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7월 23일 수요일, 컬럼비아대학교는 트럼프 행정부와 “해결” 및 “합의”를 했다고 발표했다.
나는 이 “합의”의 구체적인 내용이나, 트럼프 행정부와의 “합의”가 과연 어떤 가치가 있는지를 믿는 것이 현명한지에 대해서는 논하고 싶지 않다.
더 큰 맥락에서 볼 때, 뉴욕의 한 사립대학이 보여준 이 수치스러운 내부 폭로는, 그것 자체의 중요성 때문이기보다는 그것이 제기하는 더 광범위한 문제, 즉 이번 경우에는 “거래에 의한 통치(governance by deal)”라는 문제를 생각할 만한 가치가 있다.
이 문제는 내 동료 데이비드 포즌(David Pozen)이 법학 블로그 Balkinization에 기고한 뛰어난 글을 통해 더욱 부각된다. 원문은 'Regulation by Deal Comes to Higher Ed' 이다. 편의를 위해 나는 그 글 전체를 아래에 옮긴다.
거래에 의한 규제, 고등교육에 도달하다 - 데이비드 포즌(David Pozen)
오늘 저녁, 컬럼비아 대학교는 트럼프 행정부와의 합의를 발표했고, 이 합의에서 컬럼비아는 연방 정부의 자금 지원 자격을 회복하기 위해 수많은 양보를 했다. 이 합의는 이미 “전례 없는”, “처음 있는 종류의” 사례로 묘사되고 있다. 이 표현들은 사실이지만, 동시에 모호하다. 왜냐하면 이 합의는 여러 차원에서 새로운 선례를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이 합의는 반유대주의(antisemitism)와 다양성·형평성·포용성(DEI: Diversity, Equity, Inclusion)이 처음으로 사립대학에 대한 정부 주도의 구조조정 근거로 사용된 사례를 나타낸다. 이 합의는 교육부, 보건복지부, 총무청(GSA), 백악관이 참여한 새로운 형태의 협업을 통해 설계되었고, 이들은 자원을 통합해 컬럼비아에 대한 압박 수위를 높였으며, 법무부도 일부 측면에서 지원했다. 이 합의는 또한 대학이 정부로부터 자금을 받기 위해 오히려 정부에 돈을 지불해야 하는 조건을 최초로 명시함으로써, 과학·의학 연구의 영역에 새로운 형태의 ‘페이 투 플레이(pay-to-play)’ 논리를 도입했다.
컬럼비아대학교에 가해진 압박은 행정부가 의회가 배정한 자금을 대학에 대한 징벌로 끊고, 전면적인 개혁을 강요하기 위한 첫 시도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 과정에서 행정부는 의회가 정한 절차를 따르려는 시늉조차 하지 않았다. 법조계에서는 행정부가 특정 대학에 특정 보조금이나 계약을 동결할 수 있는 정확한 조건에 대해 논쟁을 벌이고 있다. 그러나 내가 아는 한, 정부 외부의 어느 누구도 컬럼비아대학교를 무릎 꿇게 만든 초기 자금 차단 조치의 합법성을 옹호하려 시도한 적이 없다. 그리고 그 조치가 결국 컬럼비아를 이른바 ‘협상 테이블’로 끌어낸 셈이다.
요컨대, 이번 합의는 사실상 공갈 행위에 법적 형식을 부여한 것이며, 관련 법률뿐 아니라 권력분립 원칙과 수정헌법 제1조까지도 정면으로 위반한, 유례없는 첫 사례라 할 수 있다.
이 상황에서 또 하나 전례 없는 특징이 있다. 너무도 명백해서 오히려 간과되기 쉬운 점인데, 그것은 아마도 이 사태에서 가장 중대한 요소일지도 모른다. 바로 연방 정부가 대학의 내부 운영을 재편하려는 방식이 일반적으로 적용되는 명령이나 지침을 통한 것이 아니라, 일련의 쌍방간 ‘거래(deal)’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트럼프 행정부는 컬럼비아대학교가 첫 사례일 뿐이며, 이와 유사한 협약을 다른 대학들과도 맺을 계획임을 분명히 해왔다. 이른바 ‘깨어 있는(woke)’ 대학들을 길들이는 모델로 컬럼비아 사례를 확산하겠다는 것이다. 이는 이미 로펌, 관세, 통상 정책 영역에서 이루어졌던 방식과 유사하다. 이른바 ‘거래에 의한 규율’이 고등교육 분야로 확산되고 있다.
