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금융위기, 역사의 갈림길에 선 유럽

[기사로 풀어보는 경제](9) 다른 듯 같은 듯, 반복되는 금융위기의 늪

늪에 떠있는 뗏목, 계속 노를 저어보지만 더욱 가라않을 뿐. 한 명씩 한 명씩 차례차례 늪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다. 이제 누군가 밧줄을 던져주어야 하는데 아무도 없다니! 아직 뗏목 위에 있는 사람은 늪에 빠져 목까지 차올라 숨이 넘어가는 사람에게 모두 죽는다고 붙잡지 말라 외치고 있다. 어차피 이제 곧 모두 늪으로 가라 앉을 목숨인데 말이다.


스페인의 은행위기와 대차대조표의 붕괴

얼마 전 그리스 총선에서 벌어졌던 정치지형의 격변과 경제위기논쟁이 이제 스페인으로 옮겨 붙고 있습니다. 올해 초 유럽중앙은행의 정책적 개입(3년 장기대출 프로그램 LTRO)으로 유로존 역내 은행들이 간신히 신용위기를 넘겼는데, 다시 스페인 은행부실이 심화되면서 추가구제금융 및 유로본드(유로존 단일채권) 도입을 둘러싼 논쟁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리스가 정부부채 문제로 인한 국가채무 위기라면, 스페인은 은행대출자산의 부실로 인한 은행위기입니다. 만약 스페인 정부가 은행부실을 모두 떠맡게 된다면 곧 국가채무 위기로 발전하겠죠.


사건 1. 결국 ‘또 다른 뇌관’ 스페인도 터지나?, 스페인 총리 “심각한 상황” 인정, 부실은행에 공적자금투입 전망, 10년 만기 국채금리도 급등 6.47% 구제금융 위험선 7%에 접근, 전문가들 “구제금융신청 불가피” - 헤럴드경제 2012.05.29.

사건 2. 스페인 은행권 우려 확산, 추가 구제금융설 ‘솔솔’, 스페인 3대 은행 방키아 사상 최대 190억 유로(28조원) 구제금융, 주가-국채값 급락, “은행 두 곳에 300-350억 유로 더 투입” 루머도, 라호이 총리 “구제금융 요청 없다” 재차 강조 – 이데일리 2012.05.29


그동안 은행의 대차대조표에 숨겨져 있던 대출자산의 부실들이 하나 둘씩 모습을 드러내면서 대차대조표 상의 균형을 붕괴시키고 있습니다. 부실 규모가 제대로 밝혀지면 오히려 긴급처방이 쉬울 수도 있겠지만, 대출자산의 시간대가 넓게 분포하다 보니 시간이 지나면서 생각지도 못한 추가부실이 곳곳에서 속출하고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 계속된 경기침체와 실업사태가 부동산 버블의 후유증을 더욱 심화시키고 있고, 부동산 버블을 주도한 지방정부의 재정난이 갈수록 심각해지다 보니 갑자기 중앙정부가 이 모두를 감당하기 너무 벅찬 상태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스페인 경제의 20%를 차지하는 카탈루냐 지방정부마저 올해 130억 유로에 달하는 부채차환을 중앙정부에 지원해달라고 요청하였는데, 이와 같은 지방정부의 연내 차환규모가 300억 유로임을 볼 때, 구제금융 요청은 불가피하다는 것이 대체적인 견해입니다.


사건 3. 스페인 ‘뱅크런’ 확산...불안 심리 고조 – SBS 2012.05.18

사건 4. 독일 사상 첫 제로 금리 국채 발행 - 한국일보 2012.05.23


그동안 스페인의 중앙정부의 채무가 GDP 대비 66%정도의 양호한 편이라고 알려졌지만, 민간부문과 지방정부의 부실이 급속히 증가하면서 결국 국가채무위기로 발전하고 있는 상황을 목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미 30일 현재 10년 만기 국채금리가 6.7%에 도달하여 민간금융시장에서는 자체적인 자금조달을 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점점 자금도피 현상이 심해지고 ‘소프트 뱅크런’ 현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독일이 장기국채금리를 0%에 발행했다는 뉴스가 의미하는 바는 그만큼 금융위기 국가에서 자금도피 현상이 벌어져 안전자산이라 일컬어지는 독일국채로 자금이 몰렸다는 걸 의미합니다.

같은 통화를 사용하면서 어찌 이런 불균형이 일어날 수 있나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사실 화폐를 통합했기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같은 돈인데 스페인에 있으나 독일에 있으나 마찬가지거든요. 금융위기가 회자되었던 남유럽국가로부터의 자금도피 현상은 2008년 금융위기 이후로 수년째 진행되고 있던 현상입니다.


다른 듯 같은 듯 반복되는 금융위기의 늪

스페인 위기를 보고 있자면 미국의 2008년 서브프라임 사태가 떠오릅니다. 2007부터 시작된 부동산 버블붕괴 이후, 계속되는 금융기관들의 누적된 몰락이 2008년 9월 리만브러더스 파산을 계기로 폭발하여 전 세계를 뒤흔들었던 미증유의 그 사건 말이죠. 차이점이 있다면, 2008년 금융위기는 부동산 대출자산을 기초로 한 파생금융상품들이 연쇄적인 부실을 일으켜 생각지도 못한 금융버블을 터트린 것이지만, 스페인의 은행위기는 대출자산 그 자체가 부실화되어 나타나는 은행위기입니다. 즉 은행의 대차대조표의 붕괴입니다.

