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23일과 24일, 미디액트와 충무로영상센터 오!재미동에서는 ‘장애인 미디어 리터러시, 접근을 넘어 제작자로 전진하기’라는 이름으로 포럼과 상영회를 개최했다. 이 행사는 미디액트에서 정기적으로 진행하는 임팩트 시네마 포럼의 일환으로, 미디액트에서 장애인 미디어교육이 시작된 지 20년이 되는 해를 맞이하여 장애인 미디어교육의 현황과 과제에 대해 되짚어 보고자 기획되었다. 특히 이번에는 필자가 속해있는 충무로영상센터 오!재미동과 협력하여 포럼뿐 아니라 장애인 당사자의 목소리를 생생하게 들을 수 있는 장애인 미디어교육 결과물 상영회까지 함께 진행했다.
장애인 미디어 리터러시 포럼 참석자들과 함께. 출처: 미디액트
이런 자리가 마련된 게 얼마 만일까.
2007년 미디액트에서 처음 미디어교육에 첫발을 들이게 된 나는, 장애인 미디어교육과 다양한 네트워크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던 2000년 중반부터 2010년 초반을 또렷하게 기억한다. 당시에는 전국미디어교육네트워크(이하 ‘미교네’)를 중심으로 전국적인 미디어교육 사례와 이슈 공유, 협력이 이루어졌고, 전국의 장애인, 장애인단체, 미디어교육 활동가, 미디어센터가 장애인의 커뮤니케이션 권리를 위한 미디어교육과 미디어운동을 통합적으로 이루어 내기 위해 장애인미디어운동네트워크(이하 ‘장미네’)를 출범하기도 했다.
2008년에는 ‘장미네’ 주관으로 중앙시네마에 자리한 인디스페이스에서 통합 상영회가 개최됐는데, 무려 6시간 동안 장애인 미디어교육 결과물과 장애인 활동가들이 만든 작품을 상영하고 주제 토론을 했다. 서울뿐만 아니라 전주, 부산 등 다른 지역의 장애 당사자와 활동가들이 한자리에 모였었다. 이런 규모가 아니더라도 해마다 장애인 미디어교육의 사례 공유나 이슈와 관련된 토론이 활발하게 이루어졌고, 장애인 미디어교육 교재 개발도 적극적으로 시도되었다. 그때 나는 특수학급 발달장애 청소년 미디어교육 강사로 수년간 활동하며, 학교를 졸업한 발달장애 성인들이 어떻게 일상적으로 미디어 활동을 지속해 나갈 수 있을지 동료들과 여러 시도들을 하고 있었다. 그 당시에도 장애인 당사자의 지속적인 미디어 제작 활동과 일상에서의 미디어 참여는 중요한 화두였다.
장애인 미디어교육의 첫 시작으로부터 20년, 부흥기라고 할 수 있는 때로부터 약 10년이 지나는 사이, 많은 것이 변화했다. 스마트폰만 있으면 누구나 크리에이터가 되어 자기 채널을 만들 수 있게 되었고, 무수히 많은 채널에서 수많은 목소리가 터져 나온다. 하지만 그만큼 다양한 목소리가 소통되고 있을까? 10년 전, 20년 전과 비교했을 때, 장애인 당사자의 이야기가 더 많이 만들어지고, 더 널리 전달되고 있을까? 글쎄, 잘 모르겠다. 오히려 자본 중심적인 미디어 구조와 편향된 알고리즘 안에서 소수의 목소리는 더욱더 들리지 않고 고립되어 가는 것만 같다.
이런 새로운 미디어 불평등의 시대에 장애인 미디어교육은 무엇을 향해가야 할까? 장애인의 기초적인 미디어 접근성 확보에서 더 나아가 장애인의 일상적 삶과 활동을 미디어로 담아내고 더 많은 이들과 공유하는 것은 어떻게 이뤄낼 수 있을까? 장애 당사자들이 전문 미디어 제작자로 자립하여 지속적으로 당사자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것은 어떻게 가능할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기획된 이번 포럼과 상영회는 크게 장애인 미디어교육과 활동 사례에 대한 발제와 장애인 미디어 창작자를 위한 인프라 현황을 공유하는 발제 그리고 장애인 미디어교육 결과물 상영으로 이틀에 걸쳐 이루어졌다.
