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 때려잡던 안중근과 제국주의 심장을 쏜 안중근

[칼럼]혼돈의 역사가 제공한 친일, 친독재 세력의 안중근 숭모

  안중근 의사
'코레아 우라'
러시아말이다. ‘대한민국 만세’쯤 된다. 안중근이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직후 외친 말이다.

99년전의 일이다. 뭐라도 찾아내 기념하길 좋아하는 사람들이 가만 있을 리 없다. 안중근 의사의 의거 100주년을 앞두고 말이 많다. 주간지 시사인은 지난달 발간된 28호 <안중근 이용하려는 자 있다>에서 조선일보 등 친일매체와 친일과 군부독재에 부역했던 인물들이 안 의사 기념사업을 벌인다며 개탄했다.

우리는 안 의사에 대해 아는 게 없다

일제하 독립운동기 일본의 정치 거물 암살미수사건은 많았지만 안 의사처럼 성공한 사례는 드물다. 그런 안 의사에 대해 우리는 별로 아는 게 없다. 유해도 챙기지 못한 채 100년을 지냈다.

봉건적 황해도 양반 가문의 유생, 동학농민군을 때려잡던 관군, 독실한 천주교도 토마스(세례명), 애국적 민족주의에 젖은 교육자에서 국내 무력진격을 꿈꾸는 망명 혁명가로 변신하기까지 31년의 짧은 생애 동안 그가 겪었던 무수한 혼돈의 역사를 우리는 다 복원하지 못했다.

안중근의 아버지 안태훈은 개화파 청년 그룹에 속했다. 박영효가 70명의 젊은이를 일본으로 유학시키려 할 때 선발됐다. 그러나 1884년 갑신정변으로 유학은 좌절됐다. 안태훈은 7살 큰 아들 안중근과 함께 황해도 신천군 청계동으로 은둔했다. 1894년 갑오농민전쟁이 일어나자 황해도 관찰사 정현석과 해주감사는 청계동에 도움을 청했다. 아버지가 포수들을 조직해 농민군을 진압할 때 16살의 안중근은 우수한 지도력을 발휘해 ‘박석골 전투’ 등 많은 전투에서 용감한 기습전으로 관군 승리의 견인차였다. 여기까지 안중근은 민중을 수탈하는 봉건 지배계급일 뿐이다.(동학사상자료집 466쪽)

3년 뒤 아버지 안태훈은 정부 문서에 다시 등장한다. 지금의 행정안전부에 해당하는 내부대신 남정철이 쓴 보고서는 안태훈이 향장 유만현을 제거하고 잃어버린 세금을 빼앗아 맘대로 사용했다고 했다. 안태훈과 안중근은 동학농민군을 때려잡을 때 동학군이 버리고 간 쌀 500석을 군량미로 사용했다. 조정은 안태훈에게 원상회복을 요구한다.(1897년 5월6일자 조회 제6호) 이때 안태훈은 천주교회를 찾아가 프랑스 신부의 도움을 받는다. 안씨 가문 전체가 독실한 천주교 신자가 되는 출발점이다. 안태훈은 청계동에 천주교회를 짓고 빌렘 신부를 초빙해 가족을 입교시켰다.

안중근은 1906년 대동강 하류 진남포로 옮겨 석탄상회를 경영하다가 여기서 삼흥학교와 돈의학교를 열어 교육자가 된다. 진남포는 1904-5년 러일전쟁 때 일본군이 첫 상륙한 주둔지다. 이 전쟁은 러시아와 일본이 싸웠지만 피 비린내 나는 전장은 한반도였다. 진남포는 서울 용산과 더불어 일본군의 교두보였다. 그만큼 왜색 짙은 곳에 학교를 연 안중근은 개화파인 아버지를 따라 일본과 외세(천주교)를 믿는 그저 그런 봉건 양반일 뿐이었다.

