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접정치와 새로운 민주주의의 미래

[새책] 『추첨민주주의』(어니스트 칼렌바크·마이클 필립스, 이매진, 2011)

민주주의는 갑을관계가 아니다. 누가 누구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며 그럴 수도 없다. 그것은 민주주의가 자기스스로 통치하는 체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근대 민주주의는 선거를 통해서 소수가 지배하는 간접 민주주의 방식을 택했다. 물론 부르주아지들이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근거하여 채택한 통치전략인 것이다. 노동자 권력의 창출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기위한 기제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의회민주주의는 불평등하고 비민주적인 제도라고 이미 평가가 끝났다. 소수의 대표들이 대중들의 요구를 수렴하지 않고 대중들의 권리를 위임한다는 것도 말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루소의 입을 빌려서 말하면 한국의 유권자들은 4년 중 선거운동 기간인 ‘14일’만 국회의원으로부터 인간적인 대접을 받고 나머지 3년 351일은 배제된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선거는 민주주의의 꽃이 아니라 부르주아지의 꽃이다. 우리가 초등학교때 배운 선거의 4원칙인 보통선거, 평등 선거, 직접선거, 비밀선거 조차 제대로 준수된 적이 있는가.

이런 상황에서는 선거 자체가 무의하다고 볼 수도 있다. 그래서 우리는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인 아테네의 직접민주주의를 배우면서 그 교훈과 의미를 꼼꼼하게 살펴본다. 불평등한 제도였지만 지금의 의회민주주의보다 나은 점들은 역사적 평가로 계승되고 있다.

아테네에는 여성, 노예, 외국인을 제외한 20세 이상의 모든 시민들이 참여하는 민회가 있었다. 이 민회는 아테네의 핵심적 주권 기구로서 1년에 40회 이상 모였으며, 정족수는 6,000명이었다. 민회의 대의체로서 400인회 또는500인회로 알려진 보울레(boule)가 있는데, 민회가 안건을 심의하고 의결하기에는 너무 큰 기구였기 때문에 보울레가 민회의 집행위원화 겸 운영위원회 구실을 했다.

보울레에 참여하는 사람은 아테네의 10개 부족에서 추첨으로 선발했고, 임기 중에는 급료를 지불했다. 상임의장 역시 10개 부족에서 추첨을 거쳐 윤번제로 맡았다. 스위스가 현재 내각 수반을 윤번제로 해서 각 각료들이 돌아가면서 맡게 되어 있다. 또한 보울레의 구성원이 되기 위해서는 엄격한 심사과정을 거쳤는데, 부적격자로 판명된 경우라도 시민들이 추첨을 통해 선택된다면 두 번째 임기까지는 수행할 수 있었다. 여기서 우리는 아테네를 통해서 직접 민주주의와 대의제 그리고 추첨제 등이 혼합되어 있는 것을 목격할 수 있다.

『추첨민주주의』가 내놓는 대안은 ‘추첨을 통한 의회 권력의 창출’이다. 절반에 못 미치는 투표율, 만연한 부정부패, 민의의 왜곡 등 대의 민주주의와 선거의 위기를 지켜보던 저자들은 ‘추첨 민주주의(Sortition Democracy)’라는 획기적인 제안을 한다.

추첨 민주주의는 아테네에서 뿐만 아니라 고대 로마, 베네치아, 피렌체, 스위스, 바스크족 공동체 등에서 역사상 다양한 형태로 운용됐으며, 시민 배심이나 공론 조사 등 영미권의 배심제에서도 흔적을 찾을 수 있다. 특히 2006년 캐나다의 온타리오 주는 추첨으로 만든 시민 총회를 운용해 오늘날 추첨제가 상상이 아니라 현실이 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줬다.

특히 저자들은 추첨제가 자본과 권력으로부터 자유롭기 때문에 효율성을 기할 수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 덧붙여 역자들은 확률표집 같은 통계적 방식을 사용하면 추첨제도 과학적인 방식으로 운용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면서 국민의 의사가 반영될 수 있고, 선발과정의 민주성과 대표성을 보장할 수 있고, 각 정당과 정파사이의 경쟁을 유도할 수 있기 때문에 도입할 가치가 있다고 한다.

그러면서 국민들의 정치적 관심과 참여가 전제되어야 하기 때문에 시기상조를 얘기하고 있다. 충분한 연구와 국민적 합의가 형성된다면 도입가능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다소 식상한 주제이지만 읽다보면 흥미가 쏠쏠하다.

“국민이 정치에 관심을 두지 않는 이유는 오히려 정치‘꾼’들에 보내던 신뢰가 사라졌기 때문이고, 스스로 그런 현실을 바꿀 제도적 경로가 존재하기 않기 때문이다. 냉소는 자신도 어쩔 수 없는 구조적 한계에 직면해 나타나는 자연스런 반응이다. 그러나 직접 정치에 참여해서 자신이 느끼는 문제를 바꿀 수 있다는 확신이 생긴다면, 정치에 관한 관심을 자연스레 높아질 수 있다.”(132쪽)

한국의 경우 정치에 대한 관심은 직접적인 참여를 통해 구조적인 변화가능성이 발견돼야 증가할 것이다.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대변해 줄 정당이 존재한다면 관심도 증가할 것이다. 안보이데올로기와 지역주의 같은 강한 규정력을 지니는 이데올로기가 사라져야 할 것이다. 학벌없는 사회가 온다면 더 좋겠다. 결국 민주주의는 제도의 문제가 핵심이 아니다. 구조의 변화를 위한 다양한 역동적인 변화가 수반되어야 할 것이다.

차 례

1장 건국자들의 이상 19
국민의 뜻을 있는 그대로 반영하는 의회 | 대표하지 못하고 부패만 촉진하는 선거 제도

2장 더 나은 모델 — 아테네 민주주의 31
추첨으로 하는 선택 | 과학적으로 신뢰할 만한 직접 대표제 | 선택된 국민의 축소판

3장 추첨으로 의원을 뽑다 44
정치 의제를 형성하는 새로운 방식 | 하원과 상원 사이의 차이를 회복하다 | 의회 자체 조직의 발전 | 좀더 나은 공공복지의 발전 | 전체 국민과 동등한 가치를 지니는 의회 | 최소한 지금의 의회만큼은 유능한 추첨 의회 | 지금처럼 쉽게 조종당하지 않는 의회 | 지금보다 덜 부패한 의회 | 참석하지 않을 때도 대표될 수 있는 의원들

4장 다른 대안들 72
선거 운동 자금을 개혁하라 | 국민발안제 | 전자 민주주의

5장 추첨 민주주의의 또 다른 이익 82
세금 절약 | 선택된 의원들의 신명 | 사회 구성원 사이의 협력 증진 | 공화국의 강화 | 권력 균형의 유지 | 각 주와 정당의 이해를 대표하는 상원의 공존 | 새로운 문제에 신속하게 대응하기 | 시민 의식의 회복

6장 대안의 실천 102
주에서 시작하는 실천

보론 1 선거를 넘어 추첨 민주주의로 — 추첨으로 창출하는 위임 권력 손우정 111
보론 2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와 추첨 민주주의 — 새로운 민주주의 모델을 꿈꾸며 이지문 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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