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KBS 뉴스를 본 적 있나?”라는 질문에 대다수의 언론 시민사회단체 활동가들은 “망가졌다”고 입을 모은다. 살아있는 최고 권력자를 향한 날은 무뎌진 지 오래다. 채 상병 특검과 김건희 여사 리스크를 포함해 정부 여당에 불리한 뉴스는 뒷전이다. 남북문제에 대한 ‘평화’의 관점은 뉴스에서 사라졌고, ‘대결’을 부추기는 뉴스들로 채워지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이 채 상병 특검을 거부하던 날(5월 21일), 중대한 사실이 새롭게 드러났다. 윤석열 대통령이 검사 시절부터 사용하던 휴대전화 번호로 이종섭 국방부 장관과 세 차례 통화한 사실이 그것이다. 이날 대다수의 언론매체가 앞다퉈 이 소식을 전하며 여러 분석을 내놓았지만, KBS는 달랐다. KBS는 뉴스 이 소식을 담은 리포트를 중반부에 배치, ‘중요한 뉴스가 아닙니다’라고 온몸으로 말했다. KBS를 근거리에서 지켜본 입장에서 매우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KBS는 더디지만 분명 달라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KBS는 공영방송의 길로 가고 있었다
KBS는 2019년 11월, 메인 뉴스 <뉴스9> 앵커에 이소정 기자를 발탁했다. 여성이 지상파 뉴스의 메인 앵커를 맡은 건 KBS가 최초다. 당시 KBS는 공영방송 뉴스가 나가야 할 방향으로 “수용자 중심”, “시대적 감수성 반영”을 제시했다. 그것은 단순히 ‘여성으로’ 교체했다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한국 사회 소수성을 주변부에서 뉴스의 중심부로 옮기겠다는 선언이었기 때문이다.
2019년 11월 25일 KBS 9시 뉴스 이소정 앵커의 첫 오프닝. 출처: KBS 뉴스 홈페이지
KBS 뉴스 스튜디오에 당장 변화가 일어났다. 2020년 10월, 이희종 택배노동자 과로사대책위원회 집행위원이 출연해 ‘택배 노동자들의 잇따른 사망의 원인’을 짚었다. 2021년 4월에는 노동절을 앞두고 우다야 라이 이주노동자 노동조합 위원장이 나와 고용허가제의 문제를 직접 설명했다. 2021년 10월, 성전환 수술을 이유로 군에서 강제 전역 조처된 뒤 숨진 변희수 하사의 공동 변호인이 출연해 ‘차별금지법’ 제정을 촉구했다.
과거 KBS 뉴스에서 볼 수 없었던 생경한, 하지만 반가운 변화였다. (우여곡절이 많았으나) 2020년 10월에는 KBS 메인 뉴스에 수어 방송이 시작됐다. 2022년 2월 3일, 이영호 앵커는 ‘제2회 한국수어의 날’을 맞아 수어로 “서로 조금씩 다른 모든 사람들이 수어로 다 같이 반짝이는 날을 기대한다”고 클로징 멘트를 전해 감동을 주기도 했다.
KBS 뉴스의 변화는 다른 곳에서도 나타났다. 2020년 7월, 박원순 전 서울시장 사망 이후 ‘피해 호소인’이라는 명칭을 두고 정치적으로 논란이 벌어졌던 때. KBS는 메인 뉴스에서 앞장서서 “‘피해자’로 용어를 통일한다”고 바로잡았다. 2022년 3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초기에도 KBS 이소정 앵커는 “KBS는 오늘부터 우크라이나 지명을 러시아어가 아닌 우크라이나어를 기준으로 전해드린다”며 ‘키예프’가 아닌 ‘키이우’라는 명칭을 사용하도록 독려했다.
KBS 뉴스가 완벽했다고 말하는 건 아니다. 그때도 비판이 많았다. 다만, 분명한 건 하나다. KBS는 공영방송이 가야 할 방향으로 향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KBS 뉴스의 방향이 바뀌었다
그랬던 KBS 뉴스의 방향이 바뀌었다. KBS <뉴스9> 앵커가 교체됐다.
이소정 앵커는 뉴스를 안정적으로 진행한다는 호평에도 불구하고 시청자들에게 고별인사도 없이 뉴스에서 하차해야 했다. 시대적 감수성이 다시 남성이어야 한다는 뜻일까. KBS는 그 자리에 박장범 기자를 앉혔다. 그때부터 KBS 뉴스는 우려한 방향으로만 움직였다.
