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몇 년 동안 자본주의의 ‘죽음’에 대한 논의가 많았다. 그 죽음이 임박했는지, 진행 중인지, 혹은 이미 끝난 것인지에 대한 이야기다. 후자의 입장에 선 인물이 바로 경제학자이자 전 그리스 재무장관이며, 현재 ‘유럽의 민주주의 운동 2025’(DiEM25) 사무총장인 야니스 바루파키스(Yanis Varoufakis)다. 바루파키스는 자본주의가 이미 죽었다고 확신하며, ⟪기술봉건제: 자본주의를 죽인 것은 무엇인가⟫(Technofeudalism: What Killed Capitalism)에서 자본주의가 ‘클라우드 자본(cloud capital)’, ‘클라우드 지대(cloud rents)’, 그리고 AI가 주도하는 전자 감시 체계로 대체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것이 결코 좋은 일이 아니라고 말한다.
바루파키스에 따르면, 기술봉건제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보다 훨씬 더 착취적이다.
“자본가는 자신의 노동자를 착취할 수 있을 뿐이지만, 클라우드 자본가는 보편적 착취로부터 이익을 얻는다. 즉, 클라우드 농노들은 무료로 일하며 클라우드 자본의 축적량을 늘리고, 이를 통해 클라우드 자본가들은 자본가들이 노동자로부터 이미 추출한 잉여가치를 더욱 많이 가로챈다. 이 노동자들은 이미 클라우드 프롤레타리아로 전환되어, 클라우드 자본이 이끄는 노동 속도에 맞춰 일하고 있다.”
출처: Unsplash, Caleb Jack
‘클라우드 자본가’(cloudalist)란 아마존, 알리바바, 쇼피파이, 페이스북/메타, 애플, 구글 등 디지털 거래 플랫폼을 소유하고 통제하는 사람을 말한다. 이 모든 플랫폼은 ‘클라우드 지대’를 부과하는 ‘영지’(fiefdom)다. 임차인들은 봉건 영주에 종속된 봉신처럼 행동해야 하고, 나머지는 모두 클라우드 자본가들에게 무임금 노동을 강요받는 농노에 불과하다. 따라서 기술봉건제의 ‘토대’는 다름 아닌 ‘정화된 기술적 공포’(sanitized tech-terror)다.
전통적 시장이 붕괴하면서 판매자들은 디지털 플랫폼에서 ‘공간’을 임대해야 한다. 디지털 기기를 가진 누구나 결국 데이터를 저장하기 위해 클라우드 공간을 빌리게 된다. 우리는 이메일 계정, 파일, 문서, 사진 저장 공간을 임대하고, 태블릿·폰·컴퓨터 등 생활 전반을 위한 접근 권한을 임대한 채 산다. 클라우드 자본가들은 AI가 채굴한 데이터를 통해 우리를 조작하고 착취하며, 기계가 자신의 목적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확장시키는 동시에 인간의 자유와 자율성의 영역을 점점 더 축소시킨다.
이 문제의 함의를 생각해보자. 무차별적 데이터 수집은 벤담의 파놉티콘을 훨씬 능가하는 거의 전지적 시점을 제공한다. 거대 언어 모델의 창조자들이 자신들이 의식과 의지, 욕망을 가진 새로운 생명체를 만들어냈다고 믿는 것도 놀랍지 않다. AI에게 ‘권리’를 부여하자는 논의까지 나온다. 그러나 이런 말은 인간 자체가 기본적 인권조차 침해당한 채 반(反)유토피아적 세계에서 방황하는 현실 속에서 아이러니하고 잔혹하다. “생명 창조”라는 주장 자체가, 인간의 자유와 존엄을 위협해온 체제의 주된 수혜자들로부터 책임을 벗기려는 유용한 도구로 작동하고 있다.
