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19일 워싱턴에서 개최된 제 1회 ‘한미 장관급 전략대화’에서 지난 3년간 논란이 되어왔던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을 수용하기로 하면서 커다란 반발을 불러왔다. 더욱이 최재천 열린우리당 의원의 정부문서 공개로 인해 파장이 더욱 커질 것으로 보인다. 특히 정부의 외교안보팀이 국민을 기만했다는 것에 대해서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주한미군의 ‘기동 타격대’로 변신
전략적 유연성은 그 가치와 무거움에 비해서 남한의 시민사회가 무관심하거나 가벼이 여기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그 내용과 의도를 올바로 인식한다면 삶의 양식과 태도가 바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민족의 생존에 결정적이고 절대적이기 때문이다.
한미간에 합의한 전략적 유연성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한국은 동맹국으로서 미국의 세계 군사전략 변혁의 논리를 충분히 이해하고,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의 필요성을 존중한다는 것이고, 둘째, 전략적 유연성의 이행에 있어서, 미국은 한국이 한국민의 의지와 관계없이 동북아 지역분쟁에 개입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한국의 입장을 존중한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주한미군은 미국의 군사적 필요에 따라 이동과 배치가 자유롭게 이뤄질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됐다. 그런데 일반 시민들은 전략적 유연성의 개념에 대해서 올바른 인식이 부족할 뿐 아니라, 오히려 이번 합의에 대해 조건반사적으로 맹목적인 지지태도를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전략적 유연성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선행되어야 한다.
전략적 유연성의 핵심은 첨단화(better), 경량화(lighter), 신속화(faster)이다. 미국이 해외주둔 미군을 20세기형 ‘붙박이 군'으로부터 21세기형 ‘기동군' 체제로 바꿔나가는 일련의 군사적 ‘변환'(transformation) 과정을 함축한 말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은 9·11테러 이후 이루어지고 있는 미국의 새로운 군사변환전략의 구체적 산물이다.
21세기 효율적인 군사전략이라는 기치 아래 이루어지고 있는 미국의 군사변환전략의 핵심은 해외주둔 미군의 재배치(GPR)를 통해 군사력의 규모를 줄이는 대신, 신속화, 기동화, 정밀화를 통해 군사력을 효율화함으로서 능력(질적 측면)에서는 더욱 더 향상된 21세기형 군대를 건설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해외주둔 미군의 재배치는 유사시 한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신속히 이동하여 활용할 수 있는 신속기동군으로 재편하여 ‘전략적 유연성’을 부여한다는 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주한미군을 포함한 전세계 주둔 미군이 특정지역에 얽매이는 둔중한 ‘붙박이 군대'가 아니라 기동성과 신속성을 갖춘 ‘기동 타격대’ 성격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논리인 것이다. 미국의 새로운 군사 패러다임인 것이다. 즉 9·11 이후 미국에게는 테러조직이나 북한과 같은 ‘불량국가’가 새로운 위협요인이 되었다. 기존의 전략이나 군사력으로는 이들의 위협에 신속하게 대응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9·11을 통해서 뉴욕이나 워싱턴 등 미국의 중심도 자유로울 수가 없다는 교훈을 얻은 것이다. 그래서 해외주둔 미군을 좀더 빠르게, 좀더 가볍게, 좀더 정밀하게 만들어서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군대로 만들겠다는 것이다. 이것이 새로운 환경에 걸맞은 미국의 군사변환전략이다.
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전략이 대테러 전쟁과 공세적인 선제공격 독트린을 정식화하고 효율적으로 뒷받침하겠다는 것이며, 그 중심에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이 있는 것이다.
또 하나의 사기와 우리의 미래
2002년 미국 측에 의해 문제가 제기된 이후 남한은 2005년 3월 공군사관학교 졸업식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우리의 의지와 관계없이 우리 국민이 동북아시아의 분쟁에 휘말리는 일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떠한 경우에도 양보할 수 없는 확고한 원칙으로 지켜나갈 것입니다”라고 언급하면서 한반도 평화와 안정에 대한 주한미군의 기여를 인정하면서도 전략적 유연성에 대한 한계를 분명히 했다.
