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더 크래들
미국이 지원하는 ‘메그리(Meghri) 회랑 구상’은 이란을 고립시키고 러시아의 입지를 약화시키며, 터키·아제르바이잔·이스라엘의 영향력을 강화하려 하지만, 테헤란은 이 ‘미국 회랑’이 결국 사라질 것이라고 못 박았다.
8월 8일, 니콜 파시냔(Nikol Pashinyan) 아르메니아 총리, 일함 알리예프(Ilham Aliyev) 아제르바이잔 대통령, 그리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남캅카스에서 이른바 평화협정을 추진하기 위한 7개 항목의 양해각서(MoU)에 서명했다. 이 합의에는 미국과 양국 간의 개별 협정도 함께 체결됐다.
양해각서는 국경과 교통로 개방, 아르메니아의 주권·영토 보전·관할권 강화를 명시했으며, 상호성은 모호하게 약속했다. 바쿠 측은 나히체반(Nakhichevan) 자치령으로 연결되는 통로를 “방해받지 않는(unimpeded)” 것으로 규정하는 단어를 끼워 넣었고, 그와 함께 예레반에 “상호적 혜택”을 부여한다고 명시했다.
이 합의에 따라 ‘평화와 번영을 위한 트럼프 노선(Trump Route for Peace & Prosperity, TRIPP)’이라 불리는 메그리 경로는 미국과 외국 계약자가 운영·관리하며, 나히체반을 거치는 아르메니아 철도 접근권은 아제르바이잔이 계속 통제한다.
이 불균형은 TRIPP의 안전성에 대해 예레반이 가질 수 있는 보장을 줄인다. “방해받지 않는”이라는 표현은 운영 주체가 아르메니아 당국에 주기적으로 보고만 할 뿐, 사실상 아제르바이잔 교통과 직접 거래한다는 의미일 가능성이 크다. 이런 모호함은 평화협정 타결을 지연시키거나, 아르메니아가 추가적인 운영권을 넘기도록 압박할 수 있다.
아르메니아의 전 외무장관 바르탄 오스카니안(Vartan Oskanian)은 페이스북에 글을 올려, 자국이 덫에 빠졌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란이 시유니크(Syunik)에 어떤 외국의 존재도 용납하지 않겠다고 공개적으로 경고했으며, 이 지역을 아르메니아의 전략적 생명선이자 남북축의 핵심이라고 규정했다고 밝혔다. 그는 이곳을 지정학적 흥정 카드로 만드는 것은 아르메니아의 안보와 지역 안정을 모두 위태롭게 한다고 말했다.
러시아: 눈 뜬 채 잠든 곰
주류 담론은 러시아의 남캅카스 내 영향력 약화를 우크라이나 전쟁에 집중한 군사력 탓으로 돌리지만, 2020년 제2차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이나 2022년 단기간의 국경 충돌 당시 러시아가 주도하는 집단안보조약기구(CSTO)가 아르메니아를 방어하지 못한 것은 예레반이 이를 금지했기 때문이라는 점은 간과한다.
파시냔(Nikol Pashinyan) 총리는 44일 전쟁 중 스스로 CSTO의 개입을 원치 않는다고 명확히 밝혔고, 패전 후에는 “CSTO가 아르메니아에 대한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고 놀라운 불평을 늘어놓았다. 그러나 그 불평은 정치적 연극이었으며, 서방 후원 세력과 궤를 같이하는 행보의 일부였다.
서방이 지원한 색깔 혁명의 산물로 여겨지는 파시냔은 집권 전부터 젊은이들에게 “평화적 시위”를 명분으로 버스 밑으로 몸을 던지라고 부추겼다. 1990년대 이후 예레반은 바쿠와 마찬가지로 서방 비정부기구(NGO)에 꾸준히 침투당했다. 2022년의 짧은 충돌은 상황을 거의 바꾸지 못했고, 그 시점에 이미 파시냔은 자신의 정치적 속내를 드러냈다.
