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의 혁명을 위해 과거의 혁명을 사유하다

[신간안내] '문화/과학', 가을호(문화과학사, 2011)



월러스틴을 포함하여 세계체제론을 강조하는 거의 모든 연구자들이 향후 5-60년 사이에 자본주의 체제가 종언에 이를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다. 바꿔 말하면 오늘의 세계는 자본주의의 종언에 근접해가는 이행기이기는 하되, 그것을 창조적으로 지양하고 극복하는 혁명의 열기나 모델은 부재하는 극단의 시대라는 성격을 가질 확률도 높다. 역사상 모든 혁명과 대항혁명(반혁명)은 세계체제론의 관점에서 보자면, 헤게모니 패권국가의 흥기와 쇠락 속에서 전개되어 왔다.
현재의 상황을 보자면, 100여년 이상 지속되어 온 미국 헤게모니가 몰락하고 있지만, 그것을 대체할 만한 헤게모니 국가는 출현하지 않은 상태이고, 생각보다 이 상황은 오래 지속될 확률이 높다.

지오반니 아리기와 같이 중국 헤게모니를 논하는 논자들도 있지만, 중국의 패권주의로의 이행에는 중국이라는 국가 내부에 도사리고 있는 갈등의 뇌관들(민주주의와 양극화, 민족모순 등)이 생각보다 심각한 것이어서, 어쩌면 헤게모니 이행 자체가 일어나지 않는 기묘한 상황도 상정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명백하게 남는 가능성은 축적체제의 유지를 위한 국지적· 세계사적 의미에서의 국가 간 전쟁이나 그것의 역방향에서 대안체제를 둘러싼 혁명의 시대가 도래할 확률이 높은 것이다.

『문화/과학』은 지난 역사 속에서 인류가 관통해 온 혁명을 심각하게 음미하고 복기하면서, 우리가 직면하게 될 미래혁명의 가능성을 타진해 보고자 한다. 혁명이란 근본적으로 세계혁명을 의미하며, 오늘날 우리가 전지구적 상황에서 목격하고 있는 봉기, 투쟁, 항쟁 등은 그것이 단지 징후에 머물지 않고, 근본적인 세계의 전환과 급진적 재구성을 위한 혁명의 서막인지 모른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현재까지도 이 미래혁명의 주체, 방법, 가치와 형식이 명료하지 않다는 것과, 무엇보다도 혁명으로의 이행경로와 그 이후를 명료하게 제시할 수 있는 과감한 창안(poiesis) 능력을 우리가 발휘할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세계사의 진행과정을 복기해 보면, 세계혁명은 혁명적 상상력의 전파, 이에 대한 대중들의 내면화와 감정이입, 집합적 열정의 폭발을 통한 봉기로 나타났지만, 결과적으로 이것이 혁명지도세력의 보수화와 관료화에 따른 반혁명적 상황으로 귀결되었음을 알 수 있다. 부르주아 혁명도 사회주의 혁명도 새로운 지배그룹이 된 혁명엘리트와 대중 간의 비대칭성을 결코 극복하지는 못했다.

동시에 근대에 우리가 목격한 혁명이 자본주의적 생산양식과 교환양식을 근본적으로 지양했던 것도 아니다. 세계체제론이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일국적 차원에서 이것을 극복하고자 노력한다고 할지라도, 결국은 주변국에서의 반(반)혁명 또는 대항혁명에 기반한 전쟁상황 속에서, 도리어 네이션-스테이트 체제는 기묘하게 강화되고, 세계혁명의 이념은 말살되었던 것이다.

최근 들어 슬라보예 지젝은 러시아 혁명에서의 레닌으로 상징되는 전위당과 노동자, 농민, 병사 소비에트 등 기층인민들의 동시적 연합에 의한 결단주의 혁명의 이례성이야말로 마치 미래혁명의 일반모델인 것처럼 말하고 있고, 이것이 혁명적 상상력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많은 젊은이들에게 전율적 영감을 주는 것처럼도 보인다. 문제는 이 이례적인 결단주의 혁명이 설사 성공했다고 할지라도, 과연 ‘이행기’와 ‘혁명 이후’의 대안사회에 대한 체계적인 설계가 있었는가 하면, 차라리 그것은 반혁명으로서의 파시즘이 ‘반자본주의’의 대안을 더욱 구체적으로 그려냈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모든 역사적 파시즘은 강렬한 반자본주의 정서에 입각하여 대중을 동원하고, 특히 무엇보다도 금융체제(중앙은행)를 국유화함으로써,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대중들의 분노를 일시에 지도자나 국가환상으로 회수할 수 있었던 것이다.

