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과 능력주의로 은폐된 불평등교육을 넘어, 평등교육으로

[사파시평] 정순신, 조국 등 ‘학부모’ 자원이 드러낸 문제


일반화의 오류 혹은 사례의 다양성. 한국 사회 교육제도를 둘러싼 기득권과 자원의 불평등이 이렇게도 해석되는구나. 국가수사본부장 후보로, 학교폭력 가해자 아들을 위해서 법적인 자원을 총동원한 정순신 한 사람만 가지고 교육 및 입시문제를 일반화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니까 그런 생각은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는 것이란 지적. 또 다른 편에선 사례들이 매우 다양해서, 맥락을 모르고 함부로 말하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맥락을 보면 완전히 달라지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이건 조국의 학폭 피해자 아들의 미국 대학 시험 부정과 관련된 얘기에서 나온 말이다. 논리학적으로는 다 맞다. 하지만 일반화 대 개별 사례라는 양극단을 주장한 이 얘기들의 결론은 결국 동일하다. 흥미롭게도 처음부터 예정된 결론을 가진다. 결국 사례들은 개별화되고, 문제는 그대로 남는다. 이 두 가지 사례에서 등장한 두 명의 인물, 정순신과 조국이, 현실 정치진영에선 반대편에 서 있지만, 하나의 세계의 사람들로 보이는 이유다. 왜 문제는 남고, 과정은 유사해지고, 결론은 동일해질까.

1. 첫 번째 사례

윤희근 경찰청장이 단수 추천하고 윤석열 대통령이 뽑은 2대 수사본부장 후보 정순신은 검사 출신 현직 변호사이고, 대통령이 서울지검장을 할 때 ‘인권감독관’으로 근무한 측근, 한동훈 법무부 장관과는 사법연수원 동기이다. 그는 또한 아들을 ―판결문에 적힌 바에 따르면 “검사는 다 뇌물을 받고 하는 직업”이라고 말하고, 제주도에서 온, <한겨레신문>을 읽는 고등학교 동급생을 “빨갱이 새끼”라고 부를 정도로― 정치적인 도착상태에 빠진 인물로 키운 아버지이기도 하다.

그 아들은 아버지의 “검사 빽”을 심하게 믿고, 동급생을 괴롭히다 ‘학교폭력’으로 강제전학을 당했는데, 그 아비라는 자는 아들의 대학입시를 위해 이미 판정이 난 학교폭력을 두고, 자신이 가진 법적 지식과 연고를 총동원해 재판에 재판을 이어 붙여 대법원까지 갔다. 아들에게 대학입시에서 학폭을 은폐하기 필요한 1년의 ‘법적 시간’을 주기 위해서 말이다(법의 시간이 사회적 시간을 이렇게 압도한다. 노동 판결부터 이런 학폭까지- 민중언론 참세상 <사파시평> 2021.10.08.자).

그리고 서울대학교는 정시로 그를 입학시켰다. 듣자 하니, 수시 아닌 정시 입학 절차에서도 문제 있는 지원자는 더 조사해야 한다고 하는데, 서울대는 도대체 무엇을 한 건지, 대학교의 유기행위도 적지 않다. 이런 구멍을 두고도 입시가 공정하다고 할 수 있는 건지. 또 능력주의가 제일인 건지. 결국 정순신은 자신의 기득권과 ‘학부모 자원’을 아주 잘 사용해 학교폭력 가해자인 아들을 ‘아주 좋은 대학’에 입학시켰다. 참 교육적이기도 하지.

2. 두 번째 사례

이를 두고 어느 이는 조국의 아들 경우와 비교했다. 그 아들이 학폭 피해자였다고 한다. 나는 자세한 저간 사정은 모르지만, 여기까진 십분 일반적인 ‘학폭’에 비춰서 이해하려고 한다. 그런데 그다음부터가 다양, 아니 특수하다. 이른바 일반화의 오류를 넘어서는 ‘사례의 다양성’ 논리. 그래서 학교폭력 피해자인 아들을 지방대 교수인 어머니의 근무처 근처에 불러다 ‘자원봉사’를 하게 해서 대학입시용 경력을 만들었다. 그가 학폭 피해자라서 그렇게 했단다. 또 학교폭력 피해자인 아들이 할 수 없이(?) 미국 대학에 들어갔는데, 그 대학에서 학기 중에 ‘in-class’ 시험이 아닌 home 오픈북 시험을 쳤다고 한다. 한국에 있는 부모가 미국에 있는 아들과 함께 혹은 조력하여 시험을 치렀는데, 그것도 그가 학폭 피해자라서란다. 학폭 피해자라서?