최근 몇 년간 대학의 차별 문제를 어떻게 규제할 것인가를 둘러싸고 격렬한 논쟁이 이어져 왔다. 전통적인 규제 패러다임은 다음과 같다. 의회가 민권법을 제정하면, 교육부는 이에 대한 시행 규칙을 공고와 의견 수렴을 거쳐 제정하고, 이후 이를 준수하도록 하는 방식이다. 오바마 대통령 재임 시기 행정부는 반차별 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이러한 방식보다는 ‘친애하는 동료에게 보내는 서한’이나 비공식 정책 성명을 더 자주 활용했다. 당시 우파 진영에서는 이를 강하게 비판했고, 2024년이 되자 친팔레스타인 시위를 억누르기 위한 바이든 행정부의 ‘하위규제 지침’ 활용을 문제 삼는 좌파 진영의 비판도 이어졌다.
이제 트럼프 행정부는 민권법의 명확한 근거도 없이 또 다른, 훨씬 더 급진적인 규제 방식의 전환을 시도하고 있다. 즉, 전체 고등교육 부문에 적용되는 지침을 넘어서서, 특정 대학에 연방 자금을 일방적으로 끊거나 그 위협을 가한 후 특정 조건을 강제로 수용하게 만드는 맞춤형 거래를 추진하고 있다. 중요한 점은 이러한 전환이 법률 집행 의지 강화의 일환으로서 발생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는 합의 명령이나 법정 밖 합의의 증가를 의미하지 않는다. 이런 거래는 철저한 조사나 대학의 위법 행위에 대한 법원의 판단을 거쳐 나온 결과가 아니다. 컬럼비아대학교 사례에서도 확립된 법적 절차는 전혀 지켜지지 않았다. 진정한 법적 분쟁이 해결된 것도 아니었다. 이번 거래는 처음부터 끝까지 규제 행위 그 자체였다.
이러한 새로운 모델은 단지 대학의 예산과 자율성뿐 아니라, 법치주의 그 자체에도 심각한 우려를 낳는다. 다른 맥락에서 학자들은 “정부 정책을 실현하기 위한 특정 거래에 의존하는 방식”이 행정에서 당연히 요구되는 “공고, 의견 수렴, 적법 절차”의 기준을 모두 무시한다고 지적해왔다. 물론, 정부 지침도 이러한 결함이 있을 수는 있지만, 그것들은 규제 대상자에게 법적으로 구속력이 없으며, 최소한 “일반성, 명확성, 공공성, 안정성, 장래 적용성”이라는 법치주의 핵심 원칙을 지키려는 의도는 있다. 반면 컬럼비아대학교 사례에서 드러난 규제 방식은 훨씬 더 강압적이고 자의적이다. 개발 과정은 불투명하고, 적용은 예측 불가능하며, 개인주의와 부패에 쉽게 휘둘리고, 의회가 제정한 법과의 연결성도 매우 약하다. 익숙한 행정 실무에 비해, 이른바 ‘단건 거래’는 “밀실의 조건, 강압적 결과, 기준의 불균등 적용 — 그것도 기준이 존재한다면 말이다 — 이 중심”이다.
물론 ‘거래에 의한 규제’가 일정 조건 하에서는 유용할 수도 있다. 예컨대 행정부가 특정 기관과 긴급히 협력할 필요가 있고, 이를 위한 입법적 권한도 갖고 있으며, 거래의 불확실성이 도덕적 해이를 줄이거나 법률 준수를 높일 수 있다는 근거가 있을 경우다. 2007–2008년 금융 위기는 그런 조건을 충족한 사례로 볼 수 있다. 컬럼비아대학교나 그와 유사한 명문 대학들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든 간에, 지금 벌어지고 있는 대학 내 혼란은 그런 조건에 해당하지 않는다.
