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이제 김 형사와 우리는 격의 없는 사이가 되었다. 우리는 전처럼 다투거나 경계하지 않아도 바리케이드를 사이에 두고 목청을 높일 수 있게 된 것이다. 종종 거리를 채우던 화염병이나 최루가스도 거의 없어졌다. 언제부터였는지 정확하지는 않다. 그런 것들엔 먼지가 쌓여있다. 다만.
노동자는 사장이나 대통령이 바뀌어도 똑같은 취급을 받는다. ‘임금이 늘지 않았느냐, GDP가 오르지 않았느냐’ 같은 말들이 은폐하는 시계(視界)에는 분명한 진실이 있다. 그러니까 한국사회의 1987년이 감행했고, 그 이후의 사회가 인민에게 무언가를 강요하거나 빼앗기 위해 저지른 ‘내적훈련’에는 통계나 데이터로는 파악할 수 없는 역설이 있다.
요컨대 1987년 이후의 모든 죄악은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일어났다. 정치에 대한 혐오와 무관심, 이견에 대한 증오와 적대, 멈추지 않는 양극화는 필연적이었고, 이제 우리는 그런 기만과 협잡의 악수에 익숙해졌다. 한국사회의 민주적 타협은 당연하게도 불완전했지만, 언제부터인가 그때를 ‘인민의 승리’라고 부르는 습관을 경계하게 되었다. 그것은 승리도 패배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1987 노동자 대투쟁. 출처: 노동자역사 한내
1984
조지오웰의 ⟪1984⟫는 지배체제(지배적인 인식)에 저항하고자 하는 개인이 일련의 과정을 통해 체제를 수용하고 끝내 긍정하게 되는 과정을 다룬다. ‘1984년의 세계’는 끊임없이 전쟁을 수행하는 전체주의 국가들에 의해 통제되고 있으며, 국가는 ‘빅브라더’ 라는 허구적 인물을 내세워 독재권력의 영구적인 집권을 위해 모든 사회를 철저하게 감시하고 통제한다.
빅브라더란 당이 스스로를 과시하기 위해 설정한 ‘가공인물’이다. 빅브라더 아래에는 인구의 2퍼센트 정도로 구성된 내부당이 있고, 그 아래에는 외부당이 있다. 내부당이 국가의 머리라면 외부당은 팔 정도에 해당한다. 외부당 아래에는 ‘노동자 또는 프롤’이라고 하는 전인구의 85퍼센트에 해당하는 대중이 있다.
“이중사고란 사람의 마음 속에 두가지 상반되는 생각을 동시에 품고 그것을 모두 수용하는 것을 뜻한다. 지배자들은 기억이 어느 방향으로 변경되어야 하는지 합의하고 있으므로, 그들 자신이 현실에 속임수를 쓰고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동시에 이중사고를 행함으로써 그들은 현실에 저촉되지 않았다는 생각으로 자신을 만족시킨다.
⟪1984⟫의 권력자들은 모두 기만과 협잡의 언어를 사용한다. 소설에서는 이것을 ‘이중사고’ 또는 ‘이중언어’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빅브라더’라는 ‘세계의 이상’을 구현하는 핵심적인 도구로 활용된다. 오늘날로 보면 ‘국민이 먼저입니다-’같은 레토릭들이 전형적인 이중언어에 속한다. 공교롭게도 현대사회의 권력자들은 이러한 이중사고와 이중언어의 전문가들이라고 할 수 있다.
지배권력의 핵심적인 체제전술이란 언어를 공격하는 데에 있다. 이제 당대의 권력은 필요에 따라 공공연히 위선의 외투를 입었다 벗었다 하는 모양이 되었다. 이들은 자신을 ‘역사의 진보’라고 소개하길 서슴지 않으며, 때로는 ‘87체제’의 담지자라고 자평하기도 한다. 심지어 트럼프는 미디어를 통해 ‘내가 너희에게 돈과 무기를 주었으니 나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말한다. 뜨악한 풍경이지만 무한한 거짓은 언제나 진실보다 한걸음 앞서있는 것이다.
절망의 목격
“낱말을 없애는 건 대단히 매력적인 일이지. (중략) 그러니까 좋고 나쁘다는 개념은 여섯 개의 낱말로 나누어지지만, 실제로는 단 한 낱말로도 충분하다는 얘기지.”
“자네는 신어를 만든 목적이 사고의 폭을 좁히는 데 있다는 걸 모르나? 결국 우리는 사상죄를 범하는 것도 철저히 불가능하게 만들 걸세.”
많은 사람들은 조지오웰이 ⟪1984⟫를 통해 미래를 예언했다고 표현한다. 그렇지만 ⟪1984⟫는 오히려 현실에 대한 미시적 상상력에 가깝다. 1984년의 눈은 ‘도래하지 않은 세계’가 아닌 ‘당대의 현실’을 향하고 있다. 노동자들은 스무살이 되면 노동을 시작하고, 서른살에는 결혼을 하며, 쉰살에는 중년이 되고, 여든살에는 숨을 거둔다. 그들의 마음을 차지하는 것은 힘든 노동, 가정에 대한 걱정, 이웃과의 사소한 말다툼, 영화, 축구, 소주, 로또이다. 그들을 통제하기는 어렵지 않을 것이다.
한국사회는 1987년의 경험을 통해 많은 것을 배웠다. 법복을 입은 숭고하고 불완전한 인간들이 원탁에 둘러앉아 인민의 운명에 관한 뻔한 문답을 반복해도, 그것을 그저 지켜보거나 응원할 수 있는 품위. 앞에서는 웃고 뒤에서는 욕할 수 있는 유연성. 필요에 따라 진보와 보수를 갈아입는 지성. 위원장의 독단을 민주적 결단으로 위장하는 배포.
그러나 이런 것들은 그저 하나의 연기에 불과하다. 어쩌면 ‘87체제’가 설정한 이 세계의 배역들은 하나 둘 목숨을 거두고 있는지도 모른다.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없으므로 절망적이다. 절망은 희망의 반대말일까? 1974년 한국의 시인인 김수영은 절망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졸렬과 수치가 그들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바람은 딴 데에서 오고
구원은 예기치 않은 순간에 오고
절망은 끝까지 그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다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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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조는 노동자역사 한내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다. 참세상은 이 글을 한내와 공동 게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