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Ufotable
* 이 글은 애니메이션 시리즈 <귀멸의 칼날 – 도공마을 편>의 결말을 상세히 소개하고 있습니다.
“안돼! 이렇게 네즈코를 떠나보낼 수는 없어!”
TV판과 극장판 애니메이션이 공개될 때마다 흥분하면서 시리즈를 충실히 따라가고 있는 팬인 나는 <귀멸의 칼날-도공마을 편>(이하 <도공마을>)의 마지막 에피소드에 이르러 거의 통곡을 할 지경에 이르렀다. 혈귀이면서도 귀살대 편에서 싸우던 네즈코가 속수무책으로 동이 터오는 푸르른 들판 위에 내버려져 있는 상황이었다. 혈귀는 이 세계의 다종다양한 괴물들 중 뱀파이어로 분류될 수 있고, 그들은 해를 받으면 까맣게 타버린다. 선량한 혈귀라고 해서 다를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도공마을>은 놀라운 반전을 선보였다. 네즈코는 태양 아래에서 재가 되어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의사 타마요의 말처럼 “태양을 극복”한 것이다. 그리고 오히려 더 쾌활한 모습으로 빛나는 태양 아래 우뚝 섰다.
네즈코의 진화를 보고 놀란 건 시청자들만은 아니었다. 혈귀의 수장인 기부쓰지 무잔 역시 깜짝 놀란다. 수백 년 전 헤이안 시대에 불치의 병을 치료하는 과정에서 혈귀가 된 무잔은 영생을 누리게 되었지만 그 대가로 낮을 빼앗겼다. 그것이 너무나도 분통하고 억울했던 무잔은 자신의 피로 인간을 오염시켜 혈족을 늘리면서 햇볕을 견딜 수 있는 돌연변이가 등장하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그토록 오랜 시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만족스러운 결과는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태양 아래 당당한 네즈코가 나타난 것이다. 무잔은 이제 네즈코를 자기 안으로 흡수해 자신도 태양을 이기고자 한다. 그렇게 <도공마을>은 이후로 펼쳐지게 될 더 치열한 싸움을 예고하며 막을 내린다.
네즈코는 도대체 어떻게 태양을 이겨낼 수 있었을까? 앞으로 우리는 <귀멸의 칼날>(이하 <귀칼>을 따라가며 이에 대한 답을 만날 수 있게 될 테지만, 오늘 나는 이 작품의 열혈 시청자로서 하나의 가능한 답을 찾아보려고 한다.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있는 ‘비평가의 상상력’을 통해서 말이다.
사회적 현상이 된 <귀멸의 칼날>
<귀칼>은 이미 하나의 현상이 되었다. 어째서일까?
<귀칼>은 20세기 초, 다이쇼 시대 일본을 무대로 인간을 잡아먹는 혈귀에게 가족을 몰살당한 주인공 단지로가 혈귀가 되어버린 여동생 네즈코를 인간으로 되돌리기 위해 혈귀와 싸우는 내용을 따라간다. 단지로는 ‘혈귀 사냥꾼’이라 불리는 자경단인 귀살대의 일원이 되어 동료들과 함께 혈귀들을 하나하나 처치해 나간다. 혈귀 사회에선 무잔을 중심으로 그의 피를 나눠 받은 이들이 견고한 위계를 이루고 있다. 최상위 계급이라 할 수 있는 십이귀월(十二鬼月)은 상현 1~6등급과 하현 1~6등급으로 나뉘는데, 얼마나 많은 인간을 잡아먹었는가에 따라 점차 계급이 올라간다. 능력에 따른 계급사회인 셈이다.
이와 싸우는 귀살대 역시 계급사회를 이루고 있다. 우부야시키 가문의 당주가 지휘하는 귀살대는 아홉 명의 1급 무사 주(柱, 하시라)와 열 개 계급으로 나뉘는 일반 대원들, 그리고 무사를 지원하는 은(隱)으로 구성되어 있다. 같은 계급사회라고 해도 혈귀와 귀살대 사이에는 다른 점이 있다. 혈귀는 무잔의 총애를 받고 자신의 지위를 끌어올리기 위해 앞뒤 가리지 않고 경쟁한다면, 귀살대에선 각자의 자리에서 맡은 바 임무를 다하는 것으로 서로가 서로를 지탱해 준다. 단지로와 동료들은 힘을 합쳐 혈귀와 싸워 나가는데, 그렇게 한 번의 치열한 전투를 치를 때마다 전투력이 업그레이드되고 상대해야 할 혈귀의 레벨 역시 올라간다. 그런 의미에서 <귀칼>은 배틀 물의 장르 관습을 충실히 따르는 작품이다.
