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24일 민주노총과 금속노조는 평택 한국니토옵티칼 공장과 구미 한국옵티칼 공장에서 결의대회를 동시에 열고, 일본 니토덴코 그룹에 한국옵티칼 노동자 고용승계를 요구했다. 이날 박정혜, 소현숙 한국옵티칼지회 조합원이 구미공장 고공농성을 시작한 지 199일, 현재는 330일을 훌쩍 넘겼다. 사진: 노조 경남지부, 출처: 금속노동자 ilabor
윤석열 정권의 집권 기간은 노동의 가치에 대한 전면적 부정 가운데 현장의 부당함에 맞선 노동자들의 투쟁을 사회적으로 철저히 고립시키는 피 마르는 시간이었다.
각처에서 노동자들의 투쟁이 일어났고 자기 생명을 갉아 먹는 단식, 고공농성이 진행되었으나 사회적인 관심은 윤석열 정권의 폭압적인 자본 중심적 사상 공세로 덮여버렸고 노동자에 적대적인 정권과 자본의 노골적인 언행과 경제중심주의적 담론에 가로막혀 언로를 찾지 못하는 외로움에도 시달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KEC, 아사히 한국 옵티칼로 이어지는 구미 지역 노동자들의 투쟁은 공장을 지키고 노동의 가치를 지키고 사회적 연대망을 강화하며 위법한 자본의 횡포를 극복하고 법적인 정의를 쟁취하였고, 투쟁의 승리를 통해 노동의 가치를 드높였다.
그들은 투쟁의 과정에서 하나의 근본적인 물음을 세상에 던졌다.
“왜 자본에 대해서는 모든 법과 행정제도, 공권력이 그들의 권리를 보장하는 데 동원되는데, 노동자의 노조를 설립할 권리, 파업이나 노조 활동 등 기본적인 노동의 권리를 사용하는 노동조합 활동들은 회사의 부당한 탄압을 받는 것도 모자라 사회적 질시까지 받으며 불법화되고 손해배상, 가압류 등의 폭력에 시달려야만 하는가!”
과연 그러했다. 윤석열 정권이 자기 언사에 완전한 자유를 누리고 거부권을 남발하듯, 자본은 이윤의 지상명령으로 노동과 노동자를 노예화했고, 해고, 손해배상, 통장 가압류 등 그들의 위법과 초법적 권리를 행사하며 취약한 노동자들의 삶을 일회용품처럼 버리고 자유로이 유린했다.
아사히 노동자들 법정투쟁의 승리는 정권과 자본이 노동과 노동자에 대해 폭압과 사회적 포위 공격을 가하는 가운데 일궈낸 노동자 투쟁의 쾌거였다. 그리고 이 승리는 아사히 노동자들만의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단결과 당당한 투쟁과 활짝 열린 연대의 정신은 노동자들에게 자신의 존엄을 깊이 심어주었고 낙관의 분위기에서 모든 부당함에 당당히 맞설 수 있는 자신감을 퍼뜨렸다.
아사히가 길바닥 농성장에서 투쟁하는 동안 옵티칼의 화재와 대량해고, 공장철수 사태가 일어났다. 또 한 회사에서는 공장의 열악한 환경으로 노동자가 암에 걸려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구미의 노동자들은 그 모든 투쟁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였고 당사자의 투쟁이 승리할 수 있도록 자신의 경험과 힘을 보탰고 승리를 이끌었다. 열악한 환경에서도 노동자들이 정당한 요구로 단결하고 투쟁한다면 승리를 일구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은 이제 투쟁 가운데 엮어진 노동자들의 형제적인 연대를 관통하여 충만해졌다.
아사히 투쟁의 승리는 정말 특별한 쾌거였고 노동운동의 모범이었지만, 구미 지역 노동자들 투쟁 가운데 가장 돋보이는 투쟁은 현재 일본을 오가며 종교계, 국회, 시민 사회 단체, 변호사, 노동 관련 입법 전문가들 등을 엮으며 광범위한 전선을 형성하며 단결한 노동자의 영향력을 키워가는 고용승계를 외치는 옵티칼 노동자의 투쟁이다.