때문에 『문화/과학』에서 제기하고자 하는 혁명의 상상은 혁명 엘리트와 대중 간의 비대칭성이 지양되고, 자본주의적 생산․교환양식의 급진적 변혁을 수반하며, 국가-자본으로 회수되지 않는 어소시에이션 또는 코뮌적 문화사회를 구성하는 전망과 관련된다.

혁명의 새로운 발상법, 주체형성의 문제, 문화정치학과 세대의 정치경제학으로 표명되었던 이 다채로운 논의는 궁극적으로는 새로운 미래혁명에 대한 촉구임과 동시에, 그것이 준비되지 않을 때 필연적으로 직면할 위험성인 파시즘과 전쟁, GNR로 상징되는 기술주의적 디스토피아에 대한 경고와 진단이었던 것이다.

이번 호의 <혁명의 계보학: 차이와 반복>을 통해서 우리는 ‘역사적 혁명’에 대한 상기와 ‘미래혁명’에 대한 창안을 동시적으로 밀고 나가고자 한다. 물론 헤게모니 정점에서 발생하는 중심부 국가의 혁명 형식과 헤게모니 이행기에 발생하는 반주변부 및 주변부 국가에서의 혁명은 유사하면서도 다르다. 동시에 과거의 세계사적 혁명과 오늘의 진행 중인 혁명의 징후는 ‘차이 속에서의 반복’과 ‘반복 속에서의 차이’를 미묘하게 보여주고 있다. 우리가 ‘혁명의 계보학’을 복기하는 것은 그간의 세계혁명에 대한 정교한 인식을 넘어선 ‘재인식’, 결단주의 혁명의 통념을 넘어서는 스마트한 혁명 패러다임의 대전환을 이론적으로 촉구하는 행위이다.

6편의 특집 글들은 3부로 나뉘어 각기 다른 시기에 다른 지역의 혁명을 다루고 있지만, 공통적인 특징은 혁명을 세계체제의 장기지속의 관점에서 이해해야 하며, 혁명 주체들의 자율적인 힘의 형성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먼저, 박윤덕의 「“헤게모니 투쟁”으로서의 프랑스 혁명」은 1789 프랑스 혁명의 세계사적인 의미를 월러스틴의 분석을 따라가면서 정리하고 있다. 필자는 프랑스 혁명을 재해석할 때, ‘귀족과 부르주아지 간의 관계’, ‘도시와 농촌의 민중 세력의 역할과 목표’, ‘자코뱅에 대한 해석’이 관건임을 지적한다. 프랑스 혁명의 가장 큰 의미는 민중계급들이 다른 유럽 국가들과는 달리 ‘귀족-부르주아지의 정치적 연합’을 굴복시킨 데 있다고 본다.

1905년 러시아 혁명을 다루고 있는 이득재의 글은 러시아 혁명의 기저에 내재했던 노동자계급들의 자율적 힘에 주목한다. 필자는 1905년 혁명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러시아 노동자들이 소비에트를 구성할 수 있었던 것을 그 노동자들의 코뮌 경험 덕택으로 보고 있다. 야간학교, 일요학교, 민중의 집, 노동자 클럽 등 기층 노동자계급들의 자기교육 운동들은 러시아 혁명의 조직적 근간이었던 소비에트와 공장위원회의 밑거름이 되었다. 민중들의 자율교육과 코뮌적 힘은 21세기 혁명에서도 중요한 조건이 될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가장 최근의 혁명적 사건 중의 하나인 68혁명을 세계체제론의 관점에서 재해석한 강내희는 68혁명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근대 자본주의 세계경제 축적순환의 형성과 해체라고 하는 세계-역사적 운동과 긴밀한 관련을 맺고 있고,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 또한 동일한 운동의 자장 안에 있기 때문으로 본다. 68혁명은 미국 헤게모니와 그것을 지탱하는 자유주의 이데올로기, 또 이 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하위 파트너 역할을 했던 현실사회주의, 그리고 민족주의의 자장 안에 있었던 제3세계 지배권력에 저항한 3중의 도전이었음을 상기시킨다. 필자는 68혁명이 자본주의의 자기개량화의 빌미를 제공해준 실패한 혁명이긴 하지만, 한편으로는 예술적 비판과 사회적 비판을 결합하여 자유주의, 사회주의, 민족주의 모두에 대한 저항으로서 자본주의에 맞서는 대안사회, 대안체제를 상상하게 만들었다는 점에 주목하자고 설득한다.