거래에 의한 규제 확산은 언제든 걱정거리일 수 있지만, 지금처럼 정치적 격랑기이자 고등교육 분야에서 일어나고 있는 상황이라면 더욱 우려스럽다. 권위주의는 만들어진 비상사태와 강경한 수단에 의존해 정치적 반대자들을 압박하고 복종을 강요한다. 반면 기초 연구는 안정적인 제도적 틀, 신뢰할 수 있는 재정 지원, 자유로운 탐구의 분위기 속에서 성장한다. 컬럼비아대학교 같은 거래는 표적 대학 내 대통령과 측근들의 권력을 강화하고, 의회와 법원, 대다수 교수진을 소외시키며, 시민 사회 전반에 공포와 불확실성을 퍼뜨린다. 이것은 학문의 자유라는 논리에 근본적으로 어긋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컬럼비아나 하버드 같은 대학들이 그간 저지른 중대한 실책들로 인해 이런 변화가 환영받을 일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봐야 할까? 앞서 언급했듯, ‘거래에 의한 규제’는 강력한 결과를 낳는다. 그리고 이런 강력한 결과야말로 이들 대학에 비판적인 이들이 원하는 바일지도 모른다.
나는 컬럼비아나 하버드 같은 대학들을 ‘해체’하겠다고 작정한 이들에게 “수단이 정당하지 않으면 목적도 정당하지 않다”고 설득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지 않는다. (그리고 솔직히, 나는 컬럼비아 협약의 구체적인 조건을 아직 면밀히 검토해보지도 못했다.) 내가 여기서 전하고자 하는 유일한 메시지는, 지금 이러한 개혁을 추진하는 방식이 전례가 없을 뿐 아니라, 원칙조차 결여되어 있다는 점이다. 지금 미국의 고등교육 정책은 임시방편적 거래를 통해 수립되고 있다. 이 방식은 대학을 비판적 사고의 장으로 만드는 이상뿐 아니라, 민주주의 질서, 법 자체까지도 해를 끼친다.
이번 글에서 나는 데이비드가 시의적절하게 시작한 대화를 이어가기 위해 두 가지 추가적인 논점을 제시하고자 한다.
#1
데이비드는 “거래에 의한 규제”에 대해 말한다. 나는 이번 글의 제목에서 regulation(규제) 대신 governance(통치)를 사용했는데, 그 이유는 규제이라는 말이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을 제대로 포착하지 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트럼프 행정부의 행동을 규제라고 이해하려는 시도는, 너무도 당연하게도 과거에 존재했던 질서 있는 규제의 상(像)을 되짚게 만든다. 하지만 트럼프 행정부는 그 질서로부터 분명히 벗어났다. 이 행정부는 질서 있는 규제라는 개념 자체에 대한 지속적인 공격에 나섰고, 기습적이고 즉흥적인 위협과 협박을 선호한다. 이것은 정부 운영의 한 형태이지만, 나는 이것을 진정한 의미에서 통치라고 부를 수 있을지조차 확신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통치는 일정한 규칙성과 명확한 전략적 구상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쓸 수 있는 최선의 말은 바로 신조어인 “governance(거버넌스)”라고 생각한다.
“governance”의 어원을 찾아보면, 딥시크는 아마 다음과 같은 설명을 제시할 것이다
“governance”라는 용어는 20세기 후반, 특히 1980~1990년대부터 널리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 용어가 부상하게 된 데에는 몇 가지 핵심적인 계기가 있었다.
1) 세계은행의 영향(1989): 세계은행이 1989년 발표한 보고서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위기에서 지속 가능한 성장으로’에서 “좋은 거버넌스(good governance)”를 경제 발전의 핵심 조건으로 언급하면서, 국제 원조 및 정책 논의에서 이 용어가 핵심 요소로 부상했다.
2) 신공공관리(New Public Management, 1980~90년대): 특히 영국, 미국, 호주 등의 서구 정부들이 전통적 “정부(government)”에서 효율성, 민영화, 분권화된 의사결정을 강조하는 기업형 개혁을 추진하며 “거버넌스”라는 개념이 부상했다.
3) 세계화와 다층적 거버넌스(1990년대): 세계화가 가속화되면서, 유엔, IMF 등 국제기구와 NGO, 민간 주체들까지 규범을 만들고 적용하는 구조가 확장되었고, 이는 보다 네트워크화되고 협업적인 통치 형태를 의미하게 되었다.
4) 유럽연합과 지역 거버넌스: 유럽연합의 복잡한 다자 이해관계 모델은 전통적인 국가 위계 구조를 넘어서는 의사결정 방식으로서의 거버넌스 개념을 대중화했다.
5) 기업 거버넌스(1980년대 이후): 엔론(2001년) 등 기업 부패 사건 이후, 투명성과 책임성을 강조하는 기업 거버넌스가 보편적 담론이 되었다.