이들의 투쟁은 불탄 공장 황량한 공장 앞마당의 천막과 노조 사무실에서 가녀린 목소리와 어디에도 호소할 길 없는 막막함 가운데 시작되었지만 구미 지역 노동자들의 연대에 힘입어 멈출 수 없는 몸부림으로 폭발하며 성장했다. 비정규직 문자 통보 해고를 당해 복직을 위한 투쟁 중이던 아사히 노동자와 업종변경, 공장 철수 기도에 맞서며 공장 내의 노동권을 실현하고 공장을 사수하는 투쟁을 직장 내에서 전개해 나가는 KEC 노동자들은 옵티칼을 외면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에게 자신의 투쟁 경험 속에 쌓아간 확신과 활동력을 나누며 그들의 외롭고 황량한 투쟁에 조직적 질서와 희망과 승리의 기운을 불어넣어 주었다. 온갖 특혜를 누린 자본은 법적 행정적으로 선점한 유리한 위치에서 위력을 동원했지만, 자본이 반드시 가져야 할 고용에 대한 책임 문제를 붙들고 고용승계와 노동조합의 정당한 활동에 대한 당위적 권리를 행사하며 그들의 위력을 연대의 힘으로 이겨냈다. 노동자들은 한솥밥 식구가 되었고 시민들과 다양한 도움으로 연대하는 사람들은 그들을 호위하였다.
황량하고 외로웠던 옵티칼의 농성장은 금속노동조합의 조직적 지원으로 투쟁의 터전을 보존하며 목소리를 키울 수 있었고 각지에서 투쟁하는 노동자들의 발걸음, 시민들의 관심을 끌어내며 공장철거 행정명령을 받은 본사 끄나풀들의 만행과 공권력의 침탈을 막아낼 수 있었다. 이러한 투쟁으로 근력을 키운 옵티칼 노동자들은 세상 밖으로 나서며 여러 정치 사회 세력들의 지원을 주도적으로 모아냈다. 오랜 시간의 투쟁은 이탈자를 만들었지만, 남은 이들은 이탈에 아랑곳하지 않고 목표를 향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다. 종교계의 사회적 영향력을 요청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종교적 의식들을 유치했다. 그리고 그들의 종교적 행위와 연대의 마음을 투쟁의 힘으로 흡수했다. 국회에서 간담회를 조직하며 국회의원로 하여금 부당한 사측을 국회에 불러 청문회를 열게 했고 사측의 노동과 고용에 대한 무책임을 시정하도록 압력을 행사했다.
일본 본사가 당사자였기에 일본으로 원정투쟁을 가면서 국회의원들로 하여금 본사와 관련 정부 기관에 대한 항의의 뜻을 표하도록 하였고, 일본의 야당 의원들과의 만남과 연대도 촉진했다. 옵티칼의 현실을 다국적 기업환경에 따른 외교의 문제로까지 끌어올리려 시도했다. 다국적 기업 환경에서 사측이 명시적으로 표현한 고용의 윤리와 다국적 기업 일반에 적용되어야 할 국제 협약의 기준을 근거로 본사인 일본 니토덴코를 압박하고 옵티칼 협력업체인 애플사의 협력관계에도 문제제기를 하였고 그들의 반노동자적인 자본의 연대를 규탄했다. 고용의 책임을 다하지 않는 회사와 거래하지 않는다는 애플사의 자체 규약에 의거해 그들의 부당한 거래를 규탄하고 시정을 요구한 것이다. 이들의 투쟁은 일본 본사의 주주총회에 주주로서 참여하여 발언하는 투쟁으로까지 나아갔다. 이 시도는 본사의 저지로 좌절되었지만 투쟁의 과정을 기록하며 사측의 단결하는 노동자에 대한 적대행위와 그 뒤에 숨은 두려움 같은 것을 드러냈고 그것을 고스란히 노동자들의 투쟁 의지로 받아냈다.
