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사회주의를 언급했는가?

[편집자 주] '제국주의'라는 용어는 국가 간 자본 이동의 시대에 적용 가능성을 상실했을까, 아니면 오늘날의 착취, 불안정, 불평등의 글로벌 패턴과 여전히 관련성을 유지하고 있을까? 전 세계 노동자들이 점점 더 열악한 노동과 생존 조건에 직면해 있고, 세계 주요 경제 강대국들 간의 대립과 세계경제질서 재편이 심화하는 가운데, 국제적 대립과 투쟁의 본질을 평가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또한, 반제국주의-반미투쟁 지상주의 또는 반제국주의를 넘어 친러시아, 친중국으로까지 지평을 확장하는 것이 정당한지 아닌지에 대한 판단도 필요한 문제다. 

지난 7월 제국주의에 대한 특별 심포지엄이 마르크스주의 저널인 “Science and Society”를 통해 열렸고 논문집이 최근 발표됐다. 참세상은 이 논문집의 주요 글과 관련 주장을 모아 연재한다.

(1) '반제국주의' 좌파의 참을 수 없는 마니교주의 (윌리엄 로빈슨)
(2) 제국주의, 반제국주의, 초국적 계급 착취 (윌리엄 로빈슨)
(3) 누군가 사회주의를 언급했나? (톰 브라스)
(4) 제국주의 체제는 여전히 우리와 함께 있다 (알렉스 캘리니코스)
(5) 로빈슨 "마니교" 딱지의 ​​의도치 않은 불행한 결과 (스티브 엘너)
(6) 제국주의: 나무가 숲을 보는 것을 막지 못하게 하라 (훌리오 후아토)
(7) 국제적 자본주의 계급 이론: 평가 (데이비드 라이브먼)
(8) 21세기의 제국주의와 반제국주의 (준 쉬)
(9) 제국주의에 ​​관하여: S&S 심포지엄에 대한 답변 (윌리엄 로빈슨)
(10) 민주주의에 대한 제국의 지배를 해체하다 (이녜스 발데즈) 
(11) 양극화된 세계에서 마르크스의 반식민주의, 새로운 아(亞)제국주의 그리고 국제주의

[출처] Unsplash+ & Getty Images

마르크스주의적 목적론의 성격을 고려하면, 사회주의자들이 로빈슨이 제기한 핵심 논점에 동의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해야한다. 로빈슨은 많은 반제국주의 운동의 배후에 도전받지 않은 민족주의 정치가 존재하며, 이것이 초국적 자본과 계급이 지배하는 현 시대에 비제국주의 국가들에 의해, 혹은 그들 내에서, 일어나는 자본 축적을 감추고 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강대국이 약소국을 억압하는 제국주의에 대한 반대는 전 세계적 맥락에서 작동하는 자본주의 발전과 계급 분열의 전모를 간과하게 된다. 어떤 면에서는 이 논쟁이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 어렵다. 이 논쟁의 주장, 정치, 결과는 좌파에서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문제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 다른 면에서는 특히 재부상하는 민족주의와 포퓰리즘이 다시 활개를 치고 있는 현재의 이념적 기후에서, 제기된 문제들을 다시 상기하는 것이 여전히 중요할 수 있다. 지금, 그 어느 때보다도, 좌파가 지지해야 할 즉각적인 정치적 목표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제기된다. 주된 적이 외부의 제국주의라는 이유로, 비도시적 자본주의가 여전히 진보적이라는 관점에서 더 많은 민족주의를 지지해야 하는가, 아니면 사회주의를 지지해야 하는가?

가까운 과거와 현재 모두에서 민족주의의 반동적이고 비진보적인 측면은 감추기 어렵다. 이러한 특성은 유럽 국가 내에서 부유한 지역(롬바르디아, 카탈루냐)이 자신들은 문화적으로/민족적으로 다르며 항상 그랬다고 주장하면서 더 넓은 국가적 맥락에서 분리하려는 시도를 뒷받침한다. 비슷한 논리가 반대로 사용된 예로는 아파르트헤이트 시기 남아프리카 공화국이 있다. 이때 부유한 백인 지역을 반투스탄이라는 문화적으로 '다른' 곳으로 지정해 빈곤한 흑인들을 격리시켰다. 이와 유사하게, 19세기 말 오스트리아에서 자본가들이 노조에 가입된 독일 노동자들을 더 저렴한 체코 이주 노동자로 대체했을 때, 좌파 정당들은 노동자 기관, 조직, 정치 활동을 민족/국가적 차원에서 분리할 것을 주장했다. 이는 오스트리아와 독일에서 극우 세력의 등장과 공고화를 위한 기반을 마련한 셈이었다.