이 단어 자체는 수 세기 전부터 존재했지만, 오늘날의 의미—효율성, 참여, 제도적 책임성을 포괄하는 의미—는 1990년대 이후 지배적인 방식으로 확립되었고, 정치학, 경제학, 조직 이론의 중심 개념으로 자리 잡았다.
이 어원적 설명(엄밀한 인용이 필요하지만)은 왜 “거버넌스”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많은 사람들이 움찔하는지를 설명해 준다. 이 단어는 그 폭넓은 사용례를 고려할 때, 신자유주의 프로젝트와 밀접하게 결합된 개념이기 때문이다.
나는 트럼프 행정부가 컬럼비아로부터 이끌어낸 “거래”를 두고 “임시 거버넌스(ad hoc governance)”라고 언급하면서, 분명 그보다도 더 퇴행적인 어떤 것을 가리키고자 했다. 하지만 나는 이 개념을 어원적으로 위치시켜 보는 것이 데이비드의 훌륭한 글에 반응하면서 제시할 두 번째 논점을 설명하는 데도 중요하다고 느낀다.
#2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명명하든 간에, 트럼프식 “즉흥 규제(ad hoc regulation)” 혹은 “거버넌스”는 역사적 기원을 갖는다. 데이비드 역시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거래에 의한 규제는 특정한 조건에서 유용한 역할을 할 수 있다. 예컨대, 행정부가 특정 주체와의 협력이 시급하고, 이를 수행할 입법적 권한이 있으며, 거래의 불확실성이 도덕적 해이를 줄이거나 법적 준수를 촉진할 수 있다고 판단할 때 그러하다. 2007~2008년 금융위기는 이러한 조건을 충족시켰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설명은 다소 추상적이고 비역사적이다.
이 논점을 다른 방식으로 정식화하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즉, 현대 권력—자본주의 권력뿐 아니라 다른 유형의 권력까지 포함해—은 법치주의와 결코 단순한 관계를 맺지 않는다는 점이다. 자본주의 권력은 자신들이 법치주의와 시장경제가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것이라 주장하고 싶어 하고, 그렇게 믿기를 원한다. 그러나 그것은 이데올로기다. 예외 상태, 비상사태, 위기, 임시조치들은 시스템의 ‘버그’가 아니라, 그 자체로 시스템이 생산해 내는 ‘특성’이다.
국제관계 시스템은 자의적인 폭력을 생산하고 재생산하며, 자본주의 경제는 위기를 통해 팽창하고 성장한다.
그리고 최소한 20세기 초 이후, 자본주의적 거버넌스의 하나의 형태로서 ‘즉흥적 개입’이 등장할 수 있음은 분명해졌다. 2008년에 목격된 바로 그 형태다.
이러한 거버넌스 양식의 가장 극적인 형태는, 프란츠 노이만(Franz Neumann)이 나치 체제를 분석한 걸작에서 명명한 ‘비국가(un-state)’ 또는 ‘베헤모트(Behemoth)’라고 할 수 있다.
나는 파시즘이 이와 같은 통치 형태의 가장 극적인 사례라고 말했지만, 오늘날 미국에서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것이 파시즘이라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트럼프 = 파시즘”이라는 말도 안 되는 등식을 쉽게 떠올리게 되는 이유는 대체로 ‘자유주의적 현실’에 대한 어리석고 단순화된 서술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우리가 만약 현대 권력—자본주의적이든 그 외의 것이든—이 법치주의와 결코 직선적인 관계를 맺은 적이 없다는 점에서 출발한다면, “규제”라는 이상화된 모델은 결국 이상화된 모델에 불과하다는 점, 규제와 정부, 거버넌스의 경계선은 언제나 흐릿하며 용어들조차도 그 흐릿함을 반영한다는 점을 인정하게 된다. 그럴 경우 진짜 물음은, 특정 시점에서 이 불안정한 질서를 어떤 방식으로 관리하고 있는가이다. 어떤 도구들이 사용되고 있는가? 어떤 “담론”과 정당화가 동원되고 있는가? 어떤 것이 거래로 간주되고, 어떤 것이 아닌가?
이런 점에서 보면, 2008년은 실로 예외적인 거버넌스의 역사적 순간이었다. 당시 이루어진 “거래들”을 단지 “유용했다”고 부르는 것은 그 중요성을 너무 낮춰 말하는 것이다. 정치적으로 볼 때, 그것은 명백히 질서가 이탈된 순간이었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예외에만 집착해서는 ‘정상 상태’에 대한 환상을 품어서는 안 된다.
