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인함은 필요에 의해 생긴다”

[흐르는 강물처럼](2) 추 링(1931년 태국 출생)

  젊은 날의 추 링
추 링은 16살 때 찍은 매우 아름다운 사진을 가지고 있었다. 사진 속의 그녀는 영화배우처럼 보였다.

이 인터뷰 후에, 그녀는 끔찍한 사고를 당했다. 집의 채소밭에서 일하다가 균형을 잃고 물이 끓고 있는 독에 빠지고 만 것이다. 그녀는 하반신 전체에 화상을 입었고 한 달이 넘게 병원에 입원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 고통에도 불구하고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에서 어떤 사람들이 나에게 물었죠. 왜 가족 모두를 게릴라에게 데려갔냐고요. 그래서 말했어요, 당신들의 정부가 내 남편을 납치했어요. 공산당을 따라서 게릴라에 들어가는 것 말고 내가 네 아이들을 데리고 무엇을 할 수 있겠어요? 그렇지 않았다면 내 아이들은 아무것도 먹을 것이 없었겠죠. 이렇게 말하니까 그 사람들이 아무 말도 하지 않더군요."


15세에 한 결혼

내가 성장한 그 사회는 대단히 봉건적이었어요. 우리 마을의 늙은 중매쟁이가 내가 15살에 되던 무렵, 나에게 내 미래의 남편을 중매하려고 했죠. 이것은 내가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방법이었어요.

내 미래의 시어머니는 나를 보자마자 바로 좋아했어요. 그러나 나는 아직 내 앞에 미래가 펼쳐져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별로 결혼하고 싶지 않았어요. 매우 슬펐고 펑펑 울었어요. 도망쳐버리고 싶었지만 갈 곳이 아무데도 없었죠. 나는 매우 어렸고 사람들도 많이 알지 못했어요.

어머니가 나에게 말했어요. " 이건 너의 운명이야. 그냥 그것을 따르렴." 나는 학교를 졸업하고 1년이 채 되지 않아 결혼했어요. 나의 인생에 대한 결정을 내가 할 수 없다는 것은 매우 슬픈 일이었죠. 그리고 2년 후, 일본군이 침략했어요.

며느리로서 나의 일은 돼지를 보살피고 시아버지와 시어머니, 시아버지의 두 번째 부인을 포함해 10명의 가족을 위해 식사를 준비하는 것이었어요. 일이 너무 힘들었기 때문에 항상 도주를 시도했어요.

시어머니는 알고 보니 매우 엄한 사람이었어요. 나는 엄청난 육체노동을 해야 했기 때문에 항상 배가 고팠지만, 내가 조금 많이 먹기라도 하면 그녀는 나를 무섭게 노려보곤 했죠. 내 남편은 유약하고 말도 조용히 하는 사람이어서 나를 위해 그의 어머니와 맞서지 않았어요. 그게 저를 아프게 했어요.

설상가상으로, 난 아직 젊고 원기 왕성했지만 남편은 종종 두 번째 아내를 맞이하겠다고 했어요. 나는 그에게 아이를 둘이나 낳아 준 후였기 때문에 매우 화를 냈지만, 그는 다른 여자들을 계속 희롱하고 다녔어요. 어느 날 나는 그에게 최후통첩을 했어요. 만약 두 번째 아내를 맞이하기라도 하면 나는 그를 떠날 것이라고. 그 후에는 그는 다시는 그 이야기를 하지 않았지요.

내 남편은 학교선생과 고무액 추출하는 일을 하고 있었어요. 시어머니는 가족의 돈을 관리하고 있었는데 나에게는 한 푼도 주지 않았어요. 나는 미래가 없다는 생각으로 매우 침울해했고 자살까지 고려했었어요.

그러던 중 나는 신문에서 나를 크게 감동시킨 글을 읽게 되었어요. ‘자살할 용기가 있다면, 살아갈 용기도 있다’는 것이었고, 그 글은 내 마음을 바꾸게 했어요. 나는 아직 토씨 하나까지 기억해요.

홀어머니로서의 삶

내 남편은 세 번째 아이가 태어났을 무렵 체포되었어요. 두 명의 경찰관이 집에 와서 그를 데려갔어요. 나는 충격을 받아 어쩔 줄 몰라 했지요. 그 당시, 정부는 우리처럼 타이-말레이시아 국경에 사는 사람들 중 많은 수가 공산주의자거나 공산당에 협력하고 있다고 의심하고 있었어요.

