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인권위원회 20년, 인권의 원칙이 단단히 뿌리내릴 수 있기를

[질문들]


2018년 8월 말. 이집트에서 온 난민 신청자들이 단식 투쟁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 효자치안센터 앞 농성장에 찾아갔다. 농성장이라고 하기 뭣한 깔개가 전부인 곳이었다. 이집트 민주화 투쟁 중 구속과 고문을 겪고 탈출한 이들은 난민법이 있는 한국에서 안정된 삶이 가능하리라 기대했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2년이 넘도록 난민 인정을 거부하며 거짓 서류까지 작성했다. 이집트 난민 신청자들은 이의 신청을 하고 여러 차례 항의도 했다. 하지만 한국 정부는 응답하지 않았고 이들은 결국 단식을 시작했다.

정부에 적극적인 문제 해결을 요구하고 있을 때, 최영애 국가인권위원장이 취임 후 첫 현장 방문으로 이들을 찾아왔다. 위원장은 “인권위에서 열심히 할 테니 이제 단식을 풀고 건강을 지켰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이들이 한국 정부 기관의 수장으로부터 직접 약속을 받은 것은 아마 처음일 것이었다. 필자는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정부 기관에 문제를 제기해도 당사자가 기관의 대표를 만나는 경우가 거의 없다 보니, 당연한 일이 다행인 일이 돼 버린 것이다. 그럼에도 새로 취임한 인권위원장이 직접 당사자를 찾아왔다는 점에서, 적어도 다른 정부 기관과는 달리 제 이름에 맞는 역할을 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앞으로의 변화가 기대되기도 했다. 하지만 3년이 지난 지금, 그때의 장면은 그저 씁쓸한 기억이 됐을 뿐이다.

당사자를 외면한다면 인권위 존재 의미가 없다

그때의 기억이 다시 떠오른 것은 최근 인권위 결정에 실망스럽다 못해 화가 났기 때문이다. 인권침해 당사자가 인권위를 찾을 땐, 인권의 원칙으로 사건을 조사할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당사자가 처한 상황을 우선에서 살펴볼 것이라는 기대 또한 크다. 이 믿음과 기대가 무너진 두 가지 결정은 공교롭게도 모두 경찰과 관련이 있었다. 경찰의 인권침해는 반복될 가능성이 크다. 그렇기에 당사자들은 인권위가 경찰의 인권침해를 분명히 해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란다.

첫 번째 사건은 지난해 5월, 경찰이 난민 여성 N의 집에 ‘까트(khat)(1)’가 있다며 가택 수사한 일이다. 저녁 시간, 자녀 둘과 친구와 함께 있던 N은 문을 쾅쾅 두드리는 소리에 놀랐다. 문밖에서 경찰과 통역을 포함한 7명의 남성이 집에 마약이 있다며 들어가야 한다고 했다. 이들은 영장을 보여주거나 어디를 어떻게 수색한다는 설명도 없이 온 집안을 뒤지며 사진을 찍었다. N이 무엇인가 설명하려고 하면 “말하지 말고 여기(소파에) 앉아” 있으라며 강압적인 태도를 보였다. 통역인에게 자신은 나쁜 짓을 하지 않았다는 말을 전해달라는 요청도 무시됐다. 심지어 N을 찾아온 친구의 가방도 동의 없이 수색했다. 하지만 경찰이 찾던 까트는 발견되지 않았다.