트럼프 행정부가 보여주는 ‘협박에 의한 통치’는 스타일, 어조, 강도 면에서 분명한 변화이지만, 동시에 오늘날 미국의 기업·비즈니스·공공 영역을 특징짓는 조잡한 ‘법 전쟁’과 임시적 거래 만들기라는 방식의 연장선에 있다. 이 흐름은 고액 이혼 소송에서부터 “채권자 간 폭력”, 그리고 수많은 법정 밖 합의까지 이어지며, 사실상 오늘날 대부분의 분쟁이 그렇게 “해결”되고 있다. 미국의 고위 법률가들이 벌이고 있는 일이라는 게 바로 이것 아닌가? 오늘날 미국에서 “법”이라는 말을 꺼내는 순간, 그 말에는 위협, 강요, 공갈, 파괴적이고 임의적인 수수료, 불투명한 거래, 숨겨진 조항, 인생을 파괴하는 악의적 소송, 그리고 표현의 자유에서 테러 혐의까지의 기괴한 도약이 함께 따라붙는 것이 아닌가?
이러한 시민 법 전쟁의 일상적 패턴이 바로 트럼프 행정부가 백악관으로 옮겨온 모델이며, 이제는 법률 사무소를 거쳐 행정 국가의 그간 더 “점잖은” 영역들로까지 확장된 것이 아닌가?
이것이 미국에 좋은 일인가? 아마도 아닐 것이다. 효율성 면에서 좋은가? 법률 비용을 국내총생산(GDP)의 정당한 기여로 간주할 수 있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다면 아니다. 이것이 문명의 종말이자 장기적 쇠퇴의 징후인가?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문명의 종말이 어떤 모습일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지금 위협이 되는 “야만적이고”, 퇴폐적이며, 즉흥적인 비체계, 이 “비국가”는 “민주당이 재집권하지 않으면 생겨날 미래의 일”이나 “트럼프가 3선하면 미국 공화국이 무너질 위기” 같은 것이 아니다. 이것은 이미 우리 앞에 놓인 현실이며, 이것이 지금 여기의 미국이 작동하는 방식이다.
이 사실은 충격일 수 있겠지만, 사실 우리는 그 외의 다른 방식을 별로 알지 못한다. 그것은 우리가 정말로 상아탑 속에 은둔하지 않는 이상 말이다. 이 혼란 그 자체가 미국 권력을 생산하고 재생산해온 기반이지, 우리가 간헐적으로 예외를 해결하기 위해 이탈하는 어떤 이상화된 체계가 아니다. 이 “비국가”는, 그 모든 임의성, 권력 게임, 형태 없음에도 불구하고, 바로 오늘날 우리가 실존적으로 마주하고 있는 자유주의적·서구적·‘미국식’ 근대성 그 자체다.
덧붙이자면, 이러한 퇴행성은 미국에만 고유한 것도 아니다. 미국에만 특이한 사례도 아니다. 여기에는 어떤 예외주의도 없다.
유럽도 그 나름의 법 전쟁, 그로테스크한 위선, 상처 입은 자유주의적 자기애를 가지고 있다. 난민들과 유로존 위기를 겪은 그리스인들, 독일의 친팔레스타인 시위자들에게 말이라도 걸어보라.
각 경우마다 이 “비국가”는 그 사회가 가진 법치주의 체제의 고유한 논리와 역사, 그리고 그 사회가 보유한 법적 야만의 부족적 문화에 따라 특수한 색을 띤다. 그러나 권력과 법 사이의 이 뒤틀린 관계는 특정 국가의 특수성이 아니라, 근대성 일반의 특징이다.
내 동료 세일라 벤하비브(Seyla Benhabib)는 언젠가 “민주주의적 반복(democratic iterations)”이라는 개념을 언급한 바 있다. 우리가 지금 생각해야 할 것은, 바로 “비국가의 반복(iterations of the unstate)”이다.
[번역] 이꽃맘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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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덤 투즈(Adam Tooze)는 컬럼비아대학 교수이며 경제, 지정학 및 역사에 관한 차트북을 발행하고 있다. ⟪붕괴(Crashed)⟫, ⟪대격변(The Deluge)⟫, ⟪셧다운(Shutdown)⟫의 저자이다. 참세상은 이 글을 공동 게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