중국 문화대혁명의 역사적 종별성의 복잡함을 읽고자 하는 백승욱의 「중국 문화대혁명을 다시 사고한다」는 마오주의 입장에 있는 알랭 바디우와 맑스주의 입장에 있는 발리바르의 입장을 서로 대비하면서 중국 문화대혁명의 복잡성을 설명하고자 한다. 그가 보기에 ‘대중 스스로에 의한 해방적 정치’, ‘노동자 계급의 일체성’, ‘당-대중의 모순’, ‘대중에 대한 대중 자신의 관계’와 같은 중국 문화대혁명의 쟁점들은 현재의 혁명을 위해 구체적 분석의 영역으로 끌어와야 하는 것들이다.

라틴아메리카의 대표적 혁명인 쿠바와 베네수엘라의 혁명을 분석하는 「라틴아메리카: ‘종속’과 ‘배제’에서 ‘해방’(emancipation)의 혁명으로」에서 필자 안태환은 이 혁명들에서 탈서구적인 혁명의 상상을 배울 필요가 있음을 강조한다. 특히 2004년에 “미주자유무역협정”(ALCA)구상에 반대하기 위해 쿠바와 베네수엘라가 연대한 “미주민중을 위한 볼리바르대안협정”(ALBA)의 사례를 들면서, 유럽 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 새로운 대안적 사회관계와 연대를 중시하는 라틴아메리카의 혁명의 교훈들을 주목하자고 주장한다.


『문화/과학』 편집위원들의 토론을 문학평론가 이명원이 대표집필한 글 「미국 헤게모니의 쇠락과 21세기 혁명의 불가능한 가능성」은 특집의 총론 격에 해당되는 글이다. 편집위원들의 총론적인 이 토론 글은 세계체제의 장기지속 주기의 관점에서 최근의 금융경제 위기와 유럽 국가들의 경제원조 사태, 미국의 재정위기 사태, 그리고 이슬람 권역의 민주화 운동과 내부적 갈등을 조망해보면, 머지않아 국가-자본의 동맹세력과 전세계 민중들 사이의 전면적인 대립이 격화될 것이라는 점에 주목한다. 새로운 세계체제로 이행하는 과정에 무차별 전쟁과 통제를 통한 파시즘적인 새로운 지배 헤게모니가 등장할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민중들의 봉기가 현실화될 것인가의 상반된 전망은 현재 진보진영의 실천적 과제에 근본적인 문제를 던져준다. 토론 글은 최근의 전 지구적 금융위기와 미국 헤게모니 하락 문제들을 분석하면서 민주주의 급진적 재구성을 위한 다양한 운동을 펼칠 것을 주문하고 있다.

목차


특집1_ 중심부 혁명
“헤게모니 투쟁”으로서의 프랑스 혁명ㆍ박윤덕
러시아 혁명ㆍ이득재
근대 세계체계에 대한 68혁명의 도전과 그 현재적 의미ㆍ강내희

특집2_ 주변부/반주변부 혁명
중국 문화대혁명을 다시 사고한다ㆍ백승욱
라틴아메리카: ‘종속’과 ‘배제’에서 ‘해방’(emancipation)의 혁명으로ㆍ안태환

특집3_ 다가올 21세기 혁명
미국 헤게모니의 쇠락과 21세기 혁명의 불가능한 가능성ㆍ『문화/과학』편집위원회 (대표집필 이명원)

문화비평
우리 도시 속 이방공간_김성홍
‘포스트 인디’? 인디의 어떤 시도들_최지선

사회운동
대학교육 혁신을 위한 대학체제 개편안 ―교양과정 후 공동학위제ㆍ강남훈
연석회의, ‘진보대통합’ 그리고 진보좌파의 정치 ―‘반자본주의 코뮌정치’의 구성ㆍ이광일

문화현실분석
미디어의 신체화와 호모 사이버네티쿠스의 탄생ㆍ신현우

정세
우리에게 더 많은 두리반을: 현재 진행중이다. 즐겁고 미친 투쟁 _ 유지완

주제서평
그토록 많은 ‘소금꽃나무’들의 이야기 ― 유경숙 엮음, 『나, 여성노동자』_정정훈
박정희체제는 비판되고 있는가? ― 이광일, 『박정희체제, 자유주의적 비판 뛰어넘기』_이철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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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 , 반자본주의 , 이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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