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을 보내며 여성, 여성 노동자의 안전을 말하다

[여성, 노동의 기록]


2022년 나는 유난히도 이런 얘기들을 많이 들었다.

‘나는 양성평등주의자이지, 성평등주의자는 아니다’
‘성폭력예방교육 강사에 여성이 더 많은 것 자체가 차별 아니냐’
‘우리 회사는 성비가 반반인데 여성부만 있는 건 차별 아니냐’
‘성폭력이면 성폭력이지 왜 성폭력을 여성폭력, 여성혐오라고 하냐. 남성들도 성폭력 당할 수 있다는 걸 배제하는 것 아니냐’

윤석열 정부 출범에 맞춰 백래시가 도를 넘었다. 일베의 여성혐오를 안고 남녀를 철저히 갈라치기 하며 당선된 정권이라 뭔가 달라도 다를 것이라 예상은 했지만 이건 정말 도가 지나쳐도 한참 지나치다. 그리고 그 도가 지나친 백래시들이 노동조합 안에서도 목소리를 내고 있다.

처음 성희롱 예방교육을 시작했을 때 가장 많이 받은 질타는 ‘왜 남성을 잠정적 가해자로 이야기하는가’였다. 하지만 15년 전인 그때도 그리고 지금도 나는 한 번도 교안에 남성이라는 단어를 쓴 적이 없다. 자료의 그림이나 사진도 가능하면 성이 표시되지 않는 것을 사용하려 노력한다. 그럼에도 남성과 여성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때가 있다.

바로 국가나 언론, 단체에서 발표하는 통계수치에서다. 그것들은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아주 많은 현실을 반영해 혐오범죄, 강력범죄, 성폭력의 가해자와 피해자의 단순성별을 보여줘 왔다. 눈앞에 드러나 있는 통계를, 그 수치가 보여주는 극명한 현실을 어떻게 하란 말인가.

함께 공부하던 친구에게 학교 안에서 죽임을 당하고, 일하다 일터에서 동료에게 죽임을 당하고, 대낮 길거리에서 남편에게 맞아 죽는 여성들의 이 끔찍한 죽음들이 여성폭력, 여성혐오가 아니면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유독 피해자인 그 여성들이 운이 없어서, 사람을 잘못 만나서, 그 공간에 있어서 죽은 것일까? 유독 가해자인 그 남성들이 괴물 같은 존재여서 그런 것일까? 그렇다면 그 괴물을 다 없애면 괜찮아지는 일일까? 그 괴물을 다 가두면 괜찮아지는 일일까? 가두고 가둬도 계속되는 이 폭력들이 말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피해자나 가해자가 아니라 계속되는 폭력이 가능한 이 사회를 들여다봐야 하는 것은 아닐까?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을 지배하고 우월성을 증명하려 하는 사회, 다른 사람을 지배하고 우월성을 증명하려는 수단으로 폭력과 살인, 혐오를 사용하는 사회. 그리고 통계라는 숫자가 보여주는 우월성을 증명하고자 하는 사람들과 그것에 희생되는 사람들.

미국의 교수이자 여성운동가인 다이애나 E.H.러셀의 ‘여성들이 살해당할 때, 그들이 여성이라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라는 이야기는 우리에게도 적용된다. 우리가 눈과 귀, 머리와 가슴을 돌려야 할 곳은 사회에서, 조직에서 누구에게 혐오의 화살이 쏘아지고 있는가, 누가 혐오의 화살을 쏘는가다. 그리고 그 화살로 인해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이익을 가져가는 사람, 집단은 누구인가다. 버젓이 존재하는 사회구조적인 차별을 지우고, 개인의 문제로 사건을 축소하는 것이 누구인가다.

사무실로 걸려 오는 수많은 전화 중 자주 마주하게 되는 내용이 있다.

“네, 민주노총입니다.”
“아, 네. 그런데 거기 아무도 없나요?”


내가 일하는 민주노총 세종충남본부에서 상근하는 임원, 상집 중 여성은 3명, 남성은 5명이다. 그중 여성들만이 이런 내용의 전화를 접한다.

7월에 열린 민주노총 전국 여성활동가대회 때 이 얘기를 하니, 같은 경험을 이야기하는 여성들이 있었다. 술을 마시고 사무실로 전화해 여성 상근자들에게 지분지분 음담패설을 하는 경우도 있고, 쉴 새 없이 전화해 업무를 방해하다가 급기야 사무실 주소를 안다며 찾아가서 위해를 가하겠다고 협박하다가 남성 상근자가 전화를 받아야 멈추는 경우도 있다. 반말은 기본이고, 왜 먼저 인사를 안 하냐며 시비를 거는 경우도 있다. 전화를 받은 사람에게 아무개 씨나 업무를 담당하는 누군가를 찾는 것이 아니라 아무도 없냐고 묻는 사람에게 되묻는다.

“여기 있습니다. 지금 통화하고 계시는 저요.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시나요? 아니면 찾는 분이 있나요?”
“아, 아가씨 말고 상담하시는 분 안 계시나요?”
“저희는 전화 받는 모든 사람이 상담합니다. 말씀하세요.”


상담을 마치고 나서야, 질문에 대한 답변을 듣고 나서야 이야기한다.

“죄송합니다. 저는 전화 받는 분이신 줄 알고.”

이렇게 한참 늦은 사과를 하는 사람은 10명 중 1명이 될까 말까지만.

이에 더해 요즘은 공문이나 웹자보에 담당자로 이름과 함께 들어가 있는 업무전화로 음란 메시지나 합성 사진 등 디지털 성폭력이 가해지는 경우도 발생하고, 익명게시판이나 개인 SNS로 폭력적인 메시지가 오기도 한다.

버젓이 자신과 통화하는 여성을 없는 사람으로 치부하는 선입견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전화를 받는 여성은 상담을, 자신이 원하는 질문에 대한 답을 하지 못할 것이라는 선입견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이름만으로 성을 특정하고 폭력적이고 음란한 메시지를 보내는 당당함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이런 경험은 왜 여성에게 집중돼 있을까.

역차별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에게 묻는다. 이 사회에서 좀 더 불안한 사람은 누구인가. 이 사회에서 좀 더 두려움을 갖는 사람은 누구인가. 밤길에 뒤따라오는 발소리에서, 공중화장실에서, 학교에서, 직장에서, 대중교통에서, 가장 안전해야 할 가정에서조차 좀 더 안전하지 못한 사람은 누구인가.

사회가, 숫자가, 현실이 보여주고 있는 사실을 외면하고 변화를 이야기할 수 없다. 2022년 여성은, 여성 노동자는 그 어디에서도 안전하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는 끝까지 싸울 것이다. 사회에서, 일터에서, 일상 곳곳에서. 2023년 조금 더 안전해진 사회를, 일터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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