역사적으로 제국주의에 대한 국가 중심적 담론의 문제점은 그에 따라오는 정치경제적 모델의 유형이다. 즉, 자본주의가 여전히 주로 미국과 유럽 같은 도시 중심지에 국한된 체제인 한, 반제국주의를 내세우는 국가는 아직 그러한 전환을 경험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다음 단계는 외국 자본에 대항하고 해당 국가에서 비외국적 자본 축적을 확립하기 위한, 국가 부르주아지("진보적"), 노동자, 농민으로 구성된 정치적 동맹을 구축하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매우 오래된 것으로, 가장 최근에는 1960년대 개발의 10년 동안 나타났다. 당시 새로 독립한 제3세계 국가들의 경제 성장은 핵심 경제 자원(토지, 광산) 소유 외국인들의 재산을 몰수하여 진정한 국가적 축적 프로젝트를 세우는 데 필요했다. 한 마디로, 이는 반봉건적 논지였으며, 당시에도 이후에도 마르크스주의자들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았다. 사회주의는 처음에는 연기되다가 결국 이 정치적 의제에서 완전히 사라진다.

이 민족주의적 급증에 대한 학자들의 기여는 자주 과소평가되거나 무시된다. 우리가 여전히 이 대화를 하고 있는 이유는 부분적으로는 신자유주의의 부상과 함께 제3세계 발전에 대한 지배적인 이론적 패러다임의 변화 때문이다. 1960년대 이후 좌파 학자들이 학계에 진입하면서 마르크스주의가 연구 주제로 자리 잡았고, 이에 따라 대학 내에서 경쟁/인정의 과정이 허용되었으며, 이는 곧 다양한 재해석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재해석은 마르크스주의에 비(非)마르크스주의적이거나 심지어 반(反)마르크스주의적인 개념과 이론을 추가하는 것을 포함했고, 이는 결국 마르크스주의의 희석과 탈정치화를 초래했다. 계급의 무력화와 혁명적 전환을 통한 사회주의로의 정치적 해결보다는, 자본주의 체제를 초월하지 않고도 성취할 수 있는 비계급적 정체성의 강화 또는 재강화가 바람직한 목표로 빠르게 자리 잡았다. 이는 신자유주의 경제 이론과 탈근대적 문화적 전환(자유 시장, 정체성의 자유 선택) 간의 이념적 중첩의 정도를 강조한다. 

따라서 1980년대에 이르러, 사회과학과 인문학의 초점은 크게 변화하고 있었다. 마르크스주의의 물질주의적 틀은 유럽 밖의 과정, 문제, 인구를 이해하는 데 부적절하다고 여겨지면서 점점 더 멀어지고, 대신 정체성 정치의 문화적 강화에 초점을 맞춘 "새로운" 포퓰리스트적 탈근대주의로 이동했다. 후자의 접근법은 마르크스주의 정치경제학에 강하게 적대적이며, 탈근대주의자들은 사회주의/물질주의/계급이라는 개념적 장치를 포함한 마르크스주의를 단지 또 하나의 유럽중심주의적/계몽주의적 "근본주의"로 치부했다. 탈근대주의자들이 마르크스주의에 대해 보이는 적대감은 두 가지 과정으로 나타난다. 첫째, 마르크스주의의 역사학과 개념적 장치에 대한 부정이 이루어지고, 둘째, 이들 대신 농민, 민족, 국가적 "다름"을 우선시하는 포퓰리스트적 접근법을 주장한다. 마르크스주의는 많은 탈근대주의자들이 본질화하는 이러한 비계급적 정체성들을 역사적으로 소외시켰다는 이유로 회복 불가능한 오염으로 간주되었다. 결과적으로, 이들은 좌파 정치경제학이 지금까지 비판해온 모든 범주, 과정, 정체성을 회복하고 그것을 권능화된 것으로 주장하고 있다.

