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과 함께 미국에서 연수중인 이종회 참세상 발행인이 '한미FTA' 문제를 뒤집어보는 칼럼을 보내왔다. 모두 알고 있듯이 정부가 한미FTA를 최초의 일정대로 강행하고, 범국민운동본부가 결성되어 협상을 저지하기 위한 실천을 진행하고 있다. 그러나 범국민운동본부를 포함해서 이 싸움에 나선 주체들이 한미FTA 저지 싸움의 목표와 방향, 이후 대안과 관련해서는 뚜렷하게 제시하지 않고 있다. 말하자면 한미FTA 저지 싸움을 통해 진보운동, 민중운동이 무엇을 얻을 것이며, 어떤 대안을 제시할 것인지를 심사숙고하는 상황이라 할 수 있다. 이종회 발행인은 이런 상황을 고려해서 앞으로 6-7회에 걸쳐 '한미FTA 뒤집기' 연재칼럼을 기고한다. 한미FTA 저지 싸움에 나선 모든 주체들에게 작은 보탬이 되길 바란다. - [편집자주]
한미FTA 추진을 두고 친미와 반미, 개방과 쇄국으로 일그러진 지형에 정태인이 제기하는 소위 ‘평화의 동북아’론이라는 또 다른 왜곡으로 우리의 시야가 흐려지고 있다. 엄청난 파괴력에 따른 국민적 저항으로, 쉽게 풀지 못했던 스크린쿼터의 축소, 의약품 가격의 재조정 금지, 미국산 쇠고기에 대한 금수조치 해제, 배기가스 관련 규제의 완화, 그 오랜 금기들을 한꺼번에 깨놓기가 무섭게, 정부는 제대로 된 공청회 한번 없이, 6월 5일 1차 본 협상이라는 궤도에 진입시키기 위한 단계를 밟고 있다.
그리하여 국민적 저항, 96,7년에 걸친 노동법 안기부법 저지를 위한 전 국민적 투쟁 이후 언제 이런 적이 있었던가 싶게 민주와 진보를 지향하는 기층 노동자, 민중 그리고 사회단체의 역량을 총결집시키는 역할을 톡톡히 할 정도의 맞바람을 일으키면서까지 한미FTA가 출범하는 이유는 과연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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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세상 자료 사진 |
정태인이 제기하는 바 한미FTA의 본질은, 이미 진보진영에서 정리한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정태인은 프레시안에 기고한 글에서, “2005년 ‘포괄적, 호혜적, 역동적 동반자’를 내세웠던 경주 공동선언이 다음 해 1~2월 전략적 유연성과 한미FTA 협상의 개시 선언으로 ‘결실’을 맺은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김종훈 한미 FTA 수석대표의 “한미FTA는 한미간 상호방위 조약에 뒤이은 경제동맹”, “중국, 일본에 앞서 미국과 거래를 탄탄하게 해놓는 것이 동북아에서 한층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라는 발언으로 그의 진단을 보충하고 있다. 아울러 노무현의 한탕주의와 친미주의자 한덕수 경제부총리,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이 만든 합작품이라는 공개적인 비난도 서슴치 않았다.
그렇다. FTA정책에 관한 논의에도 개입을 한 청와대 정책보좌관 자리를 거친 사람이 현 정부의 한미FTA 추진정책을 비난하고 나섰으니, 그의 과거 활동했던 이력을 돌이켜 FTA정책이 노동자, 농민 그리고 민중에 끼칠 고통과 고난을 염려한 충정으로 바라보기 십상일 수 있겠다. 그러나 그 기대는 그가 제기하는 대안의 내용을 조금만 들여다보면 여지없이 무너지고 만다.
그는 위기에 처한 자본의 나아갈 길에 대한 염려를 쏟아낸 것, 그리고 내심 노무현대통령에게 그의 신심을 다시 한 번 부각시키고자 이런 도발을 감행한 것에 불과하다. 정태인, 그는 쓴 글을 보나, 스스로 존재가치를 부각시킨 행태로 보나 전략전술에 아주 능숙한 사람임에 틀림없어 보인다.