우리나라도 최근 2년 동안, 자산 규모 1위의 ‘솔로몬 저축은행’을 비롯한 십여 개의 저축은행들이 부동산 경기침체로 인한 부실대출의 폭증으로 인해 파산하였습니다. 그런데 현재 스페인에서 벌어지는 은행위기는 이런 저축은행 수준의 파산이 아니라 마치 국민은행이나 우리은행과 같은 국내 대형은행이 파산하는 정도의 규모입니다. 우리가 97년 IMF 외환위기 때 시중은행들이 파산했던 걸 떠올리면 쉬울 것 같습니다.

문제는 우리도 그러했듯이 국가가 자금도피 현상을 통제하고 긴급자금 투입으로 사태를 진정시켜야 하는데 스페인의 경우 그게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는데 있습니다. 바로 유로존으로 통합되어 있어 화폐발행이나 통화정책이 모두 유럽중앙은행(ECB)에 맡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신재정협약에 따라 정부채무를 줄여야 하는 상황에서 대규모의 공적자금 투입도 어렵다 보니 자국 수준에서 해결할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사건 5. 스페인 “자국은행 방키아에 현금 대신 국채 투입 검토” - 한국경제 2012.05.29.

그래서 스페인 정부는 현금 대신 국채를 투입하는 꼼수(?)를 검토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구제금융 대상인 은행에 국채를 주고 정부는 주식을 받습니다. 그리고 그 부실은행은 그 국채를 담보로 유럽중앙은행에서 돈을 빌리는 거죠. 앞서 언급한 유럽중앙은행의 장기대출 프로그램이라는 것이 국채를 담보로 역내 은행들에게 낯은 이자로 대출해주는 것이거든요.

스페인 정부는 그 동안 은행구조조정기금(FROB) 자금에서 148억 유로를 사용했는데 잔액이 53억 유로에 불과합니다. 방키아에 대한 190억 유로의 구제금융을 하기에 너무나도 턱없이 모자란 금액이죠. 부실은행이 이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기에 사태는 더욱 심각한 것입니다. 결국 유럽중앙은행의 자금만이 부실은행을 구제할 유일한 방법인 셈입니다. 이걸 두고 ‘파이낼셜 타임즈’ 에서는 “스페인이 ECB자금을 자국 은행을 구하는데 이용하겠다는 발상에 놀라고 있다” 며 “ECB가 격분할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유럽화폐통합의 진정한 의미와 유로공동채권

그런데 여기서 다시한번 곱씹어 봅시다. 유럽중앙은행의 자금을 사용하는 것이 과연 격분할 문제인지 말이죠. 은행파산으로 발생할 신용위기가 뱅크런을 불러일으킬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최종대부자 역할을 해야 할 중앙은행의 역할은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그림에서 보시다시피 스페인의 대외 채무구조의 악화로 인해 가장 먼저 피해를 보는 나라는 프랑스와 독일이며, 이는 사실상 유로존의 공멸과 해체로 가는 직행열차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아슬아슬한 살얼음판 위에서조차도 유럽 정상들 간의 모임(23일 EU정상회의)이 의미있는 합력을 못 만들고 있는 상황이기에, 마지막 소방수의 역할은 유럽중앙은행 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미 자국 화폐를 포기하고 단일화폐를 사용한다는 것은 자국의 화폐주권을 유럽중앙은행에 양도하였음을 의미하죠. 그건 또한 유럽중앙은행이 지금과 같은 역내 은행위기에 적극 대응하여 신용경색을 막고 화폐가치를 보존해야할 의무를 갖는 것이기도 합니다. 만약 위기 시 중앙은행이 손 놓고 있는 다면 애초부터 단일화폐를 만들고 자국의 화폐주권을 포기할 이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만약 <파이낼셜 타임즈>가 더 큰 위기를 지적할 것이었으면, 유럽중앙은행의 대차대조표의 위기를 지적해야겠죠. 2008년 금융위기부터 시작된 역내 은행들에게 긴급자금을 수혈하느라, 그리고 재정위기를 겪고 있는 국가들의 국채위기를 해소하기 위해 국채를 대량으로 사들이느라 유럽중앙은행의 대차대조표 상의 위기는 심화되고 있습니다.


사건 6. 유럽중앙은행(ECB), 지난해 하반기부터 대차대조표 급팽창 3조 유로 돌파... 미국 연준(FRB)보다 33%, 독일 GDP 규모보다 30% 많아 - 아시아경제 2012.03.07.

