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측불허, 인디아

[방방곡곡99절절](11) 델리, 쉼라, 바라나시에 가다

“미래는 예측불허. 그리하여 생은 의미를 가진다.”

만화 <아르미안의 네 딸들>의 주제어인 이 말은 나에게 인도와 함께 떠오르는 문구가 되었다. 인도는 한마디로 “예측불허”이기 때문이다. 나는 어떤 여행에서도 인도 여행만큼 예측불허라는 말을 많이 떠올린 적이 없었다. 계획했던 대로 되지 않고, 원칙을 흔드는 변수들이 늘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 수많은 예측불허 속에 일희일비(一喜一悲)한다면, 스트레스로 살아 돌아오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인도가 명상과 수행의 나라로 소문난 것이 아닌가 싶다.

나에게 인도는 비폭력 평화의 수행자 간디의 나라, 류시화의 명상과 다이어트 요가의 본고장이었다. IT산업의 선두주자, 핵무기를 가질 만큼 국력을 갖춘 나라, 친디아(CHINDIA)로 알려진 경제강국이었다. 사회운동 관련 책을 본 후엔 인도에서 벌어진 나르마다(Narmada) 댐 반대 운동(1985년부터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인도의 나르마다 계곡을 둘러싼 댐 건설 반대 운동), 칩꼬(Chipko) 운동(1973년 히말라야 산림 개발에 항의하는 부족민들의 투쟁) 등 여성이 주인공이 된 생태운동이 활발히 펼쳐지는 곳이었다. 이 모든 것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는 않았지만 나는 인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인도여행을 시작했다.

하지만 인도 공항에 발을 내딛는 순간부터 ‘인도’에 대한 환상을 깨야만 했다. 델리국제공항은 IT 산업의 선진국, 경제 강국인 인도에 비해 작아보였다. 인터넷도 안 되었고 공중전화는 우리의 초창기 전화처럼 전화기 주인에게 돈을 지불하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돌아올 때는 새로 지은 번쩍거리는 공항에서 길을 잃을 뻔했다.

올드 델리의 뉴타운 공사

  자동차 안. 거대한 공사장이 된 델리에서 창문을 열고 자동차를 타고 가노라면 먼지와 매연을 각오해야만 했다.
델리에 도착한 다음 날, 델리대학교 신입생이 된 후배의 살림살이를 장만하는 시장 길에 동행했다. 사로지니 마켓((Sarojini Market)까지 택시를 타고 갔다. 에어컨이 없어 창문을 열고 달리면 델리의 먼지와 매연이 차안 깊숙이 배어들었다.

2010년 7월, 인도는 영연방경기(Common Wealth Game)를 10월에 개최하기 위해 600년이나 된 도시를 번쩍거리는 최신 도시로 바꾸고 있었다. 그 규모가 상상이상이었다. 델리는 북쪽지역을 올드델리, 남쪽지역을 뉴델리라고 한다. 구중심가인 올드델리를 바꾸느라 공사가 계속됐다.

거대한 공사장이 되어버린 델리 거리를 걸을 때면 군데군데 바닥이 드러나는 하수구와 깨어진 시멘트, 보도블록 사이를 요령껏 피해 다녀야 했다. 그 사이로 자전거릭샤와 오토바이 릭샤, 자동차, 소들이 엉켜 지나갔다. 도심에서는 제법 거리가 있는 후배의 집도 그 공사의 여파를 피해갈 수는 없었다. 하얀 티셔츠를 빨래건조대에 널어놓으면 까만 줄무늬가 생겼다. 공사장에서 날아온 먼지가 건조대 줄을 따라 달라붙은 것이다.

인도인 친구는 이 경기 때문에 수많은 델리의 빈민들은 물론 델리대학교 학생까지 거리로 쫓겨날 판이라며 반대운동을 하고 있었다. 전국 각지에서 온 델리대 유학생들의 기숙사를 선수들 숙소로 이용하겠다며 기숙사를 비우라고 한 것이다. 인도 국토의 크기는 우리나라의 33배나 된다. 멀리서 온 지방학생의 고향은 기차를 타고 사나흘, 혹은 일주일쯤 가야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방을 비우고 강의실도 비우라니 학생들로서는 영연방경기대회를 반대할 수밖에 없었다. 철거민들은 델리대학교 울타리를 따라 천막을 치고 살고 있었다.