바루파키스의 주장이 옳은지 확신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우리가 신자유주의 자본주의를 넘어, 그보다 훨씬 나쁜 무언가를 마주하고 있다는 점은 분명히 논의할 가치가 있다. 나는 이 변화가 인간 의식에 미치는 몇 가지 효과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미래의 심리적 차단’(psychological foreclosure)을 포함한다. 나는 이전에 신자유주의적 합리성이 우리를 아무 데로도 갈 수 없게 만들며, 물질적 조건이 점점 더 제약될수록 사고 자체가 끝없는 인지 부조화의 논리적 순환에 부딪힌다고 주장했다. 이 끝없는 순환은 구조적으로 부과된 불안정 상태를 극복하려는 시도가 실패할 때 발생한다. 예를 들어, 주거와 의료가 기본적 인권이 아닌 상품으로 존재할 때, 질병이나 사고 하나가 이를 감당할 수 있는 수단을 앗아갈 가능성을 막을 방법은 없다. 의료비가 터무니없이 비쌀 때, 파산은 건강보험이 있든 없든 현실적인 위협이다. 이 끝없는 인지 부조화의 순환을 피하는 유일한 방법은 ‘마법적 사고’(magical thinking)에 의존하거나, 무제한적 개인 가능성의 허구적 서사에 기대거나, 아예 사고를 멈추는 것이다.
이 끝없는 논리적 순환은 개인의 안전을 확보하려는 욕망을 중심에 둔다. 반면 ‘심리적 차단’은 더 집단적인 현상을 의미한다. 그것은 일반화된 혼란, 통제력 상실, 희망 상실, 그리고 살 만한 미래를 상상할 능력의 상실이다. 단지 좋은 삶(eudaimonia)뿐 아니라, 어떤 형태의 ‘삶’ 자체를 상상할 수 없게 되는 집단적 실패를 뜻한다. 그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포함한 무수한 종(種)을 파괴하고, 행성을 빠르게 훼손하는 체제에 강제로 참여해야 하는 현실이다. ‘끝없는 논리적 순환’이 소수만이 이기고 다수가 패배하는 자본주의의 제로섬 게임을 상징한다면, ‘미래의 심리적 차단’은 문명 자체의 붕괴를 뜻한다. 이 시나리오에서 우리는 모두 패배자다.
이러한 차단은 피할 수 없는 것이 아니다. 체제를 전복할 수 있는 상상 가능한 방법만 있다면 말이다. 그러나 바루파키스는 이렇게 말한다. “좋았던 옛 나쁜 시절로 돌아가는 일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중앙은행 자금의 홍수가 이미 클라우드 자본을 임계질량으로 성장시켰기 때문이다.” 장기적인 결과는 예측 가능하며, 피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심리적 차단을 유발하는 것은 단지 클라우드 자본의 패권성 때문이 아니라, 모든 미래의 궤적이 클라우드 자본의 상승이라는 단 하나의 방향으로만 수렴한다는 인식 때문이다.
그 결과는 명확하다. 소수에게는 부와 권력의 기하급수적 확대, 다수에게는 의미 있는 개선의 가능성조차 없는 사회. 오히려 더 많은 결핍, 박탈, 트라우마, 무력감, 그리고 죽음. 남은 자유는 AI 기반 시스템의 예측 불가능하고 불투명한 알고리즘 개입과 피드백 루프에 맞서 헛되이 발버둥치는 사이, 가느다란 실에 매달리게 될 것이다. 이러한 단 하나의 궤적은 곧 ‘미래의 심리적 차단’을 의미한다.
‘심리적 차단’이라는 개념은 데이비드 그레이버(David Graeber)가 2014년 ⟪부채: 첫 5,000년의 역사⟫(Debt: The First 5,000 Years)에서 이미 예견한 바 있다. 그는 이렇게 썼다. “사실 지난 30년간 우리는 절망을 만들어내고 유지하기 위한 방대한 관료적 장치를 구축해왔다. 그것은 가능한 대안적 미래에 대한 모든 감각을 파괴하기 위해 설계된 거대한 기계다.” 그레이버는 자본주의 시대가 ‘관리 봉건주의’(managerial feudalism)로 대체되었다고 결론짓는다. 가능한 대안적 미래의 상실은 닐 발렐리(Neil Vallelley)의 ⟪무망주의⟫(Futilitarianism)에서도 중심 주제다. 유사한 논의는 프리캐리티 랩(Precarity Lab)의 ⟪디지털 불안정성 선언문⟫(Digital Precarity Manifesto)과 ⟪테크노프리커리어스⟫(Technoprecarious)에서도 발견된다.