성동격서라 했든가, 한미FTA 반대한다고 소리높여 온동네 휘저어 놓고는 해결방안이라는 것으로 한중일FTA 먼저 하자고 던지고 있으니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한마디로 정태인은 자본의 자유무역체제와 FTA 그 자체가 노동자 민중에 미치는 악영향에 대한 고려는 아예 없다. 단지 한미FTA로 인해 김대중정권 이래 구상되고 추진되어 온 자본의 아시아지역블록 구축에 대한 실현기획이 무망해지고 있음을 낙담하고 있을 뿐이다.
정태인은 작금의 한미FTA 추진에 대한 대안으로서 다음과 같이 제기한 바 있다. ‘평화의 동북아’ 구상이란 “동북아의 새로운 경제·사회 모델, 그리고 장차 세계의 모델이 될 공동체적 민주주의를 찾는 것”이고, “미국을 외면할 수 없지만 중국, 일본과의 협력을 포기한다면 우리는 훨씬 더 큰 손해”를 보기 때문에, “중국이나 일본과의 FTA 논의를 한층 진전”시켜야 하며, “러시아와의 포괄적 경제동반자 협정(CEPA) 역시 발전시켜야 한다. 동남아시아연합(ASEAN)과의 FTA 역시 마찬가지다.”
그리고 “예를 들어 북한, 중국, 러시아가 최근 설치하기로 한 훈춘·하산 지역의 경제자유지대에 적극적으로 투자해야 한다. 이곳은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북방의 전략적 요충지다. 고려인들이 많이 모여 사는 이곳은 시베리아 횡단철도(TSR)와 한반도종단 철도(TKR)의 연결지점일 뿐 아니라 장차 북한의 나선 지역을 발전시킬 교두보 역할을 할 곳이다”라는 것이 그 요지이다.
그런데 그나마 그가 프레시안에 올린 글이 정태인표 창작품이 아니라, 이미 노무현대통령 취임사에 다 나와 있던 이야기를 보기좋게 포장만 달리하여 되풀이한 것일 뿐이다.
번거롭지만 관련된 부분만 인용을 해본다면 다음과 같다. “우리 앞에는 동북아 시대가 도래하고 있습니다. 근대 이후 세계의 변방에 머물던 동북아가, 이제 세계 경제의 새로운 활력으로 떠올랐습니다... 동북아의 경제규모는 세계의 5분의 1을 차지합니다. 한·중·일 3국에만 유럽연합의 네 배가 넘는 인구가 살고 있습니다... 우리 한반도는 동북아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한반도는 중국과 일본, 대륙과 해양을 연결하는 다리입니다... 21세기 동북아 시대의 중심적 역할을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반도는 동북아의 물류와 금융의 중심지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동북아 시대는 경제에서 출발합니다. 동북아에 '번영의 공동체'를 이룩하고 이를 통해 세계의 번영에 기여해야 합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평화의 공동체'로 발전해야 합니다. 지금의 유럽연합과 같은 평화와 공생의 질서가 동북아에도 구축되게 하는 것이 저의 오랜 꿈입니다. 그렇게 되어야 동북아 시대는 완성됩니다. 그런 날이 가까워지도록 저는 혼신의 노력을 다할 것임을 굳게 약속드립니다... 진정한 동북아 시대를 열자면 먼저 한반도에 평화가 제도적으로 정착되어야 합니다... 한반도가 21세기에는 세계를 향해 평화를 발신하는 평화지대로 바뀌어야 합니다. 유라시아 대륙과 태평양을 잇는 동북아의 평화로운 관문으로 새롭게 태어나야 합니다. 부산에서 파리행 기차표를 사서 평양, 신의주, 중국, 몽골, 러시아를 거쳐 유럽의 한복판에 도착하는 날을 앞당겨야 합니다”
결국 정태인이 하고자 하는 주장은 노무현대통령의 ‘동북아 경제중심국가 건설’을 국정목표로 ASEAN+3을 중심으로 하는 기존의 ‘FTA추진 로드맵’을 그대로 밀고가자는 얘기에 불과하다.