2023년 나고르노카라바흐에서 러시아군이 철수하고, 2021년과 2022년 지속된 아제르바이잔의 공격에 맞서 CSTO의 방어를 막은 파시냔의 결정은 혼란스러운 아르메니아인들로 하여금 이 동맹의 가치를 의심하게 만들었고, 대체 안보 파트너를 모색하게 했다.
게다가 최근 아제르바이잔과 러시아 사이에서 각각의 기자 체포와 구금 사건이 발생하며 양국 간 긴장이 고조되자, 러시아의 정치적 영향력은 더 약화됐고, 모스크바는 더 이상 지역의 ‘최종 조정자’로 여겨지지 않게 됐다.
분석가들은 트럼프가 중재한 이번 합의가 러시아를 배제하고, 지난 200년간 이 지역에서 차지했던 주도적 역할을 박탈할 것이라고 본다. 러시아 두마 의원 콘스탄틴 자툴린(Kostantin Zatulin)은 이번 합의가 “러시아를 캅카스에서 밀어내는 것”을 목표로 한다고 밝혔다.
일부는 이를 모스크바에 대한 “지정학적 타격”이라고까지 평가했다. 러시아 외무부 대변인 마리아 자하로바(Maria Zakharova)는 러시아가 지역 안정에 관심이 있다고 강조하며, 외교적으로 남캅카스를 마치 “러시아의 해외”와는 거리가 있는 지역인 것처럼 지역 3+3 플랫폼으로 돌아갈 것을 촉구했다.
러시아의 남캅카스 철도(South Caucasus Railway) 자회사는 여전히 2020년 11월 10일 삼자 성명에 따라 아르메니아의 철도망을 운영하고 있으며, 이 합의는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 간의 통행을 보장하기 위해 러시아 국경수비대를 아르메니아 남부에 배치하는 내용도 포함하고 있다.
미국 기업이 메그리–나히체반 회랑을 운영하더라도, 러시아의 철도 운영은 자국의 경제적 지분을 확보해 주며, 아르메니아는 아제르바이잔 철도를 통해 이란과 러시아에 접근할 수 있다. 8월 15일 트럼프가 알래스카에서 블라디미르 푸틴(Vladimir Putin) 러시아 대통령을 만나 우크라이나 ‘영토 맞교환’ 문제를 논의할 때, 회랑 문제가 거론될 가능성이 크다. 모스크바는 지역 내 정치적 양보와 맞바꾸는 방식으로라도 자국의 경제적 이익을 지키려 할 것이다.
이란, 미·나토의 캅카스 발판 저지를 다짐하다
이란 외무부는 평화협정 문안이 최종 확정된 것을 “이 지역에서 지속적인 평화를 이루기 위한 중요한 진전”이라고 환영했다. 하지만 국경 인근의 외세 개입이 지역 안정을 훼손할 수 있다는 우려를 표명하며, 인접국의 영토 보전을 존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는 아르메니아와의 국경선 변경에 반대한다는 뜻을 내비친 것이다.
이란 최고지도자의 수석 고문 알리 아크바르 벨라야티(Ali Akbar Velayati)는 보다 강경한 메시지를 내놨다. 그는 러시아가 있든 없든, 이란은 남캅카스에 ‘미국 회랑’이 만들어지는 것을 반드시 저지할 것이라고 밝혔다.
미국이 이 회랑에 대해 “99년 개발 임차권”을 갖게 될 것이라는 합의에 대해 질문받자, 그는 이 회랑이 “도널드 트럼프의 용병들의 무덤”이 될 것이라고 못 박았다. 이란의 마수드 페제시키안(Masoud Pezeshkian) 대통령이 앞으로 며칠 내 예레반을 공식 방문할 예정이라고 발표됐다.