88서울올림픽을 위해 우리 역시 원주민들을 내쫓고 오래된 건물을 마구 부수고, 보도블록을 몇 번씩 바꿔 깔았던 터라, 델리의 일이 남일 같아 보이지 않았다. 최근의 뉴타운 공사도 생각나지 않을 수 없었다.

  진열장이 된 벽. 건물 벽은 옷노점상의 멋진 진열장이 되었다.
커튼과 살림살이를 사러 간 사로지니 마켓 역시 공사 중이었다. 그러나 삶은 위대했다. 시장 중심가를 파헤쳐 하수구가 드러났는데도 가게들은 문을 열었고 노점들은 덜 파헤쳐진 거리로 피해 물건을 팔고 있었다. 오래된 벽은 노점의 옷 진열대였고 골목 구석구석에서 흥정과 거래가 오갔다. 커튼 가게에서 우리 돈으로 6천원쯤 주고 분홍빛 커튼을 샀다. 면직산업이 발달한 나라답게 면제품이 많기도 많았고 저렴했다.

시장구경의 백미는 역시 음식이었다. 인도음식을 처음 맛본다는 기대감 속에 ‘도사’를 주문했다. 밀가루 안에 채소와 감자를 으깨 넣고 말아서 구운 것인데 아주 맛있었다. 이름을 기억하기 쉬웠던 탓에 여행하는 도시마다 도사를 시켜먹다 물려버렸지만 말이다.

단일하지 않은 인도

  코넛 플레이스. 식민지 시대에 지어진 대리석 건축물이 늘어선 코넛 플레이스에는 다국적 브랜드들이 입점해 있다.
델리 여행자들이 꼭 들른다는 중심가인 코넛 플레이스(Connaught Place) 역시 거대 공사장이었다. 숨을 쉴 수 없을 만큼 일어나는 흙먼지 속에서 우리는 영국 식민지 시대에 지었다는 대리석 건물들 사이를 걸었다. 100여년이 된 이 건물들에는 나이키, 리복, 아디다스 같은 다국적 브랜드들이 입점해 있었다.

우리가 일본의 식민 지배를 치욕처럼 여기는데 반해 내 인도 친구들은 영국 식민지 시대를 ‘영국 시대’라고 불렀다. 식민주의의 문제가 있지만, 단일 국가의 이름으로 소수 민족의 자치를 탄압했다는 점에서 식민지배와 인도 국가의 폭력이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한 친구는 어린 시절 인도 정부군의 폭격으로 학교가 파괴되고, 단짝 친구가 총격으로 죽는 경험을 하기도 했다. 단일국가로서 ‘인도의 독립’을 주장한 간디를 그가 존경할 수 만은 없는 이유다.

프레시안에 인도이야기를 연재한 이광수씨에 따르면 인도는 식민지가 될 때까지 ‘민족의식’이 형성되지 않았다고 한다. 무굴 제국 말기의 인도는 다양한 세력들의 집합장이었다. 인도를 하나로 지배한 영국시대를 거치고서야 ‘인도’라는 단일공동체 개념이 등장했다는 것이다.

내가 친분을 갖고 이야기를 나눈 인도친구들은 유독 인도의 동북쪽 나가랜드(NAGALAND)와 아쌈(ASSAM) 지역 출신들이 많았다. 티벳과 중국에 더 가까운 곳, 100년 전 차농사를 위해 중국에서 노동이민을 온 사람도 많은 지역이었다. 인도인이라면 오똑한 코와 큰 눈, 곱슬머리를 상상했지만 그들의 얼굴은 몽골리안인 우리와 더 비슷했다. 우리는 쌀밥과 매운탕처럼 생긴 생선찌개를 함께 먹었다. 유창하게 힌두어를 구사하는 친구의 애인은 중국인처럼 보였지만 인도인이었다. 그는 우리가 물건을 살 때마다 진지하고 정중하게 흥정을 해주었다. 인도는 그 역사만큼이나 오래되고, 넓은 지역만큼이나 다양한, 다인종 사회였다.