나는 이웃이 남편을 밀고했다고 생각했지요. 남편은 실제로 공산주의자가 물건 사는 것을 도와주었어요. 하지만 그 상황에서 누구도 그 요청을 거절할 수는 없었을 거예요. 나는 그때 네 번째 아이를 임신 중이었어요.

남편은 체포된 후 고발당했고 수갑을 채우고 발에도 족쇄가 채워져 법정으로 끌려갔어요. 나는 그 모든 일이 벌어지는 것을 눈앞에서 보았어요. 나는 완전히 넋이 나가버렸지요.

후에 남편은 징역형을 선고받고 곧 이어 중국으로 추방당했지만, 나는 도망칠 생각은 하지도 못했어요. 오히려 그에게 충실하려 했지요. 나는 여전히 유교의 가르침을 믿고 있었어요.

닭과 혼인한 여자는 닭을 따라야 하고, 개와 혼인했으면 개를 따르고 원숭이와 혼인한 여자는 그를 따라 온 산을 따라야 하고, 나무토막과 혼인했으면 꼼짝 않고 버텨야 한다는 가르침 말이예요.

그래서 나는 네 번째 아이를 한 손으로 받았고, 아이들을 가능한 한 깨끗하고 남들에게 부끄럽지 않게 키우려고 했어요. 하지만 경제적으로 수지를 맞추기가 매우 힘이 들었어요.

고무액 채취는 밤새 해야 했기 때문에 매우 고된 일이었지요. 일하러 가면서 애들을 모두 데리고 가곤 했어요. 일하다 보면 완전히 기진맥진해서 이상한 소리를 내며 중얼거리곤 했지요.

나는 지금까지 30년이 넘게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어요. 고무액채취를 할 때는 2시간 이상 잘 수가 없어요.

매일 나는 밤 10시에 일을 시작했고 다음날 새벽4, 5시에는 아침을 먹으러 집으로 돌아와야 했어요. 그리고 아침 9시가 되면 고무액을 모으러 다시 돌아왔지요. 만삭이 되었을 때조차 4, 50kg짜리 고무액을 지고 산비탈을 오르내리곤 했어요.

마침내 게릴라에 가담하다

1967년 무렵 나는 네 아이를 데리고 군대에 들어갔어요.

들어가기 전, 나는 이미 해방군이 항상 적들과 싸우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두려움으로 충만한 삶을 살 준비가 되어있었어요. 우리가 마을을 떠나자 이웃들은 우리가 남긴 모든 재산을 가져가버렸지요. 나는 남편이 중국에서 매우 가난하게 살고 있다고 했기 때문에 중국에 가서 그와 함께 있고 싶지는 않았어요.

처음 정글로 갔을 때 우리는 군대를 위한 음식을 나르는 시민군에 배정되었어요. 무거운 짐을 지고 산을 오르내리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지요. 조심하지 않으면 쉽게 미끄러져 죽을 수도 있었죠. 강을 건너고 달리는 일도 매우 힘들었어요. 나는 아직 젊고 날랬지만 우리 팀에서 나는 항상 꼴찌였어요.

베이스캠프에서 식량공급처까지 가는 데는 보통 17시간이 걸렸는데, 사령부로 이전배속받기 전까지 2년 동안 이 일을 했어요. 나의 주된 업무는 요리를 하는 것이었는데, 내 동지들은 내 요리를 좋아했고 음식이 맛있다고 말해주었지요.

게릴라 군대를 위해 요리를 하다

우리는 하루에 5, 60인분의 식사를 2, 3번 정도 준비해야 했어요. 힘들었지만 할 만 했지요. 그때 난 팔이 성하게 붙어있었어요. (긴 침묵) 우리는 한 번의 식사에 2, 3가지의 요리를 내놓았어요.

수프, 약간의 채소와 소금에 절인 생선. 음식은 항상 같았지요. 가끔 계란을 먹기도 했어요. 식사준비는 보통 몇 명이서 같이 했어요. 한 명이 밥을 짓고, 다른 사람이 요리를 하는 식이었지요. 우리는 두부를 많이 만들었어요. 특히 잔치나 축제가 있을 때는 두부를 많이 부치곤 했어요. 우리는 오후 4, 5시경부터 두부를 만들기 위해 자정까지 일하곤 했지요.

