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틀거려본 사람은 알지

[명숙의 무비,무브](9) <백야>와 씻김굿

하얀 밤, 아파본 사람은 알지. 비틀거려본 사람은 하얀 밤을 알지. 그 밤이 정말 머리를 하얗게 만들 정도로, 잠을 잘 수 없을 정도로 밤을 밝혀놓는다는 것을... 그러한 밤을 함께 보낸 게이 두 명의 이야기가 영화 <백야>다.

사실 백야라는 말만 들으면 두 가지의 상반된 이미지가 연상된다. 화려하거나 번민으로 가득하거나... 전자가 밤에도 환한 북유럽의 밤을 떠올리는 것이라면, 후자는 방황과 번민으로 얼룩진 우울한 밤을 떠올리게 된다. 물론 나에게 백야란 후자의 이미지가 강하다. 아마도 몇 년 전에 본 일본드라마 <백야>의 인상이 너무나 강했기 때문이리라. 우울한 시절을 함께한 청춘들의 욕망과 삶이 강하게 남은 일본드라마 <백야>는 밝지만 볼 수 없어 괴로운 태양 같았다. 이송희일 감독의 <백야>의 분위기는 비슷하지만 달랐다. 비극적이지 않은 결말이, 현실에서 있음직한 사건들 때문인지, 바다에 뜨는 붉은 월출 같은 느낌이 담겨 있어 창백하지도 뜨겁지도 않았다.

[출처: <백야> 공식 블로그]

잊을 수 없는 눈빛과 관계의 미장센

영화의 배경은 밤부터 새벽까지라서 영상은 어두웠고, 어둠은 상처를 간직한 주인공 원규의 내면을 상징하기도 한다. 게다가 원규의 우울한 표정, 무표정한 표정이 영화의 우울한 정조를 완성한다. 특히 원규역을 맡은 원태희의 눈빛 연기는 몇 마디 대사 없이도 그가 얼마나 괴로운지, 외로운지 읽을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원규의 처지를 드러내는 주옥같은 대사가 많은 게 영화의 흠이기도 하다.) 그가 텔레비전을 켜놓은 채 눈물을 흘리는 장면은 너무나 처절하다. 그가 풍기는 그런 외로움이 자꾸 태준의 마음을 잡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둘의 관계를 드러내는 것은 ‘거리’다. 그 둘은 섹스를 시도할 때를 빼놓고는 언제나 거리를 유지한다. 완전히 밀착하지 않는다. 아니 못한다. 태준의 오토바이에 다가가는 원규 사이에 놓인 거리, 복수를 위해 뛰어가는 원규를 잡으러 뛰어가는 태준. 이것은 그들이 손을 맞잡은 관계가 아니라는 것, 그들의 불확실한 관계를 드러내는 것들이다. 물론 이 불확실함이 영화의 매력이기도 하다.

둘의 관계를 드러내는 미장센 외에도 이 영화는 미장센이 많다. 태준이 원규에게 돌아갈까 멈춰서서 바라본 거리도 갈림길이나, 둘이 처음 만나 번섹(번개섹스)를 하려고 한 화장실도 그렇다. 전자가 태준의 갈등과 선택을 직접적으로 보여준다면, 화장실은 변화하는 공간으로써 위치 짓는다. 첫 만남의 우울함, 비관계(관계 맺지 않는 섹스)의 공간이었던 화장실이 마지막 부분에서 둘이 서로에 대한 어렴풋한 신뢰와 애정을 느끼며 섹스를 할 때, 그곳은 둘이 관계 맺는 ‘장소’로 변화한다. 그냥 외로움을 떼우는 섹스를 하던 공간이, 함께 하얀 밤을 보낸 ‘그’와의 기억의 장소로, 짓눌렀던 고통에서 풀려나던 기억의 장소로, 너무나 다른 ‘그’에게 호감을 느끼고 표현했던 장소로 변화한다. 태준은 말한다. “우리, 그래도 진짜였지?” 영속적이지는 않지만 둘은 진짜 관계를 맺는다. 그래서인지 마지막 화장실에서의 섹스장면은 섹슈얼하기보다는 둘의 관계에 대한 믿음의 수행에 가깝게 느껴진다.

둘의 관계 때문인지, 영화<중경삼림>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첫 부분의 뿌연 담배연기가 있는 술집에 나타난 선글라스 낀 임청하의 강렬한 이미지가 밝지만 어둠을 보여주고, 금성무가 임청하와의 스쳐가는 인연에서 발견한 기억과 추억의 무게는 무겁지도 들뜨지도 않았기에 연상되었나보다. 우울함과 복수, “가장 가까이 스쳤던 순간이 존재하는” 우연한 만남... 다르지만 비슷하다.

