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핏, 100년전 모간처럼 월가를 구하다

[칼럼] 중앙일보가 구하고 싶은 건 누구의 나라?

남북전쟁은 1861년 4월12일 시작됐다. 노예 폐지론자들은 공산주의와 사회주의자로 몰렸다. 그들은 사회주의 반역 음모를 위장하기 위한 방패막이로 흑인의 자유를 호소하고 있다고 왜곡받았다. 오늘날 노동운동에 퍼부어지는 공격과 아주 흡사하다.

남북전쟁 4년 동안 노동자 농민 출신의 젊은 병사 60만명 이상이 죽었다. 저널리스트로 남북전쟁의 속으로 뛰어들었던 미국의 평화주의 시인 월트 휘트먼은 1867년 <북소리>라는 참전 시집에서 “늙은 부인이 북군 제2포병대 소속 부상병인 아들 ‘아머 무어’ 옆에 있었다. 그는 분명히 죽을 것이다. 말을 건네자 그는 쾌활하게 대답했다. 무어가 죽어가고 있을 때 나무랄 데 없이 건장한 24살의 청년 JP 모간(존 피어폰트 모간)은 월가의 그의 사무실에서 금 투기로 벌게 된 이익을 계산하고 있었다.” 라고 적었다.

모간은 북군이 또 다시 패하자 북부의 통화사정을 더 어렵게 했지만 그가 매점해 둔 금 값의 폭등으로 엄청난 수익을 챙겼다. 24살의 모간은 전쟁이 영리한 자에게는 돈을 벌게 해주고 가난한 자에게는 죽음을 가져다 준다는 사실을 터득했다. 수천 명의 청년들이 애국심에 넘쳐 워싱턴을 방위하기 위해 블런 전장으로 진격해 갈 때 돈벌레 모간은 뉴욕의 정부 병기창으로 가서 정부 소유 창고의 소총들이 낡고 결함이 있는 것들이라는 정보를 빼내었다. 모간은 천재적인 장사속으로 이것을 정부로부터 1만7500달러의 헐값으로 사서 다음날 고스란히 11만 달러로 정부에 되팔았다.

미국 의회는 “충성을 가장해 국가의 불행을 치부와 향락의 기회로 삼는 자는 반역자보다 더 나쁘다”며 모간과 몇 사람의 투기꾼을 수사했지만 모간은 개의치 않았다.

1863년 징집법이 통과되자 모간은 마치 밀가루 한푸대를 사듯 한 젊은이를 300달러에 사서 자기 대신 전쟁에 내보냈다. 뒤에 이 젊은이가 전사한 걸 희생자 명단에서 봤을 때 모간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록펠러 역시 같은 시기에 펜실베니아 주의 서부 유정탑의 숩속에서 느긋하게 빈둥대며 석유 왕국을 세울 꿈에 부풀어 있었다.

모간과 앤드류 카네기, 록펠러 등 20대의 야심가들은 전쟁이 가져다준 노다지였던 철도 부설권을 얻기 위해 의회에 마구 뇌물을 뿌렸다. 미국의 평론가 매튜 조셉슨은 자신의 책 <강도 귀족>에서 “남북전쟁 초기 횡재를 하게 된 이들은 전쟁이 끝나자 대재벌로 등장했다”고 썼다. 1만명의 중국인 노동자와 3천명의 아일랜드인이 캘리포니아에서 동쪽으로 세라 네바다 산맥과 록키 산맥을 넘어 철도길을 닦으면서 수없이 죽어갔다. 전투하는 군대의 희생과 맞먹었다. 펜실베니아 서부에서 쏟아진 석유는 록펠러를 갑부로 만들었고 피츠버그의 철은 철도와 철도차량을 만드는게 들어가 29살의 앤드류 카네기를 황홀하게 했다.

