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평] 개헌 논의, 반신자유주의 정치논쟁으로

87년 헌법 논의 신자유주의 개혁분파의 전유 막아야

정부가 개헌안을 발표했다. △대통령 임기는 4년으로 하되, 연이어 선출되는 경우에 한하여 1차 중임 허용 △대통령 궐위 시 후임자 임기는 전임 대통령 임기의 남은 기간으로 함 △ 대통령 궐위 시 후임자 선출 방식은 남은 임기가 1년 이상인 경우 국민직선으로 하고, 남은 임기가 1년 미만시 총리 대행 △대통령과 국회의원 임기(임기주기)일치와 동시선거 실시 여부는 3개 안을 제시를 골자로 한 원포인트 개헌안이다. 개헌안 내용은 3개안을 던진 것을 제외하고는 익히 예고된 것이다.

이윽고 노무현 대통령이 특별회견을 갖고 개헌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20년 만의 기회임을 누차 강조했다. 그리고 3말4초 개헌 발의를 앞두고 정치세력들에게 공을 넘겼다. 각 당과 후보가 당론 또는 공약으로 차기 정부에서 추진할 개헌의 내용과 일정을 명확하게 제시한다면 차기 정부와 국회에 넘길 용의가 있다는 이야기다. 노무현 대통령으로서는 각 정치세력의 반응을 보며 개헌 발의 시점을 타진하겠다는 것으로, 꽃놀이패를 즐기겠다는 의도로 보인다.

노무현 대통령의 개헌 발의 예고는 대선을 앞둔 정치세력간 힘관계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이다. 청와대를 중심으로 한 개혁분파는 개헌 카드를 쥐고 국면 주도권을 꾀하고. 나아가 2.13 이후의 해빙 무드를 타고 남북정상회담과 북미 관계 개선 흐름까지 보며 개혁세력 결집에 만전을 기할 전망이다.

예상한 대로 노무현 정부는 87년 헌법 자체의 문제는 언급하지 않았다. 단지 대통령 및 국회의원의 선출과 임기 문제만 던졌을 뿐이다. 주지하듯이 87년 헌법은 6.29선언의 내용을 담은 것으로 반독재 민주화운동과 6월항쟁의 결과물이다. 그러나 민주화의 열망을 담았던 87년 헌법은 지난 20년간 한국사회 지배질서의 재생산과 맞물려 해석되고 적용되어왔다. 따라서 개헌을 말하는 이상 오늘날 신자유주의 지배질서에 의해 고통받고 유린당하는 우리 사회구성원의 삶과 권리 문제에 대한 전면적인 논의를 보장해야 한다. 노무현 정부가 던진 개헌 논의는 이를 원천봉쇄하고 있다는 점에서 기만이며, 개혁분파가 정국 주도권을 쥐기 위한 전술카드로 헌법을 활용한다는 점에서 정략이다.

엄밀히 말한다면 헌법 개정 논의는 제헌의 맥락에서 거론해야 마땅하다. 무엇보다 87년 헌법은 6월항쟁의 성과는 담았는지 모르지만 7,8,9 노동자투쟁의 성과는 반영되지 않았다. 이후 87년 헌법은 국민의정부와 참여정부를 거치며 신자유주의체제가 구축되는 동안 이에 저항해온 노동자 농민 등 우리 사회구성원 다수의 이해의 반대편에 존재해왔다. 많은 부분 신자유주의체제를 정당화하고 민주주의의 후퇴를 용인하는 방식으로 해석되고 적용되었다. 87년 헌법을 만들었던 민주화, 개혁세력이 지배세력으로 자리잡으면서, 이 지배세력이 신자유주의정치 주체로 변모하면서, 87년 헌법의 한계는 보다 뚜렷해지고 있다.

진보운동 진영은 연초 노무현 대통령이 개헌 발의 의사를 처음 피력한 이후 여러 입장을 보였다. 민주노동당 안에서는 민생문제와 평화통일헌법 문제를 포함하는 폭넓은 정치적 논의로 확장해야 한다는 주장과 개헌 의제 확대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고 정략적 의도에 말려들 수밖에 없다며 경계하는 주장 등이 제기되었다. 한국사회당은 53체제와 87체제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핵심 사항이 헌법 개정에 반영돼야 한다는 특별성명을 채택하기도 했다.

노무현정권의 개헌안이 기만이고 정략이란 점은 사실이다. 따라서 개헌 논의 개입은 그 자체로 개혁분파의 국면 주도 강화에 기여할 것이라는 우려도 십분 이해된다. 그러나 누가 만들었든 개헌 논의의 장이 열린 이상, 87년 헌법과 관련해서 신자유주의체제가 얼마나 우리 사회구성원을 괴롭히는지, 우리 사회가 어떤 원리로 어떤 체제로 새롭게 만들어져야 하는지에 대한 논쟁을 피할 이유는 없다. 가령 "대한민국의 경제질서는 개인과 기업의 경제상의 자유와 창의를 존중함을 기본으로 한다"는 헌법 119조 1항은 신자유주의 세계화 정책의 헌법적 근거로 해석되어왔다. 경제 장만 놓고 보더라도 사회공공성과 사회화를 위한 전면 개정의 필연성을 제기하며 사회구성원 전체의 공론에 부쳐야 할 문제다.

더군다나 임박한 한미FTA 체결은 보다 공세적인 논쟁 개입을 요구한다. 노무현 대통령과 개혁분파의 개헌 발의 카드가 한미FTA 체결 시점 위에서 작동하고 있다는 점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한미FTA 협상과 체결은 87년 헌법 정신조차 뛰어넘는 자본운동과 신자유주의정치의 횡포라는 것이고, 따라서 헌법 자체 논의를 넘는 반신자유주의 정치토론으로의 확장에 망설일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개헌 논의에, 피하기보다는 정면 승부에 나서는 좌파정치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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