인도 국립대 델리대학가의 삶

  휴식을 취하는 한 릭샤꾼은 다리를 담벼락에 올려 피곤을 풀고 있다.
이 나라는 학교를 갈 때도 걸어가기엔 무리였다. 먼지와 열기 속에서 걷기보다는 결국 자전거릭샤나 오토릭샤를 탈 수 밖에 없었다. 두 사람, 때론 세사람씩 뒤에 태우고 자전거릭샤를 모는 사람들을 볼 때 차마 뒤에 타기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릭샤꾼이 힘겹게 손님을 태운 채 자전거를 끌고 언덕바지를 올라갈 때면 내리고 싶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금방 우리는 앉아 있는 편안함에 익숙해졌다. 델리대 근처를 산책하던 중 쉬고 있는 릭샤꾼을 만났다. 그의 쉬는 자세는 이 일의 힘겨움이 어떠할지 짐작케 했다.

인도 시민단체에서 활동하는 친구는 정부가 자전거를 가진 사람만이 릭샤꾼이 될 수 있도록 하는 법을 만들려 한다고 했다. 허가제로 안정성을 도모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가진 것이 몸뚱이뿐인 사람들은 자전거를 빌려서라도 릭샤꾼이 된단다. 친구는 가난한 사람들의 일자리가 없어지는 일이라며 법안을 반대하고 있었다. 한국인이지만 다시 태어나면 인도인으로 태어나겠다고 할 만큼 인도를 사랑하는 그녀의 신발은 사시사철 등산화였다. 슬리퍼로는 험한 거리를 걸으며 발을 보호할 수도, 오래 신을 수도 없기 때문이란다.

  델리대학가의 서점. 델리대학교 앞은 꽤 많은 서점이 자리 잡고 있고 노점도 많다.
델리대학교 앞 번화가에서 우리는 꽤 많은 수의 서점을 만났다. 우리 대학가 앞에서는 서점이 없어진다고 하는데 델리대학교 앞에는 여전히 서점들이 많았다. 책노점도 꽤 많았다. 인도인 친구는 꼭 읽어보라며 노점에서 책 한권을 사주었다. 친구는 노점에 있는 책 대부분이 복사본이라고 했다. 정품보다 훨씬 저렴하고 인쇄상태가 깨끗해 학생들이 애용한다고 한다. 인도의 책값은 우리나라 물가와 비교하면 저렴했다. 손바닥 크기의 콜린스판(Collins) 스페인어 사전을 3천원 정도에 샀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곳 물가를 감안하면 비싼 편이다. 복사본이 인기일 수밖에 없다.

델리대학교에 다니는 후배는 수시로 휴강이라며 학교에 갔다 그냥 돌아왔다. 학교는 기념일들마다 휴강을 했고, 교수와 학생들은 영연방경기대회를 반대하며 휴강을 했다. 내가 돌아온 후 열린 영연방경기대회 일정 때문에 또 휴강을 했다고 한다. 그래도 지독하게 공부하지 않으면 낙제를 면치 못한다며 과외까지 받으며 공부를 하고 있단다.

해발 2천 미터의 휴양지 쉼라

꼭 어디를 봐야겠다는 생각으로 간 여행은 아니었던 터라 여행책자를 뒤져 이 덥고 먼지나는 델리를 피해 쉴만한 곳을 찾았다. 많은 여행객들이 눈으로 막혀 갈 수 없는 고산지대 라다크에 들어갈 수 있는 시기라며 북쪽으로 떠났다. 나는 고산지대에 대비한 옷을 가져오지 않은데다 일정도 빠듯해 히말라야 서쪽, 영국시대 휴양지인 쉼라(Shimla)로 향했다.