KBS <뉴스9> 박장범 앵커는 전임 사장 체제에서 방영된 ‘오세훈 처가 땅 의혹 보도’ 등 몇 가지 사례를 들어 불공정 보도라며 사과했다. 해당 뉴스를 불공정 보도라고 규정할 수 있을지 내부적인 평가 절차를 거치지 않은 상태였다. 해당 뉴스를 제작한 이들의 반론도 듣지 않았다. 그리고 앵커 ‘박장범’이라는 이름이 널리 퍼지는 일이 벌어졌다. 영광이라고 해야 할까. 박장범 앵커가 윤석열 대통령과의 대담을 진행하며 김건희 여사가 수수한 것으로 알려진 명품백을 두고 ‘외국회사 조그마한 파우치’라고 언급한 것이다. 해당 대담은 ‘명품백을 명품백이라고 부르지 못하는 홍길동 진행’이라는 등 KBS를 조롱거리로 전락시켰다. 하지만 KBS는 “해당 상품을 제작한 회사도 ‘파우치’라고 했다”고 해명해 또 다른 조롱을 낳았다. 동문서답이다.
박장범 앵커가 명품백이라고 부르지 않아서 문제 된 게 아니다. KBS에서 ‘명품백’이라는 용어가 가진 핵심 의미를 축소하려 했기 때문에 비판이 집중된 것이었다. 진정 문제가 뭔지 모른다는 말인가.
2024년 2월 4일 “KBS 특별 대담, 대통령실을 가다” 녹화. 진행자 박장범 KBS 앵커, 2월 7일 오후 10시 KBS 1TV 방영.
KBS는 메인 뉴스 앵커를 박장범 기자로 교체하면서 “KBS의 위상을 되찾아 갈 것”, “시청자들의 신뢰를 회복해 갈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과연, KBS의 신뢰도는 이런 방식으로 쌓일 수 있을지 의문이다.
KBS가 나서서 명칭을 통일한 일도 있었다. KBS 보도본부가 어느 언론사보다 먼저 기자들에게 ‘한·중·일’과 ‘북·미’를 각각 ‘한·일·중’과 ‘미·북’으로 표기할 것을 권고했다고 알려졌다. ‘한반도 비핵화’라는 표현 또한 자제하라는 지시가 내려오기도 했다. 이는 윤석열 정부의 지침에 따른 것이라는 게 대체적인 평가다. 뒤이어 KBS에서 전두환이라는 이름 뒤에 붙는 호칭도 통일됐다. KBS 구성원들은 이전 ‘전두환 전 대통령’과 ‘전두환 씨’를 혼용해 왔다. 하지만 KBS 보도본부에서 나서서 ‘전 대통령’으로 사용하도록 강제한 것이다. ‘피해 호소인이 아닌 피해자’, ‘키예프가 아닌 키이우’라고 명칭을 통일시켰던 이전 사례와 대비되는 조치다. KBS가 명칭을 통일한 게 누구를 위한 것인지를 따져보면 답이 나온다.
KBS 시사다큐 및 교양프로그램 또한 쑥대밭이 됐다. KBS 2TV <더라이브>, KBS라디오 <주진우라이브>, <최강시사> 진행자들이 하루아침에 하차 통보를 받았다. KBS는 세월호 참사 10주기를 앞둔 시점에서 “총선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이유로 <다큐인사이트> ‘바람이 되어 살아 낼게(가)’ 다큐멘터리 제작을 무산시켰다. 최근에는 KBS <역사저널 그날>에 백선엽 장군 기념사업회 이사를 맡아 역사 관련 특정 이념적 색채가 강한 인물로 출연자를 교체하라는 부당한 압력이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나기도 했다. 그리고 KBS 아침 시사 라디오 프로그램에 보수 유튜버 고성국 씨가 기용됐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KBS에서 진짜 사라진 것
국민의힘과 보수 시민사회단체들은 전임 정부의 KBS 뉴스가 ‘불공정’하다고 목소리를 높였었다. 그리고 2022년 5월, 국민의힘 소속의 윤석열 정부가 출범했고 KBS의 사장이 바뀌었다. 윤석열 대통령이 공영방송 KBS 사장으로 처음 재가한 박민 사장이 취임한 지 7개월이 지났다. 궁금하다. 현재 KBS 뉴스가 국민의힘이 그렇게 이야기하던 공정한 방송인가.
KBS 뉴스가 망가졌다. 권력자에 대해 감시 기능을 상실한 방송사를 사람들은 ‘언론’이라 부르지 않는다. 어떠한 절차도 밟지 않고 자사 뉴스를 ‘불공정 보도’로 낙인찍어 사과하는 경영진에 구성원들은 ‘미래’를 맡기지 않는다. 사회적 약자가 아닌 권력자를 위한 뉴스에 시청자들은 ‘신뢰’를 주지 않는다. 정치적 유불리를 떼어 놓고 보자. 이건 진보-보수의 문제가 아니다. 공영성의 후퇴다. KBS 뉴스에서 사라진 건 ‘불공정’일까? 아니다. 다양성이다.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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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순택은 언론개혁시민연대 사무처장으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