락

    자본의 통치는 상급 노동자가 하급 노동자를 괴롭히고, 지친 노동자들이 지친 동물들을 학대하며, 약자가 더 약자를 향해 욕을 하고 침을 뱉게 만든다. 그 착취의 고리를 끊으려면 우리는 누구와 연대하고 분노의 방향을 어디로 돌려야 하겠는가.

  • 웃음보

    문재인 정부도 신경쓸 것 없음. 2년도 남지 않은 정부는 이미 끝난 정부나 마찬가지 임. 남은 문재인 정부 기간에 민심이 폭발을 할 가능성도 있지만 다음 정부가 더민주당이 되든 미통당이 되든 상관 없이 준비해야 함. 그렇지요 효정님. 호의호식하다가 저승갈 사람도 신경을 쓸 것 없음, 그들은 출세욕에만 찌들어서 오래전부터 폐인들이었음. 그렇지요 효정님. 그런데 기사의 내용을 보니 부정적인 측면으로 도배를 해놨내요. 노동력에는 긍정적인 측면도 많습니다. 이론가는 겨우? 글을 쓰지만 노동력은 세계를 시시각각 만들어갑니다. 지식은 훌륭하고 인간적이게 하지만 자랑을 하는 것은 안돼요. 지식인이 탄압을 받은 사례는 많아요. 그렇지요 효정님

  • 웃음보

    문재인 정부의 개혁 좀 봐라 오죽하면 경찰청장이 노동계의 노사정 합의 반대파처럼 목소리를 냈겠나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문재인 정부의 개혁이 기겁을 할 정도다ㅎㅎㅎㅎㅎㅎ

  • 웃음보

    오랜만에 김태희를 보니 흑백으로 봐도 이뿌구만ㅎㅎ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