우울한 종로의 기억

둘의 만남과 관계맺음은 원규의 상처로부터 시작된다. 원규는 몇 년 전 종로에서 당한 호모포비아(동성애 혐오자)의 폭행으로 아웃팅 당하고, 가족들에게도 버림받고 한국에서 살수조차 없다. 원규의 말대로, 그는 여행가방을 들고 세계를 ‘떠도는 난민’, 추방당한 자이다. 드르럭거리는 여행가방 끄는 소리는 그의 절규이기도 하다. 그런 그가 자신과 자신의 애인을 폭행한 그들이 아직도(물론 그들은 법적 처벌은 받았다.) 버젓이 종로에 있는 현실을 볼 수 없어 복수를 하기 위해 잠시 한국에 들렀다. 그리고 그 시간을 혼자서는 보내기 어려워 채팅으로 만난 태준과 하룻밤을 보내려 하지만 그조차도 쉽지 않다. 번번히 미끄러져 가는 둘의 관계는 태준이 원규에게 다가가면서, 쫓아가면서, 그리고 원규가 태준을 말과 다르게 붙잡으면서 둘은 ‘진짜 밤’을 보낸다. 태준과 원규는 직업도, 더러운 세상에 마주하는 법도 다르다. 태준은 원규가 자신의 삶을 헝클어뜨린 그들에게 복수할 때 함께 싸운다. 연민도 아니고 아직 사랑도 아니다. 원규 혼자서는 싸우기에는 역부족이라는 것을 알기에, 그렇다고 포기할 원규가 아니라는 것도 알기에 그는 머뭇거리다 같이 싸운다.

사실 종로에서 호모포비아들의 게이에 대한 폭력과 구타는 실제 있었던 사건으로 언론에도 보도되기도 했다. 하지만 폭행을 당한 그들이 어떤 상처가 있었는지, 그 후 어떻게 삶이 변하게 되었는지 알려진 것은 없다. 다만 짐작할 뿐이다. 그래서일까? 원규의 고통이 너무나 잘 다가오고, 현실적이다. 상처가 아리다.

동성애 혐오가 동성애자의 존재를 거부하는 타자화, 의사소통 거부, 이성애중심적인 사회구조와 문화에서 시작되지만 범죄(폭력행사)로까지 이어지는 데는 그리 멀지는 않다. 사실 종이 한 장 차이인지도 모른다. 이미 쳐진 벽이 공기를 차단하기까지는 어려운 일이 아니니까. 경제 위기로 동성애자를 비롯한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혐오범죄가 늘어가던 경험을 떠올리면, 이는 ‘원규’만의 고통이거나 사건이 아니다.

고통에 마주하는 법, 고통의 시간을 바꾸는 ‘씻김굿’

그런데 이 영화는 고통의 시간이 위로받는 시간으로 바뀌는 데는 사람과 사건이 존재한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원규의 고통은 소극적이지만 가해자들에게 사적인 폭력을 행함으로써 씻겨 진다. 물론 혼자 했으면 그것은 행위의 목적성도 달성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씻김의 기능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함께 했기에 씻김굿이 될 수 있었고, 씻김굿에 함께 한 태준이 있기에 ‘위로’ 가 될 수 있었다.

한국에서 동성애자로 산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니 원규나 태준 모두, 더럽고 치사한 일을 많이 겪었겠지만 둘이 고통에 마주하는 법은 다르다. 태준은 한국사회에 존재하는 호모포비아들의 차별과 폭력에 진저리치지만 맞서지도 않고 떠나지도 않는다. 태준은 말한다. “난 시궁창이더라도 떠나지 않고 이곳에서 구르겠다”고. 그에 반해 원규는 한국에 있을 수가 없다. 그래서 그는 괴롭고 외롭다. 하지만 그는 태준과 함께한 시간과 사건으로부터 위로받았다. 그래서 아침이면 다시 한국을 떠나지만, 언제 돌아올지 기약도 없지만 원규와 공유한 시간으로부터 ‘위로’를 받았으니 그의 삶은 달라질 것이다. 멈춰진 고통의 시간으로부터 탈주하기 시작한 그를 축복하듯이 하얀 눈이 내린다.

[출처: <백야> 공식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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