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파 입장에선 모처럼 반가운(?) 해외 소식이다. 영국에서는 노동당이 모처럼 집권했고 프랑스에선 신인민전선이 원내 1당을 차지했다. 온통 우파 중심의 뉴스가 이슈를 주도하는 가운데 유럽의 일부 국가에서나마 다시 뿌리를 좌파에 둔 세력들이 정치적 성과를 거두는 일이 일어났다니, 고무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아마 이들의 성공 비결에 대한 다양한 분석이 나오고 있을 테고 또 앞으로 더 나오겠지만, 이전 시기에 비해 흥분감은 덜하다는 게 솔직한 심경이다. 여기에도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가령 영국의 신임 총리로 등극한 키어 스타머는 제2의 토니 블레어가 아니라고 할 수 있는가? 그가 제2의 토니 블레어라면 과연 이것은 좌파(혹은 그 비슷한 무엇)의 승리라고 말할 수 있는가? 제러미 코빈과 주변 인사들을 ‘반유대주의’(아직도!)라는 딱지를 붙여 체계적으로 내쫓은 것은 좌파의 처신인가? 애써 승리라고 말한다 해도, 그 승리는 언제까지 이어지는 것일까?
우리는 이미 블레어주의가 지배했던 노동당의 시대를 이전에 경험했다. 따라서 지금 노동당이 거둔 ‘승리’도 그 끝이 어떠하리라는 것 정도는 충분히 추정할 수 있다.
그러니 고개를 젓게 되는 거다.
"새로운 영국 노동당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출처: 영국 노동당 홈페이지
프랑스 좌파들의 승리는 ‘극우 1당을 저지하자’는 캠페인 하의 선거연합에 힘입은 바다. 마린 르펜과 그 일당들이 주장하는 대로 결선투표제와 마크롱 일파가 이끄는 앙상블과의 동맹이 없었으면 1당의 성과는 기대하기 어려웠다. 아이러니는 애초에 프랑스 좌파에게 있어 정치적 기회는 마크롱 정권의 실정에서 왔다는 것이다. 그게 없었으면 프랑스 좌파에 우호적인 정세는 조성되기 어려웠다. 물론 이게 오직 단 하나뿐인 승리 이유라고 말하는 것은 불공정할 것이다. 때가 오더라도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성과를 거두기 어렵다. 프랑스 좌파들이 나름대로 끈질기게 조직을 재건하고 자기들끼리 구도를 재편하기로 합의한 과정을 평가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어쨌든, 마크롱 정권의 실정에 반대하기 위하여 시작한 선거 캠페인이 어느새 ‘극우를 막자’는 것으로 전환돼 마크롱 정권과 손을 잡고 일을 도모하는 걸로 끝났다는 것은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한다. 더군다나, 어려운 건 이제부터다. 마크롱 정권은 총리 지명권을 갖고 좌파의 분열을 도모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원내에 진보정당이 1석도 남아있지 않게 된 한국 정치 주변의 처지에서 보면, 영국과 프랑스의 상황이 부럽게 느껴지는 것은 사실이다. 영국과 프랑스 좌파들의, 자기들끼리의 신경전이나 갈등도 우리 입장에선 배부른 고민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한국 진보정당의 선전을 기원하는 이들이라면 외국의 이러한 소식을 보면서 뭐 하나라도 벤치마킹할 거리가 없을까 하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갖게 된다. 지금까지 늘 그랬다. 정말로 슬픈 것은 이번에는 그런 생각을 할 틈도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거다.
영국 노동당은 한때 재집권이 구조적으로 불가능할 것이라 평가받았다. 분리주의가 유행하면서 주요 지지 기반인 스코틀랜드에서의 선전을 장담할 수 없게 됐기 때문이다. 보수당이 나름대로 엘리트주의의 미덕을 발휘하며 노동당과 중도적 유권자층에서의 승부를 내려 할 때, 노동당은 좌측으로 떠밀려 가야 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브렉시트 이슈와 지역주의 혹은 분리주의의 부상 때문에 전통적 지지 기반을 확고히 장악하지 못했다. 제러미 코빈은 좌파-포퓰리즘(샹탈 무페의 방식으로 표현한다면 말이다)으로 이러한 교착을 돌파했다. 인민이냐 기득권이냐의 방식으로 전선을 다시 그은 것이다. 코빈의 해법은 노동당의 위기를 이전에 생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돌파할 수 있게 했지만, 동시에 격렬한 반대를 불러일으켰다. 그런데 키어 스타머가 최근까지 주도한 작업은 사람들이 노동당을 반대할 이유(즉, 제러미 코빈)를 없애는 것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었다. 이 두 가지 모순되면서도 연속된 조치가 노동당 부활의 씨앗이 된 것은 아이러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어렵지 않다. 상대편에서 쉽게 상상하기 어려운 자멸적 정치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노동당 재집권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보리스 존슨, 리즈 트러스(최단명 총리를 기록했다), 리시 수낵으로 이어지는 보수당 정권은 기이하고 황당했으며 무능했다. 보수당 지지층 일부는, 에드 밀리밴드 시절 노동당 지지층이 분열했던 것처럼, 나이절 패라지가 이끄는 영국개혁당으로 빠져나갔다. 이러니 노동당이 이기지 않는 게 이상한 것이다. 오직 보수당의 자멸 덕에 노동당이 성과를 거뒀다고 하려는 게 아니다. 노동당이 위기일 때 코빈이 전선을 재정의해 어려운 상황을 돌파했고, 이어 보수당에 위기가 찾아왔을 때 스타머가 노동당을 중도화해 득표력을 높였다는 것이다. 그렇더라도 앞서 짚었듯 그 ‘중도화’의 결론이 진보가 더 이상 진보가 아닌 게 되는 것이라고 한다면, 노동당의 사례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그다지 많지 않을 것이다.
