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부에 강탈된 이집트혁명 3년...“무르시 다음은 알 시시”

“이집트 민중의 사회경제적 요구, 폭발적 잠재력 가져”

‘4월 6일 청년운동’ 회원 엘 사이예드 웨차가 이집트 혁명 3주년인 지난 25일 경찰의 총에 맞아 즉사했다. 웨차는 2011년 초에도 거리 시위에 나섰지만 지난 초여름 타마로드를 위해 서명을 모았었다. 일전에 웨차는 군부의 쿠데타를 정당화했지만 이제는 군부에 맞서 시위하다 숨을 거뒀다.

3년 전 25일, 타흐리르 광장에선 호스니 무바라크 축출을 위한 대중 봉기가 시작돼 18일만인 2월 11일에 그를 몰아냈지만 올해는 무바라크와 함께 했던 군부의 지지자들로 가득 찼다. 수만 명이 모인 타흐리르 광장은 알 시시 장군 사진으로 출렁였고 무대에서 한 경찰은 국가를 불렀다. 광장에 선 한 여성은 “알 시시가 출마할 때까지 광장에 있을 겁니다”라고 즐겁게 말했다. 거대한 현수막에는 알 시시가 도축용 칼을 들고 무르시 전 대통령과 무슬림형제단원을 짓밟고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사람들은 “무슬림형제단에 사형을 집행하라”며 “시시는 나의 대통령”이라고 외쳤다. 이로써 이집트 혁명사는 공식적으로 다시 쓰였다.

군부, 혁명의 주인 행세

[출처: <타츠> 화면캡처]

무바라크에 맞선 봉기에 나서 18일 간 거리에선 이들을 폭력적으로 진압해 840명의 순교자를 낸 이집트 내각은 복권됐을 뿐 아니라 혁명의 주인으로 행세한다고 26일 <타츠>는 보도했다. “타흐리르에서는 지금 새로운 파라오가 만들어지고 있다”고 ‘구국전선’ 대변인이었던 할레드 다오우드 활동가는 말한다.

25일 이집트 혁명 3주년을 계기로 타흐리르 광장 옆 거리에서는 군부도 무슬림형제단도 반대하는 세속주의자들이 거리 시위를 벌였고, 카이로, 나스르시티 등 전국 각지에서는 무슬림형제단의 시위가 진행됐다. 보건부에 따르면 25일 전국에 걸쳐 49명이 목숨을 잃고 250여 명이 다쳤다. 24일 이미 무슬림형제단 지지자와 보안군과의 충돌로 최소 15명이 사망했다. 내무부는 1,079명이 연행됐다고 밝혔다. 3년 전 이날에는 700명이 연행됐다.

무슬림형제단의 시위행진 시 보안군은 실탄을 발포했다. 전국 각지에서 격렬하게 저항하는 무슬림형제단을 경찰은 폭력으로 진압했다. 카이로에서 경찰은 최루탄과 장갑차로 약 1,500명의 시위대를 진압했다.

군대, 첩보기관과 경찰은 국가 기관과 무슬림형제단의 전통적인 시위 거점에 주둔했다. 모하메드 이브라힘은 내무장관은 지난주 무슬림형제단과 좌파자유주의 야권에 대해 진압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활동가들은 혁명기념일 전 가택에서 연행되기도 했다.

25일 오전 아인 샴스 구역에서는 경찰서에 폭탄이 투척됐고, 24일에는 카이로에서만 4번 폭탄이 터져 6명이 사망하고 100명이 다치는 참사도 빚어졌다.

가혹한 3년

[출처: <타츠> 화면캡처]

혁명 3년의 현실은 이집트 혁명운동에 나선 이들에게 가혹하다.

레바논에서 성장한 사회주의자로 중동에 관한 다수의 서적을 출판해온 질베르 아슈카(Gilbert Achcar)는 24일, <인터내셔널뷰포인트>에서 “2011년 이집트에서 일어난 것은 얄팍한 변화였다”고 잘라 말했다. 그는 당시 “빙산의 일각만이 제거됐다”며 “무바라크의 가족과 가깝게 연결된 패거리들은 잔존했다”고 평했다. 특히 “우리는 무바라크가 대중운동 혼자가 아닌, 대중운동과 군사쿠데타의 조합에 의해 전복됐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아슈카는 “2011년 2월 11일 발생한 것은, 군대가 무바라크를 제거하고 자신의 손으로 권력을 잡았다는 점에서, 실제로 우리가 7월 3일 봤던 것보다 더한 쿠데타였다”고 돌아본다. 그러니까 “군사최고위원회는 군사정부로서 권력을 수취, 이는 거대한 대중들의 봉기에 맞서 (국가의 계속성을 보존하기 위해) 진행된, 가장 고전적인 의미에서의 쿠데타였다”고 평했다. 이에 대해 그는 “쿠데타 전, 나는 군대에 대한 환상에 대해 경고했었다”며, “수십년 동안 이집트 국가와 정권의 실제 중추는 군대였기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

그러면, 군부가 타흐리르를 강탈한 것처럼 혁명의 불씨도 꺼져 버린 것일까?

아슈카는 “문제는 현재의 이집트 상황에 있다”며 “조직된 주요 세력은 단지 2개일 뿐이기 때문이다”라고 지적한다. 하나는 군사 기구 뿐 아니라 사회 및 정치를 장악하고 있는 구체제의 중추인 군부, 두 번째는, 이 구체제에 반대하는 대단히 조직적인 무슬림형제단이다. 타마로드 운동의 젊은이들은 거대한 시위를 조직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무슬림형제단을 전복시킬 수준은 되지 못해 2011년과 같이 대통령 축출을 위해 다시 군대에 의지했다는 것이다.

아슈카에 따르면, 군부는 물론, 무르시에 맞선 대중 시위를 그를 제거할 기회로 이용했다. 무슬림형제단이 스스로의 체제를 만들려 하며 국가 기구에 대한 통제권한을 확대해 가자 위협을 느꼈기 때문이다. 같은 의미에서, 무슬림형제단의 수권은 자유주의자와 좌파 모두에게도 큰 위협으로 간주됐다.

“이집트 민중의 사회경제적 요구, 폭발적인 잠재력을 가져”

아슈카는 “이제 중대한 문제는, 2011년보다 훨씬 더, 민중이 군대에 다시 환상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라고 우려한다.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혁명의 불길은 여전히 타고 있다는 견해다.

아슈카는 “이집트 혁명의 핵심 이유는 사회적이며 경제적인 것이다”라며 “이는 폭발적인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군부는 억압 외에는 이 요구를 어떻게 이행해야 할지에 대한 답이 없기 때문에, 민중이 군부에 상당한 환상을 가지고 있더라도, 군부 지도자 알 시시에 대한 믿음은 매우 단견이라고 전망했다.

이 때문에 그는 긴장은 다시 시작될 것이 분명하다고 내다본다. 산업 행동, 노동자들의 투쟁, 무슬림형제단에 반대하는 광대한 연합 사이에 증가하는 충돌 등 이미 사회적인 투쟁은 시작됐다는 것이다.

그의 말처럼, 타흐리르 광장 인근 거리에 선 한 사람은 “알 시시 장군, 당신은 우리를 죽이려 하고 죽어가도록, 그리고 슬퍼하도록 놔둘 것이지만 무르시의 다음 차례는 당신이다”라고 고함쳤다. “민중은 정권의 몰락을 원한다”, “빵, 자유 그리고 사회적 정의”라는 3년 전 구호도 계속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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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질베르

    길버트 아크카(Gilbert Achcar)가 아니라 질베르 아슈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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