노동자 연대를 약화시키고, 따라서 계급에 기반한 "아래로부터의" 조직화도 약화시키는 포퓰리즘은 항상 자본이 사용하는 가장 효과적인 "위로부터의" 투쟁 방식 중 하나였다. 축적 과정이 이제는 전 세계적 범위로 확장된 산업 예비군을 만들어내고 이를 먹이로 삼는 상황에서, 마르크스주의의 약화와 포퓰리즘의 강화는 불길한 조합이다. 학계와 다른 곳에서 일부 좌파들이 핵심 신념(사회주의, 계급)을 포기하고 탈근대적 비계급 정체성을 선천적이거나 권능화된 것으로 대체한 것처럼, 극우파는 이러한 비워진 정치적 지형을 차지하며 평민적 정체성을 자신들의 이데올로기에 통합했다. 따라서 이주민의 "타자"로서의, 다른 국적의 문화적 정체성에 중점을 두는 탈근대적 논리에 대해, 극우파는 비슷한 방식으로 문화적 정체성을 중시하는 논리를 내세우지만, 이번에는 이주하지 않은 노동자(=미국인, 영국인의 정체성)의 국적을 강조한다.

로빈슨의 초점은 제국주의와 그것이 경제 발전을 계속해서 촉진하는 역할이 진보적인지 여부에 맞춰져 있지만, 이 문제는 필연적으로 다른 것과도 관련이 있다. 즉, 미래의 정치적 형태에 관한 것이다. 이는 좌파 내에서 오랫동안 논의되어온, 민족주의와 부르주아 민주주의, 궁극적으로 자본주의 자체의 한계에 대한 논쟁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을 확인시켜준다. 이 논의의 핵심은 언제, 그리고 어떻게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이러한 결합된 체제적 형태를 대체하고, 사회주의를 정치적 의제로 올려 이를 달성하기 위해 조직하고 동원해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였다. 만약 사회주의를 이 방정식에서 제외한다면, 남는 것은 자본주의에 대한 반대뿐이며, 이는 역사적으로 포퓰리스트들이 차지했던 보수적 입장에 빠르게 도달하게 된다. 후자의 퇴행적 이데올로기는 공격적인 민족주의와 함께 '더 나은' 자본주의로의 회귀와 복원을 결합하고, 문제의 체제를 초월하지 않으며, 당연히 사회주의로의 급진적 전환도 포함하지 않는다.

따라서 한편으로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자본 축적, 민족주의를 지지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본주의를 초월하고 사회주의를 수립하려는 노동자 투쟁의 중요성을 축소한 장기적인 결과는, 경제 위기 시기에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곤경에 대한 급진적 정치 해결책을 원할 때, 좌파가 더 이상 차지하지 않는 정치적 공간을 극우 포퓰리스트들이 점유하게 된다는 것이다. 현재의 포퓰리즘은 문화적 정체성을 권능화된 것으로 특권화하면서, 방임적 자본 축적을 먹고 자라난다. 경제 위기에서, 이주 노동자로 구성된 산업 예비군의 확대와 자본가들 간의 경쟁, 그리고 일자리를 찾는 노동자들 간의 경쟁이 심화되면서 정치적 위기가 발생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자본주의와의 단절과 사회주의로의 전환을 주장하는 급진적 좌파 담론이 부재할 경우, 포퓰리스트들은 노동자들이 노동 시장 경쟁을 비계급적 정체성의 결과로 경험하도록 부추긴다. 현재도, 그리고 역사적으로도, 이러한 상황에서 급진적 정치가 여전히 의제에 남아 있음을 시사하지만, 그 차이는 노동계급의 지지가 민족주의 또는 민족성에 기반한 권능화를 제공하는 우익 포퓰리스트 운동으로 전환될 수 있다는 점이다. 이것이 결국 어디로 이어지는지는 어느 마르크스주의자도 굳이 상기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출처] Did Someone Mention Socialism? 

[번역] 류민

덧붙이는 말

톰 브라스(Tom Brass)는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SPS(사회 및 정치학) 학부에서 강의했으며 퀸즈 칼리지에서 연구를 지도했다. 거의 20년 동안 농민 연구 저널(The Journal of Peasant Studies)을 편집했으며, 농업 문제와 농촌 노동 관계에 관한 광범위한 논문을 발표했다. 참세상은 이 글을 공동 게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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