  해발 2천 미터가 넘는 고산지대에 있는 쉼라로 가는 길

델리의 버스터미널 ‘카슈미르게이트’는 개보수되기 전의 시골버스터미널을 100개쯤 합쳐놓은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나라의 33배나 되는 넓은 지역에서 수도 델리로 오는 길목이지 않은가.

델리가 온통 공사장인 것이 불만이었지만 터미널이 좀 깨끗해졌으면 하는 바람도 있었다. 밤차를 타기 위해 터미널에 도착했을 때 카슈미르게이트는 낮보다도 붐비는 곳으로 변해 있었다. 예약할 때의 한산함과 달리 ‘지금 출발하는 표’를 사려는 사람들이 작은 매표소 창구마다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표를 가진 사람의 여유를 즐기며 터미널을 구경하던 우리 일행은 차시간이 되자 당황하고 말았다.

행선지의 ‘타는 곳’ 표시아래 당연히 차가 들어오는 버스터미널이 아니었다. 대형 주차장처럼 복잡한 버스터미널 속에 동서남북으로 갈 버스들이 엉켜 있었다. 여기저기서 행선지를 부르며 버스를 타라며 소리를 질렀고, 갈 곳의 버스를 찾아 짐을 들고 돌아다녔다. 우리 역시 쉼라행 버스를 찾아 10여분을 헤매야 했다. 버스를 놓칠까봐 얼마나 긴장했던지, 버스를 타자마다 일행 모두 기진해 버렸다.

  쉼라 풍경. 하늘에 더 가까운 도시 쉼라에는 호텔이 들어서면서 공사 중인 곳이 많다.
산길을 달리며 몇 번씩 귀가 먹먹해지는 경험을 하며 도착한 쉼라는 하늘에 더 가까웠다. 그리고 맑았다. 더 바랄나위 없이 맑디 맑은 하늘과 깨끗한 공기를 마시니 살 것 같았다. 쉼라는 해발 2천 미터가 넘는 고지대에 있다. 설악산보다 높은 곳에 건물을 짓고 사는 셈이다. 과연 히말라야 산맥 골짜기가 맞구나 싶었다. 쉼라 중심가는 말로드(Mall road)로 꼭대기의 교회를 기점으로 아래까지 쭉 뻗은 대로다. 그 사이에 ‘영국식’ 오래된 건물들이 즐비하다.

쉼라는 추웠다. 겹겹이 옷을 껴입어도 7월의 델리를 생각하고 가져간 옷들은 너무 얇았다. 결국 스웨터 가게에서 세일하는 모직스웨터를 만원에 사 입고야 덜덜 떠는 괴로움을 면할 수 있었다.

짜파티와 된장찌개

급격한 기온차로 일행은 감기에 걸린데다 물갈이를 막 시작해 향신료가 강한 인도 음식을 제대로 먹지도 못했다. 지독한 된장녀인 나는 5천원쯤 더 주고 숙소 부엌을 빌려 아픈 일행을 위해 된장찌개를 끓였다. 속이 아플 때 따뜻한 된장찌개가 약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뜻밖에도 주인과 일하는 청년은 된장냄새가 아주 맛있다고 했다. 부엌 창문을 통해 계곡에서 불어오는 맑은 산바람은 냄새도 금방 날려버렸다.

  짜파티를 만드는 청년. 우리가 묵었던 숙소의 부엌에서 짜파티를 만드는 것을 구경했다. 솜씨 좋은 청년은 순식간에 짜파티를 멋지게 만들었다.
그 부엌에서 청년이 짜파티 만드는 것을 구경했다. 반죽한 밀가루를 밀대로 몇 번 밀더니 금세 보름달 같은 원을 만들었다. 그대로 무쇠 후라이팬에 뒤집어가며 굽자 마술처럼 부풀어 오르며 짜파티가 완성되었다. 청년은 우리에게 따뜻한 차파티를 선물했다. 고맙게 받았지만 우린 그 짜파티를 절반도 먹지 못했다. 속이 아파서 밀가루 음식을 못 먹었던 것이다. 청년에겐 주변 버스여행을 가서 사온 사과를 한아름 선물했다.

