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성치고 분노하고 슬퍼하면서 즐기는 신나는 잔치판

[전노협 창립20주년-내가 함께한 전노협](2) 노래판굿 꽃다지

나를 공연연출가로 만든 데에는 80년대 초 부평의 어느 성당 노동자소모임이 큰 역할을 했다. 대학에서 연극반활동을 하기는 했지만 전공과는 거리가 멀어서 이제 그만 하려고 할 즈음에 노동자들의 연극을 지도해줄 수 있겠냐는 부탁을 받았다. 잔업이 많아 자주 모일 수는 없었지만 자취방을 전전하며 함께 대본을 썼고, 공연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나로서는 저렇게 힘든 일과 속에서도 밤을 새워 가며 연습에 몰두하는 힘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라는 의문이 생겼다. 아무리 힘든 삶을 살아가더라도 자기의 생활감정을 표현하고 주위의 동료들과 공유하고 싶은 욕구가 그만큼 크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공연에 참여한 동료들도 함께 아우성치고 분노하고 슬퍼하면서 즐기는 신나는 잔치판을 만들어 보였다.

나도 생각이 바뀌었다. 나의 취미를 위한 연극활동이 아니라 저렇게 자기표현을 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필요한 연극방법을 제공할 수 있는 기술자가 되어야겠다고. 그 뒤로 전문극단에서 본격적인 연출수업을 받으면서도 노동자들의 모임 마당에서는 어떻게 활용할까를 궁리하였다. 그리고 손쉽게 자기표현을 할 수 있는 ‘촌극만들기’등의 공동체놀이의 사례들도 모아나갔다.

86년 봄부터 서울 대림동 지하공간에 ‘살림마당’이라는 노동자문화공간을 열고 강습과 작은 공연 등을 정기적으로 운영하였다. 참여한 노동자들도 그 즉석에서 촌극을 함께 짜고 공동체놀이도 즐기고 새로 만든 노동가요와 율동도 배워보고…. 비록 좁은 지하공간이었지만 우리 나름대로의 공동체문화를 만들고 축제판을 벌였다.

87년 7,8,9월 투쟁을 지나면서 노동자의 문화판도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더 이상 필요가 없어진 살림마당을 접고, 투쟁사례를 담은 노동연극을 만들고자 하였다. 88년 봄 임금인상투쟁을 준비하며 임투교육극이라고 할 수 있는 마당극 ‘횃불’을 만들었다. 그해 봄 많은 민주노조들이 생겨났고, 여기저기서 파업투쟁이 벌어졌다. 파업이 길어지자 문화교육프로그램이 필요하다고 파업 현장에서의 초청이 늘어났다. 사수대가 지키고 있는 농성장에 들어가 그 뜨거운 열기 속에서 공연을 하였다. 자연스레 극단 ‘현장’이 만들어졌다.

[출처: 한내]

극단 ‘현장’의 두 번째 공연은 노래극 ‘노동의 새벽’이었다. 시집 ‘노동의 새벽’에 있는 시들을 노래로 불렀고, 단위노조 투쟁에서 지노협 건설로 나아가야한다는 88년 가을의 주제의식을 담았다. 추석을 전후하여 서울 신촌 한마당소극장에서 공연한 후 지역순회공연에 나서게 된다. 11월 초 대구공연을 시작으로 광주․전주․인천․목포․청주․포항․울산․마창의 순서로 전국을 돌아다니는 한 달 이상의 일정이었다. 대개 지역 노동자회나 그런 모임을 준비하는 쪽에서 주최를 하였고, 공연이 끝나면 지역별 노동운동의 현황과 공연의 주제의식에 대한 평가들이 술과 함께 밤늦도록 진행되었다. 봄에 단위노조 파업농성장을 공연 다닐 때와 비교하면 노동자 연대의식이 급격하게 성장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89년 여름, 서울문화예술단체협의회(서노문협)를 구성하였다. 노동가요테이프, 노동연극, 노래패공연 등을 유통시키며 민주노조들의 문화활동을 지원하는 역할이었다. 이미 전국적 노조협의체의 건설에 대한 논의는 많이 나오면서도 실제 진행은 지체되는 분위기였다. 그해 가을 서노협의 문화부를 맡고 있던 김경란과 신재걸이 ‘전노협 건설을 위한 특별공연’을 제안해왔다. 서노문협에서 함께 활동하던 단체들의 역량을 총집결하여 작품을 준비하고, 제목을 ‘노래판굿 꽃다지’로 붙였다.

[출처: 한내]

89년 12월 2,3일 연세대강당에서 처음 공연하였는데 4회 공연에 1만 2천 명이 모일 정도로 대박을 쳤다. 전노협 준비위원회의 주선으로 인천․부산․울산․대구 등을 순회하였다. 관객과 함께하는 공동체놀이로 시작하여 풍물판굿과 노래와 춤과 연극장면이 어우러지는 종합공연이었다. ‘전노협’ 글씨가 새겨진 대형 깃발로 춤을 추는 장면에 이어 관객 모두가 일어나서 <진노협 진군가>와 <단결투쟁가>를 부르며 끝을 냈다.

노래판굿 꽃다지는 전노협 건설 이후에도 해마다 10월에 공연되었다. 90년도에는 전노협 사수투쟁들과 골리앗농성을 다루는 ‘민중연대를 위한 노래판굿 꽃다지2’로 한양대 노천극장에서 열렸는데 이틀 동안에 1만 5천 명의 관객이 모였다. 나로서는 대규모 집회공연의 연출양식적 틀을 모두 실험하고 확보할 수 있는 공연들이었다.
이후 민주노총으로 바통을 넘겨줄 때까지 노래판굿 꽃다지는 계속되었다. 그 속에서 나는 전노협과 함께 있었다.


[편집자주] 지금부터 20년 전 1990년 1월22일, 민주노총의 전신인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가 창립된다. 87년 7,8,9월 투쟁으로 민주노조 운동이 들불처럼 일어 난 후, 최초로 노동조합의 전국적 협의체가 건설된 것이다
전노협 창립20주년을 맞아 <노동자 역사 한내>에서 당시 전노협 건설의 주역들로부터 전노협 건설의 비사와 에피소드, 의미 등을 직접 듣고자 ‘내가 함께한 전노협’이라는 주제로 연재를 기획했다. 총 17회에 걸쳐 연재를 하고 매월 2~3회 게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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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다지 , 전노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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