본사 앞에서 무관심해 보이는 시민들에게 행했던 선전물 배포 활동은 외로움을 넘어 시민들의 응원과 공감을 얻어나갔고 일본의 노동자들이 겪고 있는 또 다른 형태의 자본과 노동의 역사적이고 특수한 현실과 일본 노동운동의 특수한 사회적 처지에 대한 이해로 나아갔다. 아사히의 투쟁 과정에서 형성한 국적을 넘은 노동자의 연대를 옵티칼 노동자들은 그대로 계승하며 강화했고, 만남의 횟수를 더해가며 노동자의 국제적 연대에 지속성을 확보했다.
옵티칼 노동자들과 구미 노동자들의 단결된 투쟁은 현실의 부조리를 광맥 삼아 국적을 넘는 연대를 이뤄내며 광맥을 따라 금덩이를 캐내는 광산 노동자의 노동과도 같았다. 그들은 노동의 존엄에 투철함으로써 자본과 권력의 저항을 자기의 힘으로 오히려 흡수하고 걸어야 할 길로 삼는 창의력을 모든 부정적인 현실로부터 창조해냈다.
지금 옵티칼 노동자들은 고용승계의 실질적 주체이자 노동자 투쟁의 당사자인 일본 본사에서의 장기 투쟁을 기획하고 있다. 일본의 노동환경에서 한일 노동자 연대의 질을 승화시키며 다국적 기업환경에서 노동자의 국제 연대가 산출할 수 있는 희망의 메시지를 창조하는 투쟁을 준비하고 있다.
구미 지역 노동자들의 투쟁과 연대는 소성리의 사드 기지 앞에서 한미 동맹이 유린하는 주권과 평화의 문제에 직면한 나에게 그 자체로 큰 희망과 영감을 주고 있다. 사드 기지는 레이더의 시야와 그것을 활용한 무기체계의 연동 범위를 따라 한미일 전쟁동맹을 구축하는 매개체가 되고 있다. 전에는 세계대전 이후 정립되지 못한 한국과 일본과의 특수한 긴장관계에 가로막힌 한미일 군사동맹이 공공연히 회자되고 있고, 한반도의 전쟁 시나리오를 한층 파괴적인 것으로 업그레이드하는 전쟁의 연대를 촉진한다. 시골 마을 소성리에서 캘리포니아 주소로 들어앉은 사드 기지에서 기지 철거를 외치는 우리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은 전쟁 수단으로 연결된 국가폭력들의 연대체에 맞설 수 있는 민중의 국제적 연대이고 그 연대성이 웅변하는 평화다.
그런데 외투기업의 반노동자성에 저항하며 태동한 한일 노동자들의 연대는 전쟁을 부추기고 혹은 그것을 방관하는 자본과 권력의 연대가 지닌 파괴력에 저항하는 또 하나의 연대로 그들의 폭력적 연대에 타격을 줄 수 있다. 노동자와 민중은 결코 전쟁과 자본의 지배로 노예화된 삶을 원하지 않는다. 그들의 폭력적 시나리오에 그들 존재 자체로 타격을 주며 연대적 삶을 통해 생명의 존엄을 구현하고 평화의 메시지를 세상에 던질 수 있다.