프랑스의 경우로 옮겨 가면 생각이 더 복잡해진다. ‘극우를 막기 위해 뭉치자’는 식의 슬로건은 이미 우리에게도 익숙하다. 선거 때마다 나오는 ‘비판적 지지’ 논리와 겹치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다만 프랑스와 한국의 정치 현실이 다른 점은 분명히 있다. 프랑스의 경우는 누가 ‘극우’이고 누가 ‘공화국’인지에 대한 정의가 비교적 분명하다. 아무리 짧게 잡아도 그것은 장 마리 르펜의 시대로부터다. 그러나 한국 정치는 각자가 서로를 가리키며 ‘극우’라고 주장하는 판이다. 가령 민주당 지지자들이 보기에 윤석열 대통령은 ‘코리안 트럼프’인데, 반대쪽에서는 이재명 전 민주당 대표와 이른바 ‘개딸’들을 트럼피즘에 비유한다.
과거의 진보정당 세력은 국민의힘 계열 정당을 수구로, 더불어민주당 계열 정당을 자유주의 정당으로 규정하는 것에 큰 의문을 품지 않았다. 그러나 문재인 정권 이후에는 어느 쪽을 자유주의 정당이라고 해야 할지 혼란을 겪고 있다. 이런 상황에 ‘극우를 막기 위한 선거연합’이라는 전술이 가능할까? 국민의힘, 더불어민주당 양쪽 모두에 ‘진보 출신’을 자처하는 사람들이 몸을 담고 있는 걸 보면 답이 나온다. 심지어 왕년의 진보 논객이 전당대회에 출마한 한동훈 전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의 ‘스피커’ 노릇을 하는 시대 아닌가.
이런 상황을 보면 해외 사례에서 좌파 혹은 그렇게 불리는 자들의 선전에 대해서는 진보정당의 전술이라는 점에서 아이디어를 얻긴 어렵고, 현대 대의정치의 근본적 한계를 다시 한번 확인하는 계기로 삼는 게 최선일 것 같다. 현대의 대의정치는 상대에 대한 반대를 통해 ‘우리 편’을 조직하는 것을 근본 원리로 삼고 있다. 국민의힘은 “이재명 집권만은 막아야 하니 뭉치자”고 하고, 민주당은 “국민의힘 반대하는 사람 다 모여라”라고 하는 식이다. 영국과 프랑스 사람들이 겪은 선거도 기본 문법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뭔가를 해내겠다는 걸 중심에 놓고 동의 여부를 기준으로 모인 것이라기보다는, 집권 세력을 반대하거나 극우를 막기 위해 행동에 나선 것이기 때문이다.
계속 그래왔다. 에마뉘엘 마크롱은 한국에선 제3세력의 화신과 같은 인물로 묘사된다. 제2의 마크롱이 되라고 하는 것은 한국 정치에선 덕담이다. 양당 체제의 한계를 딛고 대안적 정치를 통해 권력을 잡으라는 취지의 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냉정하게 보면 애초에 프랑스에서 마크롱의 성공은 니콜라 사르코지와 프랑수아 올랑드로 대표되는 세력 모두에 대한 반대라는 측면에서 이뤄졌다. 시간이 흘러 이제 마크롱이 위기를 겪게 된 상황에서 ‘마크롱에 대한 반대’가 좌우 양쪽으로 뻗어나간 게 이번 선거 결과다. 영국 정치도 결국은 마찬가지다. 서로를 반대하는 세력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썰물과 밀물처럼 오가고 있을 뿐인 거다.
물론 물이 밀려 들어올 때 배를 띄우기 위해선 그만큼 철저한 준비가 필요하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준비해야 할까? 누군가를 반대하는 걸로 자기편을 조직하는 현대 대의민주주의의 문법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면, 누구를 어떻게 무엇을 통해 반대할 것인가에 대한 자기 구상을 갖는 것, 즉 전선을 명확히 하는 게 맨 먼저 할 일이다. 이건 국민의힘이나 민주당 중 누구를 반대하고 누구와 연합할 것인지를 선택해야 한다는 얘기가 아니다. 앞서도 다뤘듯, 그런 논의는 오늘날 한국 정치의 수준에선 사치다. 대안적인 진보 정치에서 누군가를 반대하는 것은, 누군가를 제대로 대변하는 것으로만 가능하다. 그런데 진보 정치가 대변해야 할 대상들은 오늘날 제각기 분절된 현실 인식 속에 갇혀있다. 그렇다면 ‘반대의 전선’ 유지를 위해서라도 이들을 하나로 묶을 명분과 전략을 갖는 게 필요할 것이다. 이를 통해 사람들이 정치의 주인으로 직접 나설 수 있도록 하는 프로그램을 가져야 한다.
이걸 제대로 해내는 게 실력이다. 영국과 프랑스의 좌파들도 어떤 형태로든 이런 일을 오랫동안 시도했다. 집권이나 1당 얘기보다 이게 더 중요한 대목일 수 있다.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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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하는 정치·사회 평론가, 칼럼니스트다.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등에서 일하며 한국의 진보정치가 현실적 대안으로 자리 잡는 데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자 했으나 무엇이 잘못됐는지 기대만큼 잘되지 않았다. 지은 책으로는 『저쪽이 싫어서 투표하는 민주주의』, 『냉소 사회』, 『레닌을 사랑한 오타쿠』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