하지만 최근 공개된 비밀문건에 의하면 정부의 외교안보팀이 2003년 10월 초 미래 한미동맹 정책구상회의(FOTA) 4차 회의에서 사실상 전략적 유연성을 전폭 수용한 것이다. 그것도 국민, 국회, 대통령도 모르게 말이다. 무슨 계모임도 아니고 자기들끼리 모여서 국가의 운명이 걸린 문제를 대충 합의한 셈이다. 만약 대통령이 사전에 인지했거나 보고되었다면 이는 대통령이 중심이 되어 정부가 국민들을 기만하고 사기친 것이다.
이번 한미간 합의에 대해서 긍정적인 평가도 있다. 미국이 우리의 입장, 즉 한국민의 의사에 반하는 지역분쟁 개입 불용 입장을 존중하고 수용한 것은 커다란 성과라는 것이다. 또한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이 오히려 한반도 방어에 도움이 될 수도 있다는 해석도 있다. 즉 주한미군이 다른 분쟁 지역으로 빠져나갈 수 있듯이 반대로 한반도 유사시 다른 지역에 있는 미군 전력이 한반도에 신속하게 투입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민의 의사는 무엇을 말하는가? 정부 외교안보팀의 의사인가, 대통령의 의사인가 아니면 국회의 동의를 말하는가? 그리고 미국의 한국 존중에 대한 진정성은 존재하는지도 궁금하다. 정부는 공동성명의 내용이 광범위하고 추상적이기 때문에 기속력이 강하지 않다고 했지만, 오히려 그러한 모호함이 미국으로 하여금 얼마든지 자의적인 해석을 가능케 해주는 요소인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유사시 주한미군이 한반도 이외의 분쟁지역에 투입될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것도 자유롭게 차출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되면 우리의 의사와 상관없이 국제적 분쟁에 휘말려 들 수밖에 없다.
그리고 또 하나 유념해야 할 것은 한미동맹에 관련된 문제이다. 동맹이란 상호 대등하고 수평적인 관계로 설정되어야 한다. 상호 신뢰를 바탕으로 협력을 유지하면서 동일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공동 행동을 취하는 것이 올바른 동맹의 모습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동안 한미관계는 대등한 수준을 유지한 적도 없었으며, 오히려 종속적인 성격이 강했다. 그나마 지금까지는 한미동맹이 한반도내에서 전쟁방지라는 성격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앞으로 주한미사령부의 작전범위가 최소한 동북아지역으로 확장되게 될 것이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한미동맹의 성격변화를 초래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성격은 지역동맹화하는 방향으로 발전할 것이다. 현재 한반도와 주변정세는 미국의 중국견제, 미일 동맹 강화, 북미 갈등 등 복잡한 갈등 구조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정세 하에서 전략적 유연성을 통한 한미동맹 재조정은 한반도 안정에 기여하기보다는 한반도를 더욱 위태롭게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일각에선 앞으로 미국이 중국-대만 분쟁 등은 물론 북한 문제와 관련해서도 주한미군을 파견하려 경우 ‘제동’을 걸만한 안전장치가 없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제기된다. 그렇다면 이번 합의가 한미동맹을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는 긍정적인 평가는 설득력이 떨어진다.
그 외에도 한미상호방위조약이 규정하고 있는 미군의 한반도 주둔 목적에 어긋난다는 점, 한국이 미국의 군사 전략을 위한 전초기지로 활용된다는 점, 한미연합전력구조 하에 있는 한국군도 전력 ‘투사'의 대상이 된다는 점 등에서도 문제의 소지가 있다.
이처럼 전략적 유연성은 매우 위험하며 상식의 수준을 넘어 무서운 의도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그 위험성에 비해 남한의 시민사회가 지나칠 정도로 무관심하다. 최근에는 스크린 쿼터 축소 문제에 가려져 논의가 축소되고 있다. 이것도 정부가 의도했던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정부는 무엇이 두려워서 국민들 몰래 밀실외교를 펼치고 있는가. 아직도 미국을 비롯한 서구 제국주의에 대한 무의식적인 사대주의가 남아있기 때문은 아닌가. 정부는 우리의 미래를 일방적으로 결정하지 말고 사회적 공론화를 통해 합의를 모으는 노력을 해야 한다. 한반도의 미래는 어느 누가 아닌 우리 모두가 결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