갑자기 궁금해진다. 저 위에 정순신 검사/변호사의 아들에게 학교폭력을 당한 피해 학생의 경우, 이런 유사한 조력을 자기 부모에게 받았을까? 부모가 재직 중인 대학에서 인턴을 하면서 입시용 경력을 만들고, 미국 대학에 입학해 부모의 실시간 조력을 받아 함께 시험을 치르고. 나는 잘 모르겠다. 이런 식의 비교를 뭐라고 이해해야 할까.

결국 학폭 가해자의 생존도, 학폭 피해자의 생존도, 다 부모가 누구였기에 가능한 방식이었다. 바로 그 공통점이 남는다. 개별화에도 불구하고, 일반화의 오류를 뚫고서 진짜 문제가 남았다. 학폭이란 동일한 사건에서 피해와 가해의 입장 차이에도 불구하고 더 중요한 것은 바로 그들의 부모가 누구인가 하는 것. 이것은 엄연히 ‘불평등’의 문제인가. 아니면 학폭 가해자는 저쪽이고, 피해자는 이쪽이라는 문제만으로 앙상하게 비교할 일인가. 그 문제가 남는다.

3. 세 번째 사례

흥미로운 다른 사례들도 나는 알고 있다. 유명해진 위 사례들과 서로 다른 듯하지만 비슷한 지점을 건드린다. 근데 이런 일들은 사실 매우 흔하다. 한 사례는 부모 중 한쪽이 교수이고, 아들이 학폭 가해자는 아니지만, 위법한 일을 했는데, 부모가 자식을 분리해 비싼 대안학교에 보냈고, 그 후 그는 여하튼 졸업을 했다. 또 다른 사례의 경우, 부모 중 한쪽이 교수이고 미국에서 안식년을 가지면서 취학기 아이에게 외국어 교육이 가장 필요할 때 영어를 배울 수 있게 하고, 그곳에서 학교를 더 다니게 했고, 그 교양으로 그 친구는 한국의 아주 좋은 대학 좋은 학과에 입학했다.

내가 한국에 귀국해서는 더 많은 유사 사례를 접했다. 이때 가장 놀라웠던 것은, 특히 한국의 노동시장에서 대학 재학 중 ‘인턴’ 제도가 도입되자, 부모의 연줄로 아이가 인턴을 맡게 되는 경우가 흔하디흔하다는 현실이었다. 언론사, 법조계, 대기업 등등 부모의 직장이 자식의 인턴 소개소가 됐다. 그러니 조국 부부나 그를 감싸는 이들이 가진 억울함도 일견 이해가 되기도 한다.

실제 대한민국의 많은 교수가 자신의 ‘안식년’을 자식 교육의 더없는 기회로 활용한다. 또한 정순신의 경우는 검사의 직분을 활용했다는 점을 눈여겨봐야 한다. 즉 법을 직접 관장하는 전문성을 가진 자가 법을 휘두르고 법의 허점을 악용해 절차의 공정성까지 해쳤다는 점, 그리고 자식에게 검사직을 그따위로 가르쳤다는 점이다. ‘직업윤리’를 의심하게 하는 그의 죄질이 더 독한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교육에서 공정이란 과연 무엇인가라는 의문이 들게 한다.

4. 개별화되는 사례들의 동일성

그렇다면 결국 이들 사이 거리는 오십보백보인가. 아니면 온건한 사례부터 독한 사례까지, 모두가 다 면면하게 흐르는 진한 ‘부모된 마음’으로, 학폭 자녀까지 그런 자원을 통해서 보호하는 것에 대해서 이해해야 할까. 자식을 그런 방식으로 보호하지 않을 부모가 얼마나 될지 생각해봐야 할까. 혹 부모 중 그런 자원을 가지지 못한 경우에는 자식을 어떻게 교육해야 할까.

사실은 문제는 이것이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사회적 불관용’의 문화가 얼마나 강할까라는 문제다. 말하자면 그렇게 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게 하는 것. 자신이 가진 모든 자원과 네트워크를 최대한, 법과 상관없이 활용하고 동원하는 부모를 막아내는 사회적 불관용의 기준과 문화가 있는가 말이다. 눈에 보이는 구조보다 더 강한 것은 이렇게 면면히 흐르는 ‘사회적인 것들’이다. 우리는 과연 그것을 바꿀 수 있을까. 온갖 교육과 관련된 사건들이 일반화와 개별화 속에서 흩어져버리게 만드는, 이 묘한 사회적인 풍토 말이다.