그리고 한미동맹에 대해서는 노무현대통령의 취임사에 제시된 대로 “우리의 안전보장과 경제발전에 크게 기여해 왔습니다. 우리 국민은 이에 대해 깊이 감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한미동맹을 소중히 발전시켜 나갈 것입니다. 호혜평등의 관계로 더욱 성숙시켜 나갈 것입니다”라고 별개의 건으로 유지하면 될 일이지, 전략적 유연성에 합의하고 더구나 이에 조응하여 한미FTA까지 추진하는 것에 반대를 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정태인의 도발적인 행동은 오히려 노무현과 자본, 아니 독점자본에 대한 그 깊은 충성심의 가감없는 입장표명이라 하겠다.
그렇다면 따져보자. 미국과 FTA를 체결하면서 문제가 되는 일본과 중국, 그리고 아세안과 FTA를 맺어 동북아와 아시아지역 독자적인 경제블록을 구축하는 것이 정태인이 주장한 대로, 아니 노무현대통령이 취임사에서 얘기한 대로 '평화의 공동체'를 건설하는 방향인가? EU를 한 축으로 하고, FTAA를 매개로 한 미주블록을 한 축으로 하는 위기의 자본운동의 블록화 경향에서 ASEAN+3를 축으로 하는 아시아지역 블록을 구축하는 것이 과연 평화의 공동체를 건설하는 경로가 될 것인가.
세계경제의 블록화와 블록 간 배타적 보호무역의 강화로 귀결된 과잉축적과 과잉생산의 위기가 결국은 전지구적인 참화로 이어진 제2차 세계대전을 상기한다면, 이런 블록화의 강화와 그에 대항하는 또 다른 블록을 구축하는 것에 대하여 과연 ‘평화의 공동체’를 운운할 수 있을 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평화’보다는 ‘전쟁’, ‘죽음’이라는 레토릭이 더 어울리지 않을까
무장한 세계화라 했던가. 신자유주의 자본운동에 조응한 새로운 세계질서·동북아질서를 주도하고자 하는 미국의 군사적 재편에 상응하는 전략적 유연성에 동의하고, 그와 한 쌍으로 이루어지는 한미 FTA가 가지는 함의와 함께, 자본의 블록화 경향에 대한 의미를 짚어내고, 잠시 흐렸던 우리의 시야를 다시 확보하는 것이 시급한 우리의 과제라 아니할 수 없다.
“유럽이 통합하는 데 50년이 걸렸다. 일본과 한국이 못 할 이유가 없다. 이를 위해서 월드컵 한일공동 개최만으로는 모자란다. FTA를 체결하자”
현 정부의 동북아중심국가라는 국정지표, 그리고 정태인의 제안은, 공교롭게도 2000년 초 일본의 오부치수상이 방한하여 고려대학교에서 학생들에게 한 강연에서 제안과 궤를 같이 하고 있다. “NAFTA(북미자유무역협정)는 멕시코 인민의 죽음과 같다”고 NAFTA가 발효하는 1994년 1월 1일 봉기를 일으킨 자파티스타의 선언과 같이 소위 ‘평화의 동북아’ 플랜이라는 것이 우리 아니 아시아지역 노동자 민중에게 죽음과도 같은 고통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것은, 그간 정부가 추진하는 FTA를 포함하는 자유무역정책에 노동자, 농민 그리고 민중의 흘린 그리고 흘리고 있는 피눈물이 증명하고 있다.
이제 우리 앞을 가리던 안개를 걷고 노동자 민중의 국제주의 기반하는 평화공존과 호혜경제에 대한 대안을 실험하고 있는 지구 반대편에도 눈길을 돌려보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