우리는 1907-1910년의 안중근만 알고 있다

안중근의 31년 전 생애 중에서 항일무장투쟁기는 고작 3년이다. 물론 1905년 을사늑약 직후 잠시 상하이로 갔지만 아버지의 죽음으로 귀국했다. 우리는 불꽃처럼 살았던 1907-1910년의 안중근만을 알고 있다.

안중근의 무장투쟁은 1907년 고종의 강제퇴위와 군대해산에 따른 전국적 의병운동에 합류하면서부터다. 강원도 의병투쟁에서 첫 해외망명지 북간도, 러시아 연해주에서 이범윤부대 참가, 1908년 4월 두만강가 함북 경흥군 일본군 수비대 급습해 2명 사살, 1908년 6월 경흥군 신아산에서 일본군 10명 생포 등의 무력투쟁으로 다져진 안중근은 1909년 1월 러시아 하리에서 그 유명한 단지동맹을 맺는다.

무력투쟁기에 안중근은 10여년 전 개화파 친일세력이었던 아버지와 자신을 어떻게 극복했는지, 수탈에 못 이겨 일어난 동학농민군을 때려잡는 관군 안중근은 어떻게 민중과 화해했는지 우리가 배운 역사는 아무 것도 가르쳐 주지 않았다. 안중근이 브라우닝 권총에 장전한 꿈이 억조창생의 왕조 복원이었는지, 조선 민중 전체의 해방이었는지 가르치지 않았다.

이 혼돈의 역사가 친일, 친독재 세력에게 안중근 숭모의 밑거름을 제공했다.
덧붙이는 말

이정호 님은 전국공공노동조합 교육선전실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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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 , 안중근 , 동학농민 , 안태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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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

    충격이군요.. 우리 집안의 조상이라 항상 자랑스레 여겨 왔는데 안중근의사가 동학봉기를 진압했다니요... 물론 나중에 스스로를 극복했다고 위안할 수 있으나 너무 충격입니다.

  • 28년

    살아오면서 처음 알게 되는 사실이네요.
    무지에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 sj

    빨갱이 개상것들이 글썼냐?동학당이 나중에 대부분 일진회로 합병한 매국노들이다.

  • JK

    정말 편향적인 글이군요, 동학당이 과연 민중의 해방구였나요?
    일본놈들 마저 존경하는 우리의 영웅 안중근 의사를 무시하는거임?

  • 김수민

    이문열이 조선일보에 연재하는 불멸 이라는 소설을 읽고 처음 안중근의사께서 동학군을 진압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안중근에의사에 대해 찾아보다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흥미로운 글이지만 제 호기심을 풀어주진 않네요.

  • Optimus Prime

    좌빨들 혼란스러워 하는구나?
    흑백논리란 말이지... 선동하기엔 좋은거야.
    대중선동의 핵심은 "누구나 알기 쉬운 간단명료한 메시지"인데 흑백논리만큼 단순무식한게 없지. 그래서 선동도구로 쓰이는거야.

    하지만 거기에 익숙해진 이들에게 역사의 아이러니와 다양성이 막상 현실이 되면 혼란에 빠지지.

    하나 더 말해주자만 이러한 혼란에 빠졌을 때 자네들 좌빨좀비들은 가장 어리석은 방법을 택하지.

    '자기합리화'

    ^^ 백날 그래봐아. 역사를 좀먹는 친일매국노들이 이 나라에서 진보라는 탈을 쓰고 감히 민주주의의 이름을 참칭하는 파시스트 라는 사실은 변치 않는다.

  • 전호열

    동학! 전봉준 전씨 선조!
    그리고 독립운동가 제덕 전씨 선조

    막상 안중근은 동학 진압의 역사에 연관되고
    심지어 전제덕 장군 휘하에서 독립운동전개



    전씨 집안의 후손으로 한맺친 우리 선조에 대해 가슴아파 합니다!

    물론 나 역시 2007년 시모노세키 강제구금


    여전히 은폐된 진실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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