동시에 <귀칼>은 전통적인 소년 만화다. 소년 만화는 소년 주인공이 동료와 힘을 모아 모험을 하고, 목표를 달성하고, 성장해 간다는 내용을 주제로 한다. 상실과 좌절, 노력, 우정, 목표 달성으로 구성된 성장의 드라마야말로 소년 만화가 독자들에게 선사하는 예측 가능한 재미이자 꾸준히 사랑받아 온 이유다. 하지만 <귀칼>만의 특별함도 있다. 그건 대체로 단지로와 동료들의 품성과 마음으로부터 비롯된다. 혈귀가 된 동생을 나무박스에 넣어서 업고 다니면서 돌본다거나, 자신보다 타인을 위하는 친절한 마음을 표현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는 건 그간 소년 만화 주인공들에게서는 잘 보지 못했던 특성이다. 이야말로 단지로만의 개성이고, 작품의 독특한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요소다.
<귀칼>을 사랑하는 많은 이들이 바로 여기에서 이 작품의 인기 요인을 찾는다. 일본의 마케팅 전문가인 오케타니 이사오는 <귀칼>이 다른 소년 만화들에 비해 여성 팬이 많다는 사실에 주목하면서 <원피스>와 <귀칼>을 비교한다. 일본인이 매우 사랑하는 만화 중 한 편인 <원피스>의 경우에는 비전(vision)을 따라가는 비전형이라면 <귀칼>은 공감형이라는 것이다.1)
<원피스> 역시 대표적인 소년 만화이자 배틀물로, 주인공들은 숨겨진 전설의 보물을 찾아 “해적왕이 되겠다”는 원대한 꿈을 품고 있다. ‘대항해의 시대’에 바다를 지배하는 자가 되겠다니, 단지로의 소박한 마음과는 그 스케일에서 엄청나게 차이가 난다. 단지로의 목표란 그저 동생을 인간으로 되돌리겠다는 것뿐이다. 그 외에 무언가가 더 있다면, 동료들을 지키겠다, 죄 없는 사람들이 다치지 않도록 하겠다 정도랄까. 이건 다른 귀살대원들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귀살대는 경쟁보다는 협업한다. 가장 중요한 건 혈귀가 날뛰는 시절에 어떻게 우리, 즉 공동체의 안녕을 지킬 것인가이기 때문이다. <원피스>는 ‘노오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희망이 남아 있던 시대의 국민 만화였다면(물론 버블경제 붕괴 이후의 일본 대중 문화에 대해서는 더 많은 논의가 필요하다) <귀칼>은 그런 희망이 사라지고 소모적인 경쟁이 오히려 비전을 잡아먹는 시대에 등장해 사람들 사이의 관계가 끊기고 조각나버렸던 코로나 팬데믹을 지나면서 국민 만화가 되었다. 이때 서로가 서로를 보살피고 ‘우리’가 되어간다는 공존과 공생의 감각이 큰 위로를 주었던 셈이다. 그렇게 <귀칼>은 국경을 넘어 글로벌한 현상이 되어버렸다.
무한 경쟁의 시대, 함께 살아남는 법
코로나 팬데믹과 함께 귀칼을 본다면, 혈귀는 감염을 일으키는 바이러스의 은유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실은 좀 더 복잡한 존재들이다. 본래 인간이었던 그들에겐 다 저마다의 사연이 있다. 끔찍한 가난 때문에, 자신을 품어줄 따뜻한 가족을 원해서, 그릇된 욕심을 품어서, 때로는 그저 천성이 야비해서 등등, 그들은 아주 ‘인간적인 이유’로 혈귀가 되었다. 무잔은 그런 인간 내면의 약한 구석을 파고든다.
우리가 혈귀에 공감하고 그들에게 매혹되는 건 바로 그 인간성, 그 취약함 때문이다. 좀비영화의 인기와 함께 <귀칼>의 인기를 설명하는 경우도 있지만, 혈귀는 좀비라기보다는 뱀파이어다. 아무런 생각이나 계획도 없이 인육에 대한 욕구에만 이끌리는 좀비들과 달리 혈귀에게는 내면에 들끓는 욕망이 있고, 그 끝없는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부지런히 움직인다. 그들은 선과 악의 경계 위에서 자신의 내일을 결정할 오늘의 선택을 내린다. 매번 타인을 해치기로 마음먹는다는 점에서 잘못된 선택을 하는 그들은 때로 거울처럼 우리의 모습을 되비친다. <무한열차>에서 엿볼 수 있었던 단지로의 구름 한 점 없는 청명한 하늘 같은 내면은 경외심을 불러일으키지만, 그건 우리의 일상적인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우리는 은밀하게 혈귀에게 공감하고, 그들을 이해한다. 심지어 그들은 많은 경우 인간 사회의 정해진 질서로부터 소외되고 배제되어 온 자들이지 않은가.