이란 혁명수비대(IRGC) 정치담당 부사령관 야돌라 자바니(Yadollah Javani) 장군도 “알리예프와 파시냔, 젤렌스키의 비참한 길을 걷다”라는 제목의 강경 성명을 발표했다. 그는 두 사람이 100년에 걸친 장게주르 회랑 임대를 통해 미국·영국·나토를 캅카스로 끌어들이기로 한 선택이 “젤렌스키가 저지른 전략적 실수”와 같으며, 결국 “도박꾼 트럼프의 덫”에 빠질 것이라고 말했다.
자바니는 우크라이나 전쟁이 키이우와 모스크바의 맞대결이었던 것과 달리, 이번 조치는 이란·러시아·중국·인도를 바쿠와 예레반에 맞서 결집하게 만들었다고 경고했다. 그는 이 파괴적인 행동에 대해 “좌시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TRIPP의 설치가 미국의 지역 영향력을 강화하는 동시에, 남캅카스에서 이란의 접근성과 전통적 영향력을 약화시킬 것이라는 사실은 더 이상 비밀이 아니다.
앙카라와 텔아비브: 전략적 수혜자들
워싱턴의 구상은 튀르키예의 입지도 강화한다. 나토의 이 지역 관문인 튀르키예는 흑해–카스피해 권역 전반으로 영향력을 확대하며 ‘중간 회랑(Middle Corridor)’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튀르크 세계’와의 유대를 심화할 수 있다. 러시아와 이란과의 공개적인 대립은 피하려 하면서도, 앙카라는 자주적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자국 미사일 생산을 확대하고 있다.
이스라엘에게도 이 회랑은 새로운 작전 깊이를 제공한다. 분석가들은 ‘아브라함 협정(Abraham Accords) 2.0’을 남캅카스로 확장하는 방안을 공개적으로 거론한다. 바쿠와 텔아비브는 이미 긴밀한 안보 협력을 유지하고 있으며, 점령국인 이스라엘은 무기와 첩보를 제공하고 있다. 이는 텔아비브가 이란 북부에 영향력을 투사하며 감시와 포위망을 강화할 수 있는 위치를 점하게 한다.
아르메니아는 점점 더 서방 동맹 쪽으로 이동하며, 미국과 EU와의 관계를 심화하고 있지만, 그 대가로 구체적인 약속을 얻지는 못하고 있다. 이러한 정렬 혹은 변화는 이란의 외교 공간을 좁히는 동시에, 러시아와 이란 영토를 우회하는 대체 무역·에너지 경로 개발을 뒷받침한다.
이를 통해 미국은 예레반과 바쿠를 자국 영향권에 두어, 러시아를 이란과 인도에 연결하는 ‘국제 북남 교통 회랑(INSTC)’ 관련 향후 약속에서 떼어내려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남캅카스에서 두 전통적 지역 행위자를 고립시키면, 결국 유일한 지역 행위자인 튀르키예의 영향력 확대가 가능해진다.
TRIPP가 실행되면 남캅카스의 판도가 바뀔 것이다. 아르메니아는 단기적인 평화를 확보할 수 있겠지만, 튀르키예와 아제르바이잔에 물류·군사적 이점을 넘겨주게 된다. 이란은 러시아·아르메니아와의 유대를 강화하고, 중국과 인도를 네오오스만주의와 ‘범튀르크 회랑’에 맞선 공동 전선으로 끌어들이지 않는 한 지역 고립의 위험에 직면할 것이다.
러시아는 철도 운영을 통해 일부 경제적 영향력을 유지할 수 있겠지만, 현 상황이 서방과 튀르키예 쪽으로 더 기울면 모스크바의 영향력은 약화될 것이다.
결국 최대 수혜자는 앙카라, 바쿠, 텔아비브이며, 그 뒤에는 워싱턴이 있다.
[출처] Zangezur or bust: A US corridor scheme meets an Iranian red line
[번역] 하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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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더 크래들>(The cradle)의 편집국이 작성한 글이다. 참세상은 이 글을 공동 게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