요리사였기 때문에 나는 매우 일찍 일어났어요. 보통 새벽 2, 3시경 일어나서 채소를 씻고 썰었지요. 밖에서 고기를 사올 수 없을 때는 사냥을 했지요. 우리는 우리가 필요한 물품구입을 도와주는 정글 밖의 대중들에게 크게 의존하고 있었어요. 우리는 그들에게 기부를 요청하거나 물건을 구입하는 데 드는 돈을 주기도 했어요.

우리는 매우 큰 난로를 사용했고 가는 곳마다 모든 부엌세간을 떠메고 다녔어요. 일단 큰 단지에 밥을 하는 건 한번 익숙해지면 준비하는데 어렵진 않았어요. 보통 가정 요리와 달랐지만 이 방식에 익숙해져야 했어요. 우리 요리하는 사람들은 캠프에서 다른 모든 사람들과 같이 식사를 할지, 우리끼리만 먹을지 선택할 수 있었어요.

군대에서는 물건들을 매우 위생적으로 취급했어요. 우리는 각자의 숟가락을 가지고 있었고, 음식은 10명이 앉는 테이블마다 따로따로 담아놓고 각자 원하는 양을 덜어서 먹게 되어 있었지요.

맡은 일이 끝나면 종종 공부를 하곤 했어요. 주위가 조용하고 안정적일 때, 우리는 점심에 차를 즐기기도 했고, 약간의 쌀죽도 먹기도 했어요. 또 조깅, 야구, 탁구 같은 경기를 할 수도 있었지요.

일반 병사로서의 다른 임무

나는 요리사이기도 하지만, 정글과 말레이시아 국경에 위치한 인근 마을 사이의 부대주둔지에 배속된 병사이기도 했어요. 나는 게릴라들을 위해 길안내를 하거나 메시지를 전달했어요. 우리가 하는 일은 대중과 접촉해서 조직하고 음식을 사오는 것이었어요. 부대에는 우리 같은 사람이 2~4명이 있었어요. 우리는 캠프를 지키는 보초임무도 돌아가면서 해야 했어요. 나에게 야간 보초임무가 돌아오면, 마을주민을 적으로 오인하고 실수로 무고한 사람들을 쏠까봐 항상 걱정하곤 했지요.

다른 때에는 '청소' 임무가 주어졌어요. 우리의 동지들이 걸으면서 남긴 흔적들을 치우고 감추는 일이었지요. 나는 부대의 맨 뒤를 따라 걸으며 발자국을 지우곤 했어요. 한번은 이 일을 하다가 동지들을 잃어버린 적이 있었는데, 주위를 둘러봤지만 그들은 모두 사라져버렸고, 도대체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었어요.

내 앞에 아무런 발자국도 없는 거예요. 그래서 사람들이 어느 방향으로 사라졌는지도 알 수가 없었어요. 마침내 인근 마을에서 나는 소리를 듣고 그쪽으로 향했지요. 우리 팀의 지도자가 나를 발견하고는 내가 뒤쳐졌다는 사실과 사람이 많은 마을로 걸어 들어온 것을 혼냈어요.

팔을 잃다

그때, 나는 다른 캠프로 식량을 옮기는 통상적인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어요. 오후 3시쯤, 늘 가던 길인데도 왠지 길을 잘못 들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팀 지도자한테 우리 앞쪽에 적들이 숨어있는 것 같다고 말했지만, 그는 내 경고를 무시했어요.

보초임무가 다시 내 차례가 되었을 때, 갑자기 옆에서 털썩하는 소리가 들렸어요. 주위를 둘러보다가 나에게 다가오는 3, 4명의 정부군 병사를 발견했지요. 나는 그런 경험이 없어 매우 서툴렀기 때문에 겁에 질려서 총을 더듬더듬 찾아 들었어요. 주위에 다른 동지들이 있었기 때문에 쏠까말까 망설였지요. 마침내 쏠 용기를 갖게 되었지만, 내가 쏜 첫발은 빗나가고 총소리는 적들에게 좋은 경고가 되어버렸지요.