장애인 미디어 리터러시 포럼 @미디액트
<발제1> '다큐멘터리 교육을 매개로 창작자로 거듭나기 : 노들장애인야학 영화반' 출처: 미디액트
포럼의 첫 번째 사례는 노들장애인야학 영화반 사례로, 강사인 이영욱 활동가가 교육을 통해 참여자들이 어떻게 창작자로 성장했는지 이야기 나눠주었다.
이영욱 활동가는 ‘노들야학 영화반에는 이미 영화를 찍고 싶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며, 교육의 시작부터가 달랐다고 말했다. 보통 미디어교육에서 참여자들로부터 하고 싶은 이야기를 끄집어내는 과정이 가장 어려우면서도 오래 걸리는 것을 생각하면, 노들장애인야학 영화반의 시작은 기존 미디어교육과는 정말 달랐다. 또 한 가지, 기존 미디어교육과 다른 게 있었다. 바로 강사와 참여자들의 ‘관계’다. 강사로 참여한 이영욱 활동가는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영상 활동가로 이미 참여자들과 어느 정도 관계를 맺고 있었고, 어떻게 보면 함께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었다. 그들은 단지 가르치고 배우는 관계가 아니라 ‘함께 목소리를 내는 동료’로서 그 사이에는 신뢰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 신뢰를 바탕으로 이영욱 활동가는 참여자들에게 영상 문법과 같은 것을 가르치기보다 그들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정확하게 서술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작품을 만들 수 있게 했고, 노들장애인야학 영화반의 제작활동은 교육에서 실질적인 창작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참여자들은 1년 반이라는 긴 시간을 거쳐 다섯 편의 작품을 완성했다. 여기에는 야학 교사들과 활동지원사들의 도움뿐 아니라, 참여자들이 전하고 싶은 이야기와 그 무게를 온전히 이해하고 그것이 영상에 담길 수 있도록 조력한 강사의 힘이 매우 컸을 거라 생각한다.
<발제2> '마을공동체 구성원으로서 장애인, 비장애인의 공동작업: 강화마을협동조합' 출처: 미디액트
긴 시간, 서로의 곁을 지키는 ‘관계’의 힘은 두 번째 발제 사례였던 ‘강화마을협동조합’의 발달장애인 미디어교육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강화마을협동조합에는 4년째 발달장애인들과 함께 미디어교육을 진행하며 해마다 영화를 만드는 모임이 있다. 이름하여 ‘강화도의 힘’이다. 첫 시작은 엉성했고, 두 번째 해에는 싸움이 일어났지만 세 번째 영화 작업부터는 진솔한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단다. 몇 년 간의 긴 교육과 활동을 통해 서로 소통하지 않던 참여자들 사이에 직접적인 대화가 오가기 시작했고, 각자의 재능과 관심사가 조금씩 발견되며 서로 어울려 작업하는 것도 가능해졌다. 물론 이러한 변화는 단지 미디어교육이 몇 년간 진행됐다고 해서 생긴 것만은 아닐 것이다. 강화마을협동조합은 지역 사회 안에서 장애인의 접촉면을 넓히고 미디어제작 영역 뿐 아니라 다양한 방식으로 장애 당사자가 자립하는 것을 주요한 활동 목표로 잡고 있으며, 그 안에서 ‘서로 돌봄’을 지향하며 다양한 문화‧체육 활동과 작업을 해나가고 있다. 일방적으로 도움만 받는 존재가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돕는 공동체가 존재했기에 ‘강화도의 힘’의 장애 당사자들은 이런저런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그들의 이야기를 영상으로 담아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결과물은 영화제에서 상을 받기도 하고, 지역 문화제에서 상영되기도 하며 경계의 벽을 허무는 데 힘을 보태고 있다.
<발제3> '발달장애인 미디어교육을 위한 영상장비 쉬운말 매뉴얼 제작: 너나들이' 출처: 미디액트
‘모두를 위한 미디어 매뉴얼’을 만든 마을방송국 ‘너나들이’의 사례는 미디어교육이 끝난 이후, 장애 당사자가 스스로 콘텐츠 제작을 지속해나가기 위해 필요한 조건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게 하는 사례였다.
지역 안에서 장애인들과 함께 지역 명소를 탐방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오디오 드라마나 유튜브를 제작하는 활동을 하고 있다는 ‘너나들이’는 발달장애인 참여자들이 수업에서 배운 기술을 스스로 활용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지 고민하던 활동가들은 항상 옆에 두고 볼 수 있는 매뉴얼을 떠올렸고, 발달장애인의 눈높이에서 그들이 활용할 수 있는 ‘쉬운 말 매뉴얼’을 기획, 편찬했다.