우리가 쉼라에 간 첫날 지독하게 비가 내렸다. 비는 순식간에 쏟아 붓고 언제 그랬냐는 듯이 개었다. 그 잠깐 동안의 폭우로 전기가 나가고 따뜻한 물도 나오지 않았다. 문을 열고 나간 숙소 복도는 한강이 되어 있었다. 전기배선이 지나는 벽면에서 물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청년이 하수구를 열심히 뚫자 물은 빠져나갔다. 전기도 다시 들어왔다. 이 숙소를 청소하고 수리하고 요리하고 갖은 일을 다하는 청년은 주인이 아니었다.

원칙은 바꿀 수 있는 것

  사과 파는 여인. 쉼라의 버스투어 도중 마쇼브라농장에서 만난 사과를 파는 여인에게 사진을 찍자고 하자 그녀의 남편은 웃으라고 했다.
쉼라에서 버스여행을 하기로 했다. 이 버스여행이야말로 예측불허였다. 안내인은 굉장히 유명한 사과농장이라며 마쇼브라(Mashobra)에 우릴 데려갔다. 언덕 위에 나무 몇 그루가 보였고 그는 ‘마쇼브라 농장’이라고 했다. 다시 그곳을 지날 때 두 가족이 사과좌판을 벌여 놓고 있었다.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한 우리는 사과를 샀다. 사과의 붉은색과 어울리는 천연색 옷를 입고 사과를 파는 여인에게 사진을 찍어도 되는지 물었다. 여인은 알아듣지 못했고 대신 그녀의 남편이 말했다. “웃어, 웃어.” 여인은 어색하게 웃었다. 사진을 찍자고 한 나는 웃음을 강요하게 된 민망함에 어쩔 줄 모르며 서둘러 사진을 찍고 사과값을 치뤘다.

골프코스라는 곳을 산책한 후 우리는 ‘푸구밸리(Fugu Valley)’를 돌아볼 참이었다. 안내인은 하얀 안개가 가득한 어느 지점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곳이 푸구밸리인데 포그(fog, 안개)가 짙어서 갈 수 없다. 너희들은 지금 푸구밸리를 본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포그 가득한 푸구밸리를 뒤로 하고 돌아왔다. 그런데 버스 안에서 동행했던 벨기에인 커플은 한 시간이나 일찍 끝난 투어에 매우 실망이라며 여행사무소에 항의할 참이라고 했다. 나는 딱히 할 일도 없고 여행에 실망한 터라 함께 갔다.

‘뛰어난’ 영어실력의 벨기에인 남자는 정부 관리인 듯한 중년 남자에게 조목조목 따지고 들었다. 우리가 보지 못한 푸구밸리, 실망스럽기 그지없었던 농장, 시간에 쫓겨 제대로 하지도 못한 산책, 한 시간이나 일찍 끝난 여행, 안내인의 실망스러운 태도.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관리자는 ‘환불이란 없다’고 버텼다. 그러자 벨기에인은 “이것은 인도와 인도 정부의 수치이다.”라며 열변을 토했다. 급기야 관리는 백지를 내밀며 여행비의 절반을 환불받았다고 쓰고 사인을 하라고 했다. 가만히 팔짱을 끼고 근엄한 표정으로 있었던 우리 일행도 서명을 하고 돈을 받았다. 환불규정이 없다던 관리자는 원칙을 10여분 만에 바꿔버린 것이다. 인도는 예측불허인 것이다.

벨기에인들과 우리는 영어와 한국어로 번역된 똑같은 론리플래닛(Lonely Planet) 인도편을 마주들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그들은 밤차로 더 북쪽으로 떠났다.