맹렬한 포화가 불을 뿜기 시작했어요. 발포가 잠깐 멈췄을 때, 내 개인 소지품이 든 가방이 사라진 것을 깨달았지요. 그것들은 잃어버리면 다시 얻기 힘든 것들이었어요. 그런 죽음의 순간에서 죽거나 다칠지 모른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던 게 참 재밌죠.

바로 이때, 팔에 총을 맞았어요.

그때 당시는 아무런 아픔도 느끼지 못했지만, "돼지고기덩어리"같은 내 팔에서는 “활짝 피어난 꽃처럼” 피가 용솟음쳐 나오고 있었어요. 끈질긴 적들이 우리 뒤에서 총을 쏘아댔지만, 운 좋게도 우리는 3일에 걸친 고된 행군 끝에 베이스캠프까지 안전하게 후퇴할 수 있었어요. 적들은 우리를 찾아 헬기와 비행기로 우리 머리 위를 에워싸고 밤새 숲을 수색했어요. 머리 위에서 폭탄비가 내리고 있었어요.

총상을 입은 나는 약을 먹었지만 참기 힘든 고통이 멈추질 않았지요. 우유 한 숟가락을 넣은 커피를 마시고 나서 그런 고통이 시작되었고 더 이상 먹을 수 없었어요. 어떤 동지들이 나를 업어주겠다고 했지만 나는 그들에게 더 이상 짐이 되고 싶지 않아 거절했어요.

베이스캠프에 안전하게 도착했을 때, 총 맞은 내 팔은 한 조각의 피부로 그냥 어깨에 달려있을 뿐이었지요. 결국 팔을 잘라내야 했어요. 이미 팔이 감염되어 검게 변했고 벌레들이 꼬이고 있었거든요. 팔 절단에 쓰인 칼은 전혀 날이 서 있지 않았고, 너무 고통스러워서 잠시 기절하고 말았어요.

동지들이 수술 후에 상처를 뜨거운 물로 씻어주었는데, 이것게 화근이었어요. 절대 총 맞은 자리를 뜨거운 물로 씻어서는 안 되거든요. 내가 총을 맞은 곳이 실은 적들의 비행장이었다는 사실은 훨씬 후에야 알게 되었어요. 우리가 숨겨놓은 식량은 적들이 모두 몰수해 가버렸지요.

상처가 나은 후에, 의사 동지는 팔에 남아있는 뼈를 제거하기로 결정했어요. 그런데 그녀는 그런 사실에 대해 사전에 나에게 전혀 말해주지 않았어요. "누가 올지 봐요" 라는 등의 말을 하며 내 주의를 분산시켰어요. 난 전혀 의심하지 않은 채 거기에 있었어요. 그녀가 남은 뼈를 뽑아내자 피가 격렬하게 솟구쳤고 난 거의 기절상태였지요. 내 인생에 많은 불운과 재난이 있었지만 난 강하고 깡이 있었어요.

다친 후에 나에게는 다른 일이 주어졌어요.

나는 우리 부대의 약간의 돈을 관리하고 물건을 산 후 영수증을 발행하는 일을 하게 되었어요. 회계는 때때로 복잡한 일이지만 나는 이 일을 17년간이 계속했어요. 한 팔로는 더 이상 요리를 할 수 없었지만 보초임무와 식량을 나르고 캠프의 가축을 돌보는 일도 계속했어요. 또 땔감을 나르고, 정글 깊숙이 있어 정부군이 감히 들어올 엄두를 내지 못하는 채소밭의 김을 매기도 했고요.

나는 장애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힘든 일을 하고 여러 가지 일에 책임을 지고 있었어요.

나 자신에게 말했어요. 육체적으로 장애일지 모르나 쓸모없지는 않다고. 난 다른 사람에게 기대는 걸 싫어해요. 나 혼자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모든 것을 하려고 노력했지요. 모은 땔감을 묶을 때만 동지들의 도움을 청했어요. 땔감을 등에 메고 얼마든지 나를 수 있었거든요.

남녀 사이의 평등

남자와 여자는 각각 다른 숙소를 사용했어요. 오직 결혼한 사람들에게만 외따로 떨어져 있는 작은 오두막에서 지내는 것이 허용되었어요. 그것도 차례를 정해놓았지요. 사용할 수 있는 오두막보다 부부의 수가 더 많았거든요.