그러나 누구나 혈귀가 되는 건 아니다. 이건 중요한 이야기다. 불리한 상황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불의와 싸우고 ‘함께’를 꿈꾸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내가 여기에서 실패하면 나의 동료들이 다음 싸움을 이어가 줄 거라는 믿음으로 버티면서, 타인을 잡아먹어야만 내가 살아남을 수 있는 괴물이 되지 않기로 선택한다. 그렇게 귀살대원들은 “너도 영생할 수 있다”는 혈귀의 유혹에 끝까지 저항한다. 이 부분이 요즘 한국 대중 문화에서 유행하고 있는 서사인 ‘회빙환’의 쉬운 선택과 <귀칼>의 어려운 선택이 갈라지는 지점이라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내가 발 딛고 있는 현실을 버리고 군림하는 삶을 택하는 ‘회빙환’의 주인공들과 달리 단지로와 그 동료들은 바로 여기, 본인들의 자리에서 소중한 것들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회빙환’의 많은 주인공 옆에는 가족이나 친구의 자리가 없었다. 단지로는 가족을 잃었지만, 다시 동료를 만든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다.
혈귀가 된 네즈코가 태양과 한 자리에 설 수 있게 된 것은 이 때문 아닐까. 뱀파이어물에서 타인을 희생시켜야만 자신을 지킬 수 있는 흡혈귀들은 바로 그 ‘사악함’ 때문에 신의 뜻의 상징이자 진리와 선의 세계를 뜻하는 태양 아래 존재할 수 없다. 태양이 그들의 본질인 사악함을 만천하에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네즈코가 태양을 이겨내기 직전, 그가 어떤 선택을 했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밤새도록 십이귀월 상현4 한텐구와 전투를 벌인 네즈코와 단지로는 네즈코를 살릴 것인가, 한텐구에게 쫓기고 있는 세 명의 도공(무사의 검을 만드는 이들)을 살릴 것인가의 기로에 서 있었다. 단지로는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고통스러워한다. 그때 네즈코가 단지로를 온 힘을 다해 도공들 쪽으로 차올린다. 그토록 애틋했던 오빠에게 자신이 아닌 도공을 살릴 용기를 준 것이다. 결국 그는 “태양을 극복”한 게 아니다. 그는 태양을 품은 것이다. 그 마음이 바로 태양이었으므로.
다이쇼 로망과는 다른 <귀칼>의 꿈
다이쇼는 격동의 시대였다. 그 시기에 일본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승전하면서 제국주의 5대국의 반열에 올라섰다. 그런 다이쇼를 배경으로 당시의 문화적 취향과 시대적 분위기를 그려내는 작품들을 ‘다이쇼 로망’이라고 하는데, 군국주의 팽창기를 그리움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전쟁과 식민지 수탈을 긍정하는 것 아니냐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귀칼> 역시 다이쇼 로망으로 읽힐 수 있다. 단지로가 하고 다니는 귀걸이에 그려져 있던 집중선 무늬가 일본 군국주의의 상징인 욱일기의 표현이라는 분석이 나온 배경도 여기에 있다. 이런 비판 때문에 한국판에서는 집중선 무늬가 지워졌다.
현재 일본에서 전범국의 과거를 미화하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는 현실을 생각하면, 나올 수 있는 우려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공동의 선을 추구하면서 자신의 자리에서 맡은 바 책임을 다하는 태도를 찬양하는 것은 자칫하면 개인을 희생시키는 전체주의에 대한 찬양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이런 위험을 예민하게 인식하면서도, 나는 <귀칼>을 지금/여기에서 어떻게 인간다움을 지키고 서로를 지지할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로 읽어보자고 제안하고 싶다. 타인을 밟고 일어섬으로써 레벨업, 즉 자기 계발을 이룩하고 혼자만의 영생을 추구하면서 ‘갓생’을 사는 혈귀와는 다른 삶이 있고, 쉽지 않더라도 그런 삶을 선택할 수 있다는 메시지가 어째서 우리의 마음속에서 이토록 강렬한 파장을 만들어내는지, 그 의미를 제대로 이해할 필요도 있기 때문이다.
1) 최원석, “코로나19로 마음 다친 이들에게 ‘공감의 힘’을 줬다”, EconomyChosun, 2020.11.16. https://economychosun.com/site/data/html_dir/2020/11/16/2020111600022.html (최종 검색일: 2024년 5월 3일.)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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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희정은 경희대학교 비교문화 연구소 학술연구교수이며, 미디어 연구x영상문화기획 단체프로젝트38의 멤버이다. 저서로는 『손상된 행성에서 더 나은 파국을 상상하기』, 『코로나 시대의 페미니즘』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