일회용 쓰레기와 히말라야

해발 2천 미터 쉼라는 아름답지만 망가져가고 있었다. 세계의 지붕이라는 히말라야 계곡이 온통 개발 붐에 휩싸였기 때문이다. 쉼라로 가고 돌아오는 산길에서 우리는 무수히 많은 시멘트 건물들이 올라가는 것을 보았다. 중간 중간 휴게소가 있는 곳에서는 일회용 접시가 무수히 버려지고 있었다. 청정했을 어느 계곡에선 원숭이 한 마리가 쓰레기 더미 속에서 물을 마시고 있었다. 말하자면 우리의 지리산 계곡 곳곳에 호텔이 올라가고 노고단 휴게소에 쓰레기가 난무한 셈이다. 외식이 많은 인도에서 일회용 접시는 그렇게 계곡에 버려지고 있었다. 미국을 여행할 때 엄청난 일회용 용기들을 보며 도시전체가 쓰레기 산을 이루는 상상을 한 적이 있었다. 산업사회가 가져온 일회용의 편리한 생활방식은 내 상상을 눈앞의 현실로 가져오고 있었다.

이슬람 유적 속에 강화되는 힌두 근본주의

  타지마할. 타지마할을 비롯한 수많은 이슬람 유적으로 관광객이 끊이지 않는 인도지만 힌두 근본주의가 강화되고 있다.

인도를 가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타지마할을 비롯한 이슬람 유적을 구경하게 된다. 나 역시 그러했다. 인도의 마지막 왕조가 이슬람이었던 까닭에 이슬람 유적이 많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지금 인도는 종교의 자유가 있는 세속국가지만 힌두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슬람국가인 파키스탄과 또 다른 이슬람국가인 방글라데시, 힌두국가인 인도가 국경을 맞대고 있다.

힌두교의 성지인 바라나시로 향할 때 주황색 옷을 입은 수많은 사람들이 갠지스강을 향해 걷고 또 걷고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서울에서 부산거리를, 어떤 사람들은 그보다 먼 거리를 맨발로 걸어 성지를 향해 오고 있었다. 그들은 무거운 상자를 네 명, 혹은 여섯 명이 지고 있었는데 신께 기도하는 작은 사원 같은 것이었다. 아이부터 할아버지까지 그들의 행렬은 장관이었다.

  갠지스강의 기도. 매일 저녁 기도가 열리는 갠지스강에 수많은 힌두인들이 모여 기도하고 소원을 빈다.

인도인 친구는 그들이 입고 있는 주황색 옷이 ‘힌두오렌지색’이라고 했다. 그들만의 특별한 색이었다. 그들은 거리에서, 기차역에서, 버스 정류장에서 힌두오렌지 물결을 이루고 있었다. 사회학을 공부하는 인도인 친구는 최근 바라나시로 향하는 성지순례행렬이 급격히 늘었고 그들 가운데는 경제적, 신분적 소외계층이 많다고 했다. 그는 종교적 극단주의가 심화되는 것을 우려하고 있었다.

종교의 역할이 사람을 위안하는 것이라면, 힌두 역시 그러할 것이다. 사람들은 이번 생에서의 삶에 최선을 다해야 다음 생에서 더 좋은 삶을 가질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우리를 태워준 오토릭샤 기사는 우리에게 자신의 다음 생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했다.

인도를 떠나는 날, 공항까지 가는 길은 평소보다 배는 걸렸고 가까스로 비행시간을 맞출 수 있었다. 공항으로 향하는 차선 하나에 힌두오렌지색 물결이 끝없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경찰은 순례행렬을 위해 교통정리를 하고 있었고 군데군데 천막을 치고 순례자들에게 음식을 대접하고 공연을 하고 있었다. 하나의 종교가 도시 전체를 덮은 바라나시, 그 물결이 다시 전국으로 퍼져나가고 있는 것이다.

  갠지스강의 풍경


* 인도에 대한 좋은 이야기와 아름다운 사진들은 너무나 많다. 이 글은 나와 내 친구들의 느낌을 중심으로 주관적으로 써내려간 것으로 인도 보고서는 아님을 전제한다.
* 송옥진님은 새로운 일을 모색하고 있는 중입니다.
* 참고: 프레시안에 연재된 이광수의 “인도는 왜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는가?”
'인도사로 한국 사회를 논하다' <16>http://member.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40080714095543&Section=04)
* 방방곡곡99절절은 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가 기획연재하고 있습니다. www.glocalactivism.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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