발달장애인의 경우 여러 번의 반복적인 교육을 통해 기술을 습득하는 것이 가능하지만 짧은 교육에서 자유자재로 활용할 수 있는 기술 습득까지 이루어 내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쉬운 말 매뉴얼이 있다면, 몇 번의 반복적인 교육과 실습을 거친 후 스스로 무언가를 조작하고, 활용하는 게 어렵지 않을 수 있다. 실제로 매뉴얼을 활용한 이후 장애 당사자들의 자발적인 활동이 조금 더 활발하게 이루어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물론 이것이 전부가 될 수는 없겠지만, 장애인들의 지속적인 활동과 성장을 고민할 때 장애 당사자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얼마나 다각적으로 접근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발제4> '장애인 전문제작자를 위한 제작지원 환경에 대한 제언: 데프미디어' 출처: 미디액트
농인독립영상제작단 ‘데프미디어’ 단장이자 미디어활동가, 농문화운동가인 박재현 감독은 어떻게 영화라는 세계에 발을 담그게 되었는지를 시작으로 그동안의 활동을 공유하며, 자신이 경험한 것을 영화로 만드는 것이 어떤 의미였는지 이야기해 주었다. 농인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며 농인으로서의 자부심을 찾게 되었다는 그의 이야기는, 그 어떤 이야기보다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장애인의 제작 활동 활성화를 위해 그가 제안한 것 중, 농인이 어디에 가든 수화통역을 지원해주는 ‘수화통역 바우처’나 경제적 부담 없이 창작활동을 할 수 있는 ‘문화 콘텐츠 제작 바우처’와 같은 실질적 지원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장애 당사자가 전문 제작자로 자립하고 성장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신체적, 물리적, 경제적, 사회적 조건이 모두 다른 장애인들 개개인에게 맞는 지원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기존 비장애인 중심의 제작지원과는 완전히 다른 접근이 필요할 것이다.
<발제5> '장애 미디어 창작자를 위한 지원제도, 인프라 현황과 제언' 출처 : 미디액트
미디액트 장은경 사무국장의 마지막 발제에서 우리는 그 가능성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었다. 영국의 ‘독 소사이어티(Doc Society)’의 주도로 설립된 ‘포워드 독(FWD-Doc : Documentary Filmmakers With Disabilities)’은 농인 및 장애인 다큐멘터리 영화제작자와 협력자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들이 광범위한 엔터테인먼트 산업 안에서 포용될 수 있도록 구체적인 전략과 실천을 담은 툴킷을 만들어 제공하고 있다. 툴킷에는 장애인 인재와의 협력 방법, 영화 평론가를 위한 툴킷, 팀원들이 영화 제작과정을 더 접근하기 쉽게 만드는 방법 등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포워드 독’은 또한 포드 재단의 후원을 받아 장애인 미디어 제작자에 특화된 펀드를 조성하기도 했다. 사전 연구를 바탕으로 만든 지원 내용에는 일반 제작 지원에는 포함되지 않았던 수많은 항목이 들어있다. ‘보조 장비, 기술/소프트웨어’, ‘보조장비 보험’, ‘보호자 여행 비용’, ‘생활비 – 임대료, 식비, 자동차 대출, 보험료, 공제금’, ‘예상치 못한 의료비’, ‘휠체어 접근이 가능한 검은색 차량’, ‘반려동물을 포함한 부양가족 돌봄’, ‘정신 건강 지원’ 등 여기서 일일이 열거하지 못한 수많은 항목들이 지원된다.
사례는 또 있다. Inevitable Foundation 이라는 장애인 작가의 영상산업 내의 성장과 지원을 위한 비영리 단체는 산업계의 다양한 기금 후원을 통해 장애인 작가의 경력별 맞춤형 지원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장애인 작가와 업계를 직접 연결하는 컨시어지 프로그램도 운영한다고 한다. 이 단체에서는 넷플릭스와 협력하여 신진 장애인 영화 제작자에게는 단편영화 제작 배급지원, 첫 장편 영화 제작에는 자금, 멘토링, 커뮤니티를 제공하는 프로그램을 만들기도 했다.