5. 교육문제에서 두 가지 장애- 구조적인 인식론적인

문제는, 교육제도와 악행에는 바로 다음 두 가지 장애들이 언제나 놓여 있다는 점이다.

첫째, 부모라서 그럴 수 있다는 공동의 연대 의식. 내가 부모인데, 하필 조건이 되고, 그래서 해줄 수만 있다면 다들 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 생각 말이다. 혹은 이미 하고 있기에 가지는 일종의 유대와 공범의식. 심지어 이런 관행에 대해서 냉정하고 객관적일 수 있는 사람은 한국 사회에서 아이 가진 학부모가 되어보지 않았기 때문이라거나 자식이 없는 미혼의 경우만 가능하다는 생각까지.

하지만 과연 정말 모든 학부모들은 다 그런가? 아니, 다 그럴 수 있는가? 혹은 그런 위치가 된 이들이 그래서 그렇다는 건 언제까지 사회적으로 용인돼야 하는가? 그렇다면 그런 위치에 있는 학부모라는 것 자체가 교육 불평등의 원인이 되는 것 아닌가? 교육의 불평등은 결국 사회적 불평등을 약화하고 해체하는 것으로 해소하는 방향일 수밖에 없는 것이 된다.

둘째, 입시제도를 포함해서 교육제도는 자의적이고 개인적 자원의 동원, 즉 불평등한 사회체제가 개입할 여지를 가능한 줄이는 방향으로 나가야 한다고 우리는 교과서에서 배웠다. 그게 바로 공정함이다. 능력주의의 시작이 그래서 가능한 것이다(교육이 만약 ‘출발점의 동일함’에서 출발하지 않는다면, 공정과 능력은 허상일 수밖에 없다. 나는 ‘능력주의’를 그렇게 해석한다). 하지만 우리의 사회 현실은 계속 어긋난다. 교육제도는 현실 앞에서 무력하거나, 현실 속에서 굴절된다. 지금껏 교육제도 중 사회 안에 던져졌을 때 ‘제도적인 허점’을 보이지 않는 제도가 없다. 왜 그랬을까? 결국 모든 교육제도는 제도 이전의 문제다. 하지만 너무 결론이 쉽다. 이것 역시 일종의 현실 도피이고 핑계다.

6. 불평등한 교육, 불평등을 공고화하는 교육체제

그러니 사실은 이 교육제도, 입시제도 자체가 문제다. 아니 대학 자체가 문제다. 대학이 가진, 그리고 명문대학이 가진 우월함의 표식, 그것으로 인생이 절대적으로 바뀔 수 있거나, 이미 누리고 있는 계급을 유지하거나 재생산할 수 있다는, 그 상징화된 자본과 구조가 문제다. 나아가 제도 자체에 접근하는 시각, 목적을 무엇으로 두느냐가 문제다.

정순신이고 조국이고 간에, 학폭의 피해자이고 가해자이고 간에, 그리고 입시 부정이고 공정 입시이고 간에, 지금 드러난 문제는 현재의 교육제도, 입시제도가 언제나 가진 자들에게 관대하거나 그들을 교정시키지 못한 ‘실패’작이라는 사실이다. 교육의 실패다. 그 입시제도 교육제도가 오히려 사회적 불평등을 강화하는 기제가 되고 말았다는 사실이다. 교육제도 자체가 불평등을 만든다. 정순신의 ‘자식 사랑’ 스캔들을 단지 스캔들로 보지 말고 이 현실에 대한 자각으로 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를 기초로 교육의 진보, 혹은 진보교육이 무엇인가를 이야기해야 한다.

이와 관련해 내가 내린 간단한 결론은, 불평등한 교육, 불평등을 공고화하는 교육체제를 넘는, 말하자면 평등교육, 민중교육 제도로의 개혁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 그를 향한 화두를 던지고자 한다.

교육제도가 사회적 불평등, 계급 재생산의 도구가 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교육제도를 통한 불평등의 계승, 전승, 공고화를 막는데 나서야 한다. 즉 교육제도의 기본 목적을 교육을 통한 불평등의 개선에 두고 과감하게 나아가야 한다. 그런데 과연 현재 ‘진보’ 교육감 중에서 이런 목적을 자신의 교육철학을 둔 이가 있는가? 나는 그런 목표야말로 진보 교육감을 내세우려는 이유, 즉 진보적 대안의 정당성이 돼야 한다고 본다. 아니 교육현실과 교육제도가 사회적 불평등을 강화하고 현존하는 계급체제에 계급·계층이동을 봉쇄하는, 계급 재생산의 수단이 돼버린 한계에 봉착한 지금이야말로 그것이 진보교육, 혹은 교육진보의, 혹은 진보교육감의 유일한 출마 내지 당선 목표여야 한다. 누군가는 그 주장을 하기 시작해야 한다.

