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헨티나의 자칭 ‘아나코자본주의자’(anarcho-capitalist, 정부의 존재를 최소화하거나 아예 폐지하고 시장의 자유에 모든 것을 맡기자는 사상) 하비에르 밀레이(Javier Milei) 대통령이 국회의 중간선거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뒀다. 극단적인 긴축, 경제적 혼란, 정치 스캔들로 점철된 한 해를 보낸 뒤 나온 이 결과는 그야말로 이례적이다.
밀레이의 정당 ‘라 리베르타드 아반사’(La Libertad Avanza, 전진하는 자유당) 연합은 전국 득표율 40% 이상을 기록하며 예상을 뒤엎고, 주요 야당인 ‘푸에르사 파트리아’(Fuerza Patria, 조국의 힘) 연합의 약 32%를 크게 앞질렀다. 이번 승리는 대통령의 입법 권한을 강화할 뿐 아니라, 2027년 재선 도전에서도 그를 강력한 경쟁자로 자리매김하게 했다.
이번 선거는 2023년 12월에 시작된 밀레이의 집권 2년 차를 평가하는 사실상의 국민투표로 널리 해석됐다. 그의 승리는 장기적인 경기침체와 실질소득 하락 속에서도 자신을 유일한 희망과 “구원”의 전달자로 내세우는 정치적 양극화 전략의 성공을 입증한다.
출처: 하비에르 밀레이 대통령 페이스북
그러나 이번 승리의 서사는 아르헨티나의 불안정한 경제를 안정시키기 위한 미국 정부의 극적인 개입과도 떼려야 뗄 수 없다. 이 개입은 본래 지역적 의회 선거에 불과했던 이번 선거를 전 지구적 지정학적 분쟁의 촉매로 바꾸어 놓았다.
밀레이 대통령의 첫해는 공공지출을 ‘전기톱’으로 잘라내듯 급격히 삭감하는 정책으로 특징지어졌다. 그는 수만 개의 공공 일자리를 없애고 공공투자를 전면 동결했다. 이런 조치들은 고통스러웠고, 기업 폐업과 일자리 감소를 초래했다. 그러나 동시에 불안정하긴 하지만 눈에 보이는 거시경제적 성과도 만들어냈다.
2024년 4월 289%까지 치솟았던 연간 인플레이션율은 2025년 10월 기준 약 32% 수준으로 낮아졌다. 또한 아르헨티나는 10년 넘게 이어졌던 재정적자에서 벗어나 오랜만에 재정 흑자를 기록했다.
그러나 선거에서 보다 즉각적인 생명줄 역할을 한 것은 정부의 미 달러화 환율 관리에 대한 집중적 대응이었다.
아르헨티나의 자국 통화인 페소는 오랜 기간 불안정했고, 잦은 고인플레이션이 겹치면서 이중화된 통화 체계가 형성됐다. 즉, 일상 거래에는 페소가 사용되지만, 저축이나 부동산 같은 고액 거래에는 달러가 선호되는 구조다.
밀레이 행정부는 환율을 통제하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하며 선거 직전 일시적이지만 체감 가능한 안정감을 만들어냈다. 변동성에 지친 유권자들에게 이 안정감은 결정적인 의미를 가졌다.
그러나 그 안정은 미국의 금융 지원에 대한 심각한 의존이라는 대가를 치르고 얻은 것이었다. 아르헨티나 중앙은행의 외환보유액이 급격히 줄고 통화 위기가 임박하자,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이끄는 미국 정부가 재빠르게 구제에 나섰다.
미 재무부와 아르헨티나 중앙은행 간 200억 달러(약 150억 파운드) 규모의 통화 스와프 협정이 10월 20일 공식 체결됐다. 이어 민간은행들과 국부펀드로부터 추가로 최대 200억 달러의 지원이 발표됐는데, 이는 명백히 선거 직전에 밀레이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기 위한 시기 조정된 지원이었다.
트럼프는 이 지원의 지속을 밀레이의 승리에 명시적으로 연계하며 이렇게 경고했다. “그가 패배하면, 우리는 아르헨티나에 관대하지 않을 것이다.” 밀레이의 승리는 미국의 이념적 동맹자 트럼프의 명백한 정치적 승리이기도 하다. 트럼프는 이 금융 구제 조치를 “위대한 철학을 지지하고 아르헨티나를 다시 위대하게 만들기 위한 전략적 조치”라고 치켜세웠다.
“아르헨티나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둔 하비에르 밀레이 대통령에게 축하를 전한다. 그는 훌륭한 일을 해내고 있다!” — 도널드 트럼프. 출처: 하비에르 밀레이 대통령 페이스북
이처럼 미국 정부의 공공연하고 단호한 개입은 냉전 이래 라틴아메리카에서 보기 드문 외교적 전환점을 이룬다. 이는 아르헨티나, 더 나아가 라틴아메리카 전체가 다시 지정학적 ‘체스판’ 위로 돌아왔다는 신호이기도 하다.
미국에게 이번 개입은 단순한 이념적 유사성 때문이 아니라, 전략적 자원 경쟁 때문이다. 라틴아메리카는 리튬과 같은 핵심 광물을 포함한 방대한 천연자원을 보유하고 있으며, 이는 세계 청정에너지 공급망의 핵심 요소다.
워싱턴의 밀레이 지원은 이 지역에서 영향력을 확장하는 중국의 경제적·정치적 입지에 도전하기 위한 움직임이다. 이를 통해 미국은 주요 자원 공급국이자 교역 파트너인 아르헨티나를 자국의 영향권 내에 확고히 묶어두려는 것이다. 밀레이 역시 석유, 가스, 광업 등 핵심 산업 부문에서 미국의 투자를 적극 유치하려는 입장이며, 이 부문들은 그의 경제 회복 계획의 중심축을 이루고 있다.
야당에게 찾아온 심판의 시간
이번 선거 결과는 아르헨티나 정치의 깊고도 지속적인 양극화를 명확히 확인시켰다. 중도좌파 야당이 늘 써오던 전략 ― 즉, 현 정부의 긴축정책과 스캔들이 불만을 자아내기를 기다리는 방식 ― 은 더 이상 통하지 않았다. 이제 야당은 근본적인 자기 성찰의 시기를 맞이해야 한다.
그러나 내 생각에 밀레이의 성공은 단순히 기존 정당들이 실패한 ‘대표성의 위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오히려 새로운 반응적 세계 사회의 충실한 대변자로 보인다. 이 사회는 제도적 중재를 깊이 불신하며, 합의 기반의 정치보다는 강력한 행정 지도자와 ‘문제 해결사’로 인식되는 인물을 선호한다.
밀레이의 급진적 실험은 첫 번째 중대한 선거 시험을 통과했다. 그의 정당은 아르헨티나 의회 내 기반이 제한적임에도 불구하고, 강력한 입법 세력으로 자리 잡을 만큼의 의석을 확보했다. 이는 대통령의 거부권을 방어하고, 핵심적인 세제 및 노동 개혁을 추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되었음을 뜻한다.
그는 또한 자국의 새로운 정치적 방향을 설정했다. 그것은 미국이라는 불가결한 새 파트너의 지정학적 전략과 긴밀히 얽힌 궤도 위에 놓여 있다. 내가 이전에도 주장했듯이, 밀레이의 정치 실험은 아르헨티나와 라틴아메리카에서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출처] Javier Milei’s victory in Argentina’s midterm elections is also a win for Trump
[번역] 이꽃맘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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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안 파블로 페레로(Juan Pablo Ferrero)는 영국 배스대학교의 라틴아메리카 정치학 분야 선임강사다.참세상은 이 글을 공동 게재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