만약 그리스가 디폴트를 하고 스페인마저 위기가 폭발하면 자산부실로 인한 유럽중앙은행의 대차대조표는 붕괴될 것이고 유로화 탈출로 인해 전세계적인 쓰나미급 금융위기가 재발할 것입니다. 아마도 이런 일이 벌어지기 전에 긴급조치를 취할텐데요. 그래서 결국 유로공동채권 발행만이 해답이라고 전문가들은 제시합니다.


사건 7. EU 정상회의 독일-프랑스 양보 없는 ‘유로본드’ 결투, 올랑드 “더 허비할 시간 없다” VS 메르켈 “유럽통합조약 위반” - 한국경제 2012.05.24

하지만 2년 전 부터 꾸준히 제기되어온 유로존 공동채권 발행 논쟁은 여전히도 평행선을 달리고 있습니다. 얼마전 EU 정상회의에서 새로 출범한 프랑스의 올랑드 정부가 성장정책으로의 전환을 주창하면서 유로본드 발행을 강하게 들고 나왔는데요. 대부분의 남유럽 국가들과 오스트리아, 벨기에 등이 이에 동조하였지만, 긴축정책을 고집하는 독일을 중심으로 네덜란드, 핀란드 등이 공동채권 발행에 반대하는 상황이 벌어진 것입니다. 누가 비용부담을 더 하느냐를 두고 서로 이해관계에 얽힌 논쟁이 끝없이 반복되고 있는 것이죠.


이후 전망 - 아직도 요원한 근본적 해법

아마도 스페인의 은행위기는 유럽중앙은행의 적극적인 개입으로 단기적 해법을 찾을 것이라 봅니다. 그렇지 않으면 신용위기에 따른 자본도피가 심해지면서 금융시스템 자체가 붕괴하는 최악의 상황이 벌어질테니까요. 하지만 지난 1월 ‘3년 장기대출 프로그램’을 활용한 긴급처방 이후 불과 4개월 만에 다시 불거진 이번 위기는 반복되는 금융위기의 근본적 해법이 얼마나 요원한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유로존 역내 무역의 불균형을 치유하지 못한 채, 화폐통합의 달콤한 과실만을 누려온 유럽은 이제 진정으로 유럽통합이 무엇인지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을 수 없는 시점에 와 있습니다. 자본이동의 효율성만을 강조하는 경제논리에 갇히지 않은 채, 정치/사회 통합까지 생각을 확장할 때만이 근본적인 해법이 나올 수 있을 것입니다. 역사적 갈림길에 서 있는 유럽의 선택이 무엇일지, 저는 이제 그 선택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것이 쓸데없는 기우일지 여러분도 함께 진지하게 고민해 보길 부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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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위기 , 경제위기 , 스페인 , 국가부채 , 유로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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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희영

    훌륭한 글입니다. 고맙습니다

  • 이명준

    신희영 님/ 감사합니다. 중간에 피켓든 남자의 멘트를 해석하느라 스페인어까지 공부했답니다.. 사진 저작권 때문에 싣지는 못했지만요..^^ 저도 글쓰면서 많이 배우는 거 같아요. 님들에게 도움도 되고 저에게도 공부도 되고...글을 연재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더욱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 독자

    참세상에 간만에 보고 싶은 글들이 올라오네요.ㅋㅋ 예전에 국제기사쓰시던 국제현장통신 그 분 글이 없어서 참세상이 재미없었는데... 고맙습니다.

  • 이명준

    독자님/ 재밌게 읽어주신다니 기쁘네요~^^일주일에 한번씩 만나뵐 수 있도록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 김은주

    궁금했던 부분, 쉽게 잘 이해할 수 있게 써주셔서 고맙습니다^^

  • 이명준

    김은주 님/ ^^감사~ 이해를 돕기 위해선 그림이 짱이더라구요. 외국 신문들을 바로 카피할 순 없고 해서 한글에서 편집과 각색을 하는데 그게 좀 시간이 걸리는 작업입니다. 그래도 마치 논문쓰듯 주저리 주거리 쓰는 것 보다 훨 나은 것 같아요. 우리나라 언론사에서 만든 그래픽들도 괜찮게 많은데 저작권 시비가 있어서 함부로 사용할 수가 없더군요 ㅋㅋ

  • 호호호

    결국 그리스는 유로존에서 탈퇴해야 할듯 하고..(현상태로는 수출이고 뭐고 답이 없으니) 스페인도 어렵다면 잘라내려나요?..한 대여섯 국가만 유로에 남고 탈퇴하는게 답일듯...애초에 경제력이 넘사벽인 국가들이 통화주권 포기하고 유로존 들어가는게 문제인듯..

  • 까르르

    유럽의 경제 위기에 대해 알기 쉽게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항상 즐겨보고 있습니다. 건필하세요!!!

  • 이명준

    까르르 님/ 즐겨보신다니 감사합니다~^^ 요즘 국제경제면 기사를 가득메우고 있는 사안이라 많은 분들이 관심있게 봐주시는 것 같습니다. 다음 글도 이와 연동된 주제인데요. 우리나라에서 이 문제를 다루는 시각들이 이념적으로 왜곡되어 있는 것 같아서 이를 짚어보려고 합니다. 현재 자료조사는 대강 했구요. 글이 정리되면 곧 만나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