클라우드 자본 패권의 한 가지 두드러진 결과는 기술봉건제가 다가오는 기후 재앙을 막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온라인 플랫폼과 무장화된 AI는 엄청난 양의 전력을 소모하며, 이는 기술봉건제의 불길을 더욱 키운다. 그것만으로도 ‘미래의 심리적 차단’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기술봉건제의 함의는 분명히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이다. 그러나 바루파키스가 말하듯, 그것은 ‘자유주의적 개인의 죽음’을 초래하는 형이상학적 결과이기도 하다. 사생활의 상실과 그에 따른 명시적 명령 ― “모든 선택은, 목격되었든 아니든, 정체성의 큐레이션 행위가 된다” ― 때문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자. 자유주의적 개인의 죽음은 ‘진정성의 죽음’뿐 아니라 ‘진정성의 가능성의 죽음’을 의미한다. 모든 가능한 세계가 사이버공간이라는 반향실, 거울의 전당 안에 갇히며, AI가 만들어낸 콘텐츠와 다른 모든 것의 경계가 흐려진다. 이 세계에서 사생활은 20세기의 유물로만 기억된다. 모든 대안적 미래가 점점 상상 불가능해지는 세계에서, 진실과 시뮬라크라를 구별하는 인식론적 문제는 더 절박해질까, 아니면 덜 절박해질까?
대안적 미래를 상상할 수 없다는 것은 곧 자유의 개념 자체, 그리고 그것을 행사할 개인의 개념이 사실상 소멸했음을 뜻한다. 어떤 형태의 집단적 자치도 이제는 환상 속으로 밀려난다. 클라우드 자본가와 봉신·농노 사이의 권력 균형은 홉스의 리바이어던처럼, 대중의 무력한 저항 행위 속에서 오히려 강력해진다. 바루파키스는 옳다. 기술봉건제는 좋은 소식이 아니다. 그것은 공동 자치로부터, 자유와 존엄으로부터, 생명을 포용하는 가치로부터 멀어지는 운동이다.
사유란 상상된 미래를 향한 초월을 의미하며, 이는 허위적 초월의 환상과 다르다. 우리는 기 드보르(Guy Debord)의 ⟪스펙타클 사회⟫ 속에 남겨져 있다. 드보르는 이렇게 썼다. “이제 누구도 타인에 의해 인식될 수 없고, 모든 개인은 자기 자신의 현실조차 인식할 수 없게 된다.” 스펙타클(스펙타클은 현실이 이미지로 대체된 사회, 즉 인간이 직접적인 삶의 경험 대신 이미지·소비·미디어를 통해 간접적으로 살아가는 체제를 의미)이 의식을 대체하기 때문이다. 드보르(1931–1994)는 인터넷 시대 이전에 글을 썼다. 오늘날에는 사이버공간에 자리 잡은 기술봉건적 대중 스펙타클이 의식을 대체한다. 그것은 감시와 지대를 통해 물질적 현실의 모든 측면을 조작할 뿐 아니라, 의식을 갖지 못한 기술을 통해 의식 자체를 전복함으로써 다른 모든 미래의 가능성을 차단한다.
HAL 9000(스탠리 큐브릭(Stanley Kubrick) 감독의 1968년 영화 <스페이스 오디세이>에 등장하는 인공지능 컴퓨터)이 통제권을 장악할 때, 이를 끌 수 있는 데이브 보먼(영화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주인공, 우주비행사)은 없을 것이다. 심지어 그 장악이 이루어졌다는 인식조차, 아무런 유사성도 없는 또 다른 스펙타클로 전환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미래의 심리적 차단’이다.
그런 차단이 불가피한 결말일까? 기술이 우리를 피할 수 없이 논리와 의미 너머로 밀어낼까? 아니면 연대와 공감에 뿌리를 둔 새로운 인간적 결속이, 기술봉건적 시대의 ‘아름다운 시체’(exquisite corpse) 속에서 꺼지지 않는 불꽃처럼 되살아날까?
[출처] Technofeudalism and the Psychological Foreclosure of the Future
[번역] 이꽃맘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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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 채닝 리드(Ross Channing Reed)는 철학박사로, 미주리과학기술대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친다. 참세상은 이 글을 공동 게재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