N은 충격을 받았고, 자신의 권리를 제대로 보장받지 못한 것에 분노했다. 다른 아랍 사람에게도 같은 일이 생길 수 있다며 이 문제에 항의하고 사과받고 싶다고 말했다. N과 함께 이야기를 나눈 뒤, 이 사건이 모든 이주민에게 하나의 선례가 될 수 있도록, 무엇보다 인권의 관점으로 사건을 판단하기 위해 인권위 진정을 했다. 그리고 1년 후, 인권위는 놀랍게도 경찰의 행위가 적법절차였다며 해당 진정을 기각했다. 결정에 대한 근거는 N의 동의하에 경찰이 집에 들어갔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조사관은 N을 한 차례도 조사하지 않았다. 집에 들어갈 때 경찰이 찍은 2분 길이의 영상과 통역인 진술로만 내려진 결정이었다. 당시 상황에서 N이 절대로 문을 열지 않았어야 인권 침해로 인정한다는 것일까? 어째서 당사자가 문을 열 수밖에 없었는지를 묻지 않는가? 인권의 문제를 적법성의 문제로만 판단한다면 법원과 인권위가 각각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두 번째 사건은 전국공공운수노동조합이 강원도 원주시의 집회 금지 조치에 긴급구제를 신청한 일이다. 당시는 건강보험고객센터 노동자의 파업이 이어지던 상황이었다. 노동조합은 7월 23일 결의대회를 위해 원주시의 방역지침(거리 두기 2단계)에 따라 100인 이하 집회로 8곳에 집회 신고를 했다. 원주시는 집회 하루 전 사회적 거리 두기 3단계 격상을 발표하면서 집회에만 거리 두기 4단계를 적용해 이를 금지했다. 집회의 권리가 침해되는 것을 막기 위해 노동조합은 22일 인권위에 긴급구제를 요청했다. 하지만 인권위는 23일 집회 금지에 대해 어떤 개입도 없었다. 오히려 강원경찰청은 “모든 수단을 동원해 현장에서 집결하는 것을 차단하고, 금지된 집회 개최 등 불법행위는 법과 원칙에 따라 엄정하게 처리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인권위는 27일에서야 “집회·시위에만 4단계를 적용한 원주시 방침은 과도한 기본권 제한”이라는 입장표명을 했다. 그러면서 “원주시의 행정명령으로 인해 진정인이 원하는 시간에 집회를 개최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회복하기 어려운 피해가 발생할 우려가 있는 경우’에 해당하지 않음으로 긴급구제 권고를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집회의 권리’의 핵심은 시간과 장소를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다. 이를 알고 있었다면 ‘회복하기 어려운 피해가 발생하지 않는다’라는 결정을 내리기 어려웠을 것이다. 인권위의 어정쩡한 결정으로 원주시의 집회에 대한 4단계 조치가 그대로 이어졌고, 결국 집회의 권리를 포기하지 않은 수십 명의 노동자는 경찰 수사를 받게 됐다.

차기 인권위원장이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 할 현장의 목소리

이명박 정부가 인권위를 정권에 종속시켰던 암흑의 시간을 딛고, 2018년 기대 속에 새 인권위원장이 임명됐다. 최초로 시민사회가 참여한 인권위원장 후보추천위원회를 통해 임명된 만큼 기대가 컸다. 그러나 지난 6월 인권활동가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인권위 평가 설문 결과 ‘그저 그렇다’고 답한 응답자가 49.3%로 가장 많았다. 긍정적인 평가는 30.1%에 그쳤다. 단지 위 두 사건이 아니더라도 인권위가 관료화되고 사법 기관화된 경향성을 벗어나지 못했으며, 시민사회와의 소통도 여전히 부족하다는 평가가 잇따랐다.

지난 9월 6일, 송두환 인권위원장이 취임했다. 차기 위원장 선출을 위한 후보추천위원회가 4명의 후보를 추천했고, 대통령은 오랜 법조인 경력의 남성인 송두환 후보자를 지명했다. 과거와 다르지 않은 정부 기관의 전형적인 수장의 모습과 겹쳐 실망스러웠다. 부디 나의 실망이 성급한 것이었음을 확인시켜주길 바란다. 인권위 구성원 모두가 인권위를 만드는 것이지만, 위원장이 권력에 맞설 준비가 돼 있지 않거나 인권의 원칙을 견지할 의지가 없다면 인권위의 독립성과 민주성이 담보되지 못한다. 위원장의 태도가 실무자들에게 영향을 미칠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설문조사에서 인권활동가들은 “인권침해 현장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민첩한 위원장이 필요하다”라고 답했다. 위원장이 당사자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인권 현장을 살필 때 위원과 조사관을 비롯한 모든 구성원이 인권의 원칙에 더 철저할 수 있을 것이다.

2001년 11월에 출범한 인권위가 20년을 맞았다. 이제 사람들은 인권침해를 겪으면 인권위를 떠올린다. 앞으로 인권침해 당사자 구제를 넘어 인권의 원칙이 사회적으로 확장되도록 역할을 하길 바란다. 인권위가 인권에 대한 입장을 분명히 할 때 시민이 이해하는 인권의 폭은 확장된다. 삶의 곳곳에 인권위가 함께 할 때 사회 곳곳에 인권의 원칙이 단단하게 뿌리 내릴 수 있을 것이다.

<각주>
(1) 한국에서는 마약으로 분류되지만, 예멘 등 아랍국가에선 오랫동안 합법적으로 사용하는 식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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