불평등한 교육, 사회적 불평등을 공고화하는 교육체제에 맞서서, 그것을 고치는 방향은 ‘평등교육’을 지향하는 것이다. 평등을 교육의 지표로 삼고, 사회적 평등을 위한 교육체제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허상 같은 공정경쟁과 능력주의로 은폐된 교육제도에서 평등 교육관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공정과 능력주의로 은폐된 불평등교육을 넘어, 평등교육을 지향해야 하고, 그렇게 제도를 바꿔 나가기 위해 제도적 대안을 만들어가야 한다(일례로 특성화고 학생 고 홍수연의 죽음은 왜 ‘정상교육체제’ 혹은 학교교육체제 안에서 반향을 일으키지 못하고 사라져갔는가.).

7. 지금 해야 할 일

물론 이 방향으로 만들기 위해서 우리는 가만히 있어선 안 된다. 즉 개별 사건으로, 사례의 다양성으로 문제를 축소하지 말고, 문제를 드러내고, 더 깊게 비판해야 한다. 무엇보다 먼저 국가수사본부장 후보 정순신 사퇴파동을 단지 “아쉽다”고 표현한 현 정부의 저열한 사회적 의식과 공감 수준에 대해서 대차게 문제제기하고 대통령이 “아쉽다”는 표현 이상의 책임을 통감한다고 말하도록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대통령의 태도는 항상 그래왔듯이 아전인수격이고, 자신은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간다. 임명권자로서 자신의 오류는 통감하지 않는 것이 먼저다. 하지만 임명권자가 왜 그런 자를 임명했는가가 문제이다. 그는 지명을 철회하면서 “아쉽다”고 표현하고서(무엇이 아쉬운지 묻고 싶네), 갑자기 앞으로 관직 임명 시 자식 문제를 거론하겠다고 하는데 그것 자체도 ‘연좌제’일 수 있다. 공직 임명 시 아들의 학교폭력에 대해서 부모에게 책임을 지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검사 정순신이 자신이 ‘국가기관’인 검사 직책을 이용해서 아들의 학폭 전력을 은폐하는데 매우 적극적이었다는 점, 그리고 아들이 “검사” 직업에 대해서 표현한 말에서 보듯이 검사로서 과거 전력에 심각한 문제가 없었는지 확인해야 한다는 문제다.

그리고 정순신의 아들을 정시입시로 합격시킨 국립대학법인 서울대학교는 이 학생의 입시전형이 제대로 됐는지 조사 후 공표할 의무가 있다. 규정에 따르면 수시가 아니라 정시에서도 학교폭력 문제는 거론돼야 할 사안이고, “감점 요인”이라고 한다. 감점에도 불구하고 합격했다면 인정해야 할 수도 있지만, 만약 감점조차 하지 않았다면 이는 국립법인 서울대 입시의 문제로 비화한다. 직무를 유기한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전국의 교육감들은, 진보 쪽이라면 이 문제를 고민하고, 새로운 공약을 내세웠으면 한다. 학교에 대해서 투명 경영, 공정 교육, 특수학교 등의 ‘혁신교육’만 할 것이 아니라, 그 모든 대안마저 불평등 체제의 일부가 되는 교육현실에 대한 문제를 보다 심각하게 느끼고, 교육제도가 불평등하고, 교육제도가 불평등을 공고히 하는 기제가 되고 있다는 점을 겸허히 인정하는 노력, 나아가 그를 바꾸는 제도와 정책 한 가지라도 제안하길 바란다.

* 이 칼럼은 사회적파업연대기금 홈페이지 sapafund.org와 소식지 <사파동행>에도 함께 게재됩니다.


태그

로그인하시면 태그를 입력하실 수 있습니다.
권영숙(노동사회학자, 사회적파업연대기금 대표)의 다른 기사
관련기사
  • 관련기사가 없습니다.
많이본기사

의견 쓰기

덧글 목록
  • 김남희

    맨날 조국 조국... 그러면서 조국 때 보여줬던 생난리를 아무도 안 보여주죠? 무려 학폭범 일인데. 필자 본인부터 촛불 드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