1893년 공황은 미국이 그때까지 겪은 것 중에서 가장 심한 것이었다. 4년이나 불경기가 전국을 뒤덮었다. JP 모간은 <에리철도> <서던 철도회사>를 재건하고 <필라델피아 앤드 리딩 철도> <뉴욕 뉴헤이븐 앤드 하트포드 철도> <노던 퍼시픽철도회사> 등에 대한 지배권을 더욱 강화시켰다. 비슷한 시기 미국 노동운동가 유진 뎁스는 1893년 6월 20일 시카고에서 업종별 노조의 벽을 깨고 미국철도노조를 산업노조로 출범시켰다. 모간 등 졸부들은 미국철도노조와 정면으로 충돌했다.

졸부들의 뒤에는 언론이 있었다. <뉴욕타임즈>는 1894년 7월7일자 사설에서 “유진 뎁스와 그를 따르는 놈들은 반란자들이며, 폭력선동과 정부의 권위에 대해 반역죄로 처벌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탄생과 함께 투쟁해야 했던 미국철도노조는 뎁스가 1894년 옥중에서도 파업을 지도했지만 결국 깨지고 말았다. 이후 산업노조운동은 약 40년 동안 좌절되었다.

모간은 경제계 거물들을 방으로 모아 마술을 부리듯 기업연합을 이루고 서류를 읽어 치우고 증자된 주식을 판매했다. 최근 우리 언론은 1907년 10월 23일 모간이 2500만 달러를 긴급지원해 구리 광산 주가 폭락이 낳은 금융위기를 3주 만에 막았다고 칭찬했다. 1907년의 JP 모간과 2008년의 워런 버핏을 비교해 가며 금융위기의 해결사 역할을 한 두 닮은꼴이라며 추켜 세웠다. 1907년의 모간이 70살, 워런 버핏의 지금의 나이가 78살의 노령인 점까지 비교해 가면서.

그때 모간이 내놓은 돈 2500만 달러는 10년도 안돼 1차 세계대전 때 대부분 벌충했다. 세계대전이 터지자 미국의 윌슨 대통령은 중립을 선언했지만 1915년 9월 모간 회사는 영국과 프랑스에 대한 차관을 공모했다. 5억 달러의 거액을 모았고 모간 회사는 수수료만 2200만 달러를 챙겼다.

말년의 JP 모간은 중국 도자기와 희귀한 책, 보석, 유화들이 가득한 대리석으로 궁전같은 집에서 살았다. 그러나 모간은 두달간 이집트 여행을 하다 쓰러져 1913년 3월 31일 76세에 로마에서 죽었다. 모간의 제국은 장남 잭 모간에게 넘어갔다. 1933년 루즈벨트 대통령이 집권 첫해에 만든 글라스 스티걸 법으로 투자은행과 상업은행의 겸업이 금지되자 장남은 상업은행을, 차남인 헬리 스타디스 모간은 투자은행쪽을 인수해 지금의 모간 스탠리를 설립했다.

이 겸업금지법은 월가의 투기자본을 통제하기 위한 루즈벨트의 고육책이었다. 대공항 직전 1938년 4월 29일 루즈벨트 대통령은 당시의 주식 소유 집중을 회상하면서 “1929년은 주식소유집중이 극에 달했다. 그 해 미국 국민의 0.3%에 해당하는 주식투자자가 전체 배당금의 78%를 가져갔다”고 설명했다.(의회에 보낸 교서, 미국상원 문서) 모간은 1929년 200억 달러의 자산을 가진 전국의 72개 대기업의 이사직 94자리를 장악해 국가 정책에 발언권을 행사할 만큼 커졌다.

뉴욕타임즈는 지난 5일자 신문에서 100년전처럼 워런 버핏의 행동을 “유익한 애국심”이라고 칭송했다. 7일자 중앙일보의 표현대로 버핏이 월가를 구한 사실이지만 미국을 구한 건 아니다. 미국은 모간과 버핏 같은 금융자본가의 나라지만, 그들과 함께 사는 노동자의 나라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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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 , 주식 , JP 모간 , 버핏 , 남북전쟁 , 모건 스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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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cm

    기회를 잡는자 갑부가 되리라. 위기를 구한자 영웅이 되리라.

  • 박준형

    이런 미디어 비평 기사는 원래 문제가된 기사(중앙일보 컬럼같은것)를 링크해주면 좋지 않을까요? 원래 내용이 뭔지 알면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같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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