전쟁을 매개로 한 국가폭력의 연대를 무너뜨리는 평화와 존엄을 내용으로 하는 민중의 삶의 연대. 그들이 비록 전쟁과 평화를 전면에 내세우지는 않을지라도 노동의 가치와 노동자의 존엄에 기초한 연대는 그 자체로 평화의 메시지를 가지며 자본과 권력의 폭력성에 타격을 줄 수 있다. 그리고 일본 사회의 역사성과 특수성 때문에 노동 현장에서 노동권을 실현하는 투쟁이 거세된 일본 노동자들이 역으로 강화해 온 노동자 계급의식과 정치성, 평화 지향성은 한국 노동자와의 단결에 대한 헌신적 투신을 가능케 했기에 이 결합은 옵티칼 현장의 투쟁에 정치 사회적 성격과 민중 연대의 무한한 가능성의 세계를 열어갈 뿐만 아니라 전쟁으로 엮어가는 한일 관계를 저지하는 평화의 메시지를 연대성 자체로 던질 수 있다.
우리는 오늘 계엄이라는 엄혹한 국가폭력의 준동을 탄핵으로 막아내고 국민주권이 이 나라의 통치원리로 자리 잡게 하는 투쟁의 시국을 살고 있다. 계엄은, 나아가 전쟁은 이 주인 된 권리에 대한 폭력의 도전이다. 우리는 윤 정권 집권 전 기간을 통해 계엄을 상상케 하는 사상적 폭력을 매스컴과 권력의 초법적 지배 행태를 통해 일상으로 받아내고 있었고 계엄 선포는 윤 정권하에서 살아온 하루하루의 삶 속에서 예견된 권력의 시나리오였다.
우리는 이 엄청난 폭력이 민중의 삶과 투쟁을 조롱하고 몰살하는 그림에 몸서리쳤지만, 주권자의 국민적 연대로 지켜낸 민주주의와 주권의 당위가 권력의 반헌법, 초법적 전횡을 심판하는 역사적 과정을 경험하고 있다. 우리는 대중적 힘의 결집을 통해 국민을 적대시한 권력에 대한 주권자의 심판의지를 선포했고 국민주권에 드리운 폭력의 그림자를 걷어내고 있다. 계엄정국의 표적이자 그에 맞선 탄핵 정국의 주도자였던 이재명과 민주당은 탄핵으로 폭압적 세력의 전횡을 일시 정지시킨 지금 이 승리를 사회 대개혁으로 이어가고자 한다는 뜻을 밝힌 바 있다. 계엄 정국에서 민주당은 반란 세력의 준동을 잠재우고 통제하며 탄핵에 이르게 하는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그들은 국민들의 심판의지를 믿고 내란 세력에 맞서는 강력한 투쟁을 수행했고 어느 정도 성공시키고 있다. 하지만 그들의 투쟁은 정치적 역풍의 싹을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허용해야 하는 딜레마 또한 안고 있다. 사회 대개혁을 위한 여러 세력의 어깨를 나란히 하는 수평적 연대에 노동자들이 그들의 저항과 투쟁으로 일궈낸 사회적 비전으로 자리 잡게 되길 바란다. 하지만 그러한 조직적 형태의 연대가 아니더라도 KEC, 아사히, 옵티칼로 이어온 노동자들의 단결과 사회적 연대는 노동운동의 현실을 대표하며 탄핵 이후의 개혁 내용을 능히 자신의 존재 자체로 채우기에 모자람이 없다고 확신한다.
현장의 투쟁 속에서 노동자의 존엄을 고양하며 승리하는 투쟁을 만들었던 구미 지역노동자 노동운동의 모범이 되는 투쟁 경험과 연대의 사회적 메시지, 그리고 어느 면에서는 그들이 일궈낸 투쟁 가운데 살아 움직였던 삶의 문화적 메시지는 계엄을 극복한 국민 승리 위에서 탄핵 이후 사회 대개혁의 내용을 채우는 데 큰 역할을 하게 될 것을 나는 믿는다. 그리고 그들이 이룬 노동자의 지속성 있는 국제 연대는 전쟁과 계엄의 폭력성을 극복하는 평화의 메시지로 보편화되는 운명을 가져나가리라고 나는 믿는다.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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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석은 구미지역 노동자와 함께하는 소성리 평화지킴이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