내 아이들과 나는 처음에는 같은 곳에서 잠을 잘 수 없었어요. 나와 아이들은 종종 다른 부대와 임무에 배치되었어요. 아이들 중 하나라도 다른 곳에 가게 되면, 아이의 안전에 대해 항상 걱정이 태산이었어요.

부대에서 여자와 남자는 노동조건에 있어서 동일하게 대우받았지요. 임신 중이거나 아이를 낳아야 할 경우, 여성 동지들이 서로 보살펴주었지요. 아이들은 마을의 산파가 모두 받아냈어요.

정글에서 살기

우리가 원정에 나설 때마다, 10여 일 동안 우리에게는 한 벌의 옷만이 지급되었어요. 정글은 매우 추웠고 모든 것이 조용하고 고요했지요. 가끔 산을 아주 높이 올라가서 새조차 없는 경우도 있었고요. 매우 작은 벌레소리만 들을 수 있었어요.

배고픔은 가장 견디기 어려운 정글에서 가장 잊을 수 없는 경험이지요. 간단히 먹을 것을 찾는 것은 여의치 않았어요. 독이 있는지도 조심해야 해요. 동물을 잡아먹은 후, 남은 찌꺼기를 확실히 잘 숨겨야했고요. 안 그러면 적들이 우리를 추적할 수 있거든요.

말레이시아 보충병

우리 부대원 중에는 말레이시아에서 온 사람들이 꽤 있었지요.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은 교양 있는 사람들이었어요. 그들 중 일부는 대학생이었어요. 이 말레이시아인들 중 예전에 당의 지하 조직원이었던 사람들도 있었고요.

그들은 군대에서 경험한 것들을 놀랍게 받아들였어요. 그들은 나에게, 왜 군대에서는 사람들이 그렇게 화를 잘 내는가를 묻기도 했어요. 반대로, 정글 밖에서 지하조직원과 함께 일했던 그들의 경험은 더 좋아 보이기도 했지만요. 내가 뭐라고 할 수 있을까? 나는 간단히 설명했어요. 모든 다른 공동체처럼, 군대에도 좋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나쁜 사람도 있고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고요. 운 좋게도 나쁜 사람들은 소수였어요.

돌아보기

난 20년 이상 군대에 있었어요. 가장 행복한 순간은 정글 깊숙한 곳에서 동지들을 위해 벌인 잔치와 축제였어요.

나는 정말 즐거워서 춤추고 노래 불렀어요. 우리는 "모주석께서 장수하시길 빕니다"라고 노래 불렀어요. 그 노래 알아요? 또 ‘영광스러운 당’, ‘등대’, ‘사랑하는 어머니의 마음’, ‘파항주(州)의 아들과 딸’ 같은 노래도 불렀지요. 그것이 부끄러워하지 않고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배우는 방법이었거든요. 우리는 또 ‘쌀농사’에 대한 춤도 추었어요.

군대에도 좋은 것들이 있었어요. 바깥세상에는 그렇게 멋진 것들이 없었지요. 물론 군대생활은 위험했지만, 우리가 선택한 길이었기에, 언제든 죽을 준비가 되어있었지요. 누가 걱정했겠어요? 우리의 목숨은 총알 하나에 간단히 끝나버릴 수 있는데. (웃음)

아이들이 모두 나와 함께 군대생활을 한 것이 나를 버려둘 수 없어서 그랬던 것인지, 아니면 내가 아이들을 버려둘 수 없어서 그랬는지는 말하기 힘들어요. 말하기 힘든 긴 이야기예요. 난 이제 증조할머니가 되었어요.

나는 아직도 한 달에 30일, 일주일에 7일, 매일 일해요. 내 동지들은 나를 보고 ‘강철녀’라고 하는데, 내 생각에 나의 강인함은 필요에 의해 생긴 것 같아요.

  2002년의 추 링

[번역]정서
덧붙이는 말

아그네스 쿠는 현재 영국 맨체스터 대학에서 박사과정 중에 있다. 아그네스 쿠는 아시아 여성 구술사를 연구하고 있으며, 15년간 유럽과 아시아 지역에서 사회운동 활동가로 일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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