안타깝게도 국내에는 아직까지 장애인 영상제작자를 위해 특화된 지원제도는 마련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이러한 지원제도가 존재하고, 이런 방식의 지원도 가능하다는 것을 더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된다면, 그리고 그에 대한 수요와 요구의 목소리가 점점 커진다면 우리나라에서도 변화가 시작될 수 있지 않을까?
장애인 미디어교육 상영회 @오!재미동
<장애인 미디어교육 상영회> 관객과의 대화 출처: 오!재미동
포럼 다음 날 진행된 상영회에서는 노들장애인야학 영화반의 작품 중 <우리는 말한다>와 <4월 어느 날 패러글라이딩> 두 개 작품이 상영되었다. 시설에서 살았던 세 사람의 경험을 주고받으며, 장애인거주시설이 어떤 곳인지, 그곳에서 인간이 가진 기본적인 권리가 어떻게 침해되었는지 낱낱이 고발하는 <우리는 말한다>의 조상지 감독은 두 번째 작품의 편집 작업 때문에 다른 지역에 내려가 관객과의 대화에 참여하지는 못했지만, 서면으로 작품의 기획의도와 현재 작업 중인 두 번째 작품에 대해 보내왔다. 평소 익스트림 스포츠를 즐긴다는 오지우 감독의 패러글라이딩 도전기를 담은 <4월 어느 날 패러글라이딩>은 패러글라이딩을 하는 순간의 자유로움을 보여주지만, 그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마주하는 불편함과 어려움을 기록하고 있다. 관객과의 감독에 참여한 오지우 감독은 특유의 쾌활한 에너지로 작품 안팎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멀리 바다 건너 강화도에서 온 ‘강화도의 힘’ 팀은 세 번째 작품 <막달레나의 세계>로 발달장애인의 자립 시도에 관련된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장애인 미디어교육 교사이자 장애인시설 활동가로 활동했던 감독이 경험한 장애인 미디어교육과 장애인의 미디어 현실에 대한 고민과 딜레마가 고스란히 담긴 <장애인, 미디어, 교육>은 절대 가볍지 않은 웃음과 고민을 함께 안겨주었다.
이날 상영회에서 상영된 것과 같은 작품들이 더 많이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그리고 박재현 감독도 이야기했던 "Nothing about us, without us(당사자 없는 당사자 이야기를 말아주세요)"라는 말이 힘을 갖기 위해선, 장애 당사자가 스스로 그리고 지속적으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시스템이 반드시 만들어져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처음의 질문이 또다시 따라온다.
포럼에 참석했던 한 참여자의 말이 떠오른다. 장애인 예술 관련 단체에서 활동 중이라는 그는 포럼에 나온 모든 사례와 이야기들에 매우 공감이 되었다고 말하며, 마지막으로 이런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이걸 누가 할 수 있을까요?”
그날 나는, 미디어센터가 조금 더 앞장서서 그러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해보겠다고 말했다. 그건 미디어센터가 응당 해야 하는 역할이니까. 하지만 개별 미디어센터의 노력만으로는 부족하다. 우리 사회에 더 많은 목소리가 소통되어야 한다고 믿는 수많은 개인들과 지역 공동체, 미디어센터, 미디어 활동가 그리고 장애 당사자들이 함께 목소리를 내야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지속적으로 고민하고, 요구해야 한다.
포럼에 참여해 준 50여 명의 사람들, 포럼 다음날 장애인 미디어교육의 결과물을 보기 위해 먼 걸음을 해준 20여 명의 미디어센터 관계자와 제작자, 장애인 단체 회원들. 어쩌면 바로 이들이 함께 변화를 만들어 갈 수 있는 소중한 씨앗인지도 모른다. 다양한 개인과 단체, 활동가, 미디어센터가 모두 함께 모여 공동의 목표를 세우고 협력하는 네트워크가 있었던 10여 년 전을 떠올리며, 다시 한 번 새로운 네트워크를 꿈꿔본다.
장애인 미디어교육 상영회 참석자들과 함께. 출처: 오!재미동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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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다경은 시민방송 RTV ‘미디어로 여는 세상’ PD로 전국의 미디어교육 현장을 카메라에 담으며 미디어교육을 알게 됐다. 미디어교육 강사 겸 기획자로 곳곳에서 활동하다가 지금은 충무로영상센터 오!재미동에서 교육 프로그램 운영을 담당하고 있다. 참세상은 이 글을 공동 게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