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자에 대한 이스라엘 군사 점령의 역사

이스라엘의 현재 가자 집단학살과 최근 발표된가자시 점령 계획은 이 작은 땅에 대한 이스라엘 군사 점령의 길고도 고통스러운 역사 일부다.

출처: Taylor Brandon, Unsplash

이스라엘의 집단학살이 바닥을 쳤다고 생각할 때마다이 나라는 새로운 악의 심연을 파고든다가자에서의 이스라엘의 집단학살 에너지는 바닥이 없는 듯하다.

목요일집단학살이 시작된 지 거의 2년 만에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폭스 뉴스에서 이스라엘이 가자지구 전체에 대한 군사적 통제권을 장악할 계획이라고 발표했다금요일이스라엘 안보 내각은 가자시를 점령하는 계획을 승인했으며이 과정에서 가자시의 모든 팔레스타인 민간인을 대규모로 추방하게 된다이 계획이 실행되면, 2005년 8월 이스라엘이 가자에서 일방적으로 철수한 지 정확히 20년 만에 이스라엘의 세 번째 가자 군사 점령이 시작되며이는 수십 년간 이어진 잔혹한 폭력대규모 학살과 인종청소끝없는 추방의 역사를 완결짓게 된다물론 이스라엘이 이미 가자에서 점령군이 아니었던 적은 없다유엔에 따르면이스라엘은 여전히 가자를 점령하고 있다육지·하늘·바다에서 그 지역을 계속 통제하고 있기 때문이다이스라엘은 그곳에서 인종청소 계획을 거리낌 없이 떠벌리며이제는 사람 없는 가자를 원한다이는 군사 점령의 외피를 쓴 정착민 식민주의 캠페인이다.

가자는 이스라엘과 전쟁 중인 국가가 아니다지구에서 가장 큰 난민촌이다팔레스타인 전체 면적의 1.3%에 불과한 좁은 땅에, 200만 명 중 다수가 70년 넘게 존재해온 비좁은 난민 캠프에서 살고 있다.

이 모든 것은 나크바(Nakba) 당시 시작됐다. 1948년 이스라엘 건국 시 팔레스타인인들이 대규모로 쫓겨난 사건이다. 75만 명이 넘는 팔레스타인인이 강제로 땅과 집에서 쫓겨나 평생 난민이 됐다이 중 약 25만 명이 마지막으로 살아남은 지중해 연안의 팔레스타인 도시 가자로 몰려들어 하룻밤 새 인구가 세 배로 늘었고가자는 사막과 바다 사이에 낀 거대한 난민촌이 됐다팔레스타인 250개가 넘는 마을과 도시가 파괴되면서 쫓겨난 주민들을 수용한 가자는나크바 이후 팔레스타인의 노아의 방주가 됐다.

비극이 너무나 심각해 유엔은 그해 팔레스타인 난민 구호를 위한 특별기구유엔 팔레스타인 난민 구호기구(UNRPR)를 설립했고곧 이를 계승한 유엔 팔레스타인 난민 구호사업기구(UNRWA)가 본부를 가자시로 이전했다.

가자로 몰려든 난민 대부분은 팔레스타인 중부와 남부그리고 멀리 갈릴리까지 북부의 도시와 마을 출신이었다그러나 가자 주변 마을 출신들은 잃어버린 땅과 집이 눈앞에 보이는 곳에서 쫓겨나는 비극을 겪어야 했다이스라엘 군 지도자 모셰 다얀은 나중에 이렇게 고백했다.

유대인 마을은 아랍 마을이 있던 자리에 세워졌다너희는 이 아랍 마을들의 이름조차 모를 것이고나는 그것을 탓하지 않는다왜냐하면 지리 교과서가 더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책이 없을 뿐 아니라아랍 마을 자체가 사라졌기 때문이다나흘랄(Nahlal)은 마흘룰(Mahlul) 자리에 세워졌고키부츠 그바트(Kibbutz Gvat)는 지브타(Jibta) 자리에키부츠 사리드(Kibbutz Sarid)는 후네이피스(Huneifis) 자리에케파르 예후슈아(Kefar Yehushu’a)는 탈 알슈만(Tal al-Shuman) 자리에 세워졌다이 나라에서 과거 아랍 인구가 없었던 곳에 세워진 마을은 단 한 곳도 없다.

이렇게 뿌리 뽑힌 팔레스타인인의 폐허 위에 세워진 정착촌들은 나크바를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존재였다팔레스타인 난민의 목소리를 대변한 고(레바논 작가 엘리아스 쿠리의 말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나할 오즈(Nahal Oz)는 이스라엘군 나할(Nahal) 부대가 설립한 군사 정착촌으로마을에서 쫓겨나 가자에서 난민이 된 팔레스타인 농민들을 괴롭히기 위해 세워졌다.”

그 뒤 70여 년 동안가자의 암울한 난민 현실은 이 작은 땅에서 길고도 고통스러운 이스라엘 군사 점령의 역사를 촉발했다.

이스라엘의 잔혹한 침공

1956년 11첫 번째 가자 점령에 나서며 이스라엘군은 가난한 난민 캠프를 군사적으로 습격하며 가자를 침공했다이 점령은 당시 가자를 통치하던 이집트를 상대로 한 3자 침략전(수에즈 전쟁중 벌어졌다시작은 일련의 끔찍한 학살이었다이스라엘 군인들은 칸 유니스(Khan Yunis)에 들어가 모든 성인 남성을 집에서 끌어내어 문 앞이나 거리에서 총살했고최소 520명이 살해됐다.

심지어 남쪽의 라파(Rafah)도 이스라엘의 침공과 대량 학살에서 안전하지 못했다. 11월 12이스라엘군은 라파의 난민 캠프를 침입해 남성 주민들을 모아 수백 명을 냉혈하게 살해하거나 부상 입혔다희생자들의 시신은 라파 서쪽의 텔 주라브(Tell Zurab) 지역에 버려졌고가족들은 통행금지 속에서 목숨을 걸고 시신을 수습해 매장해야 했다대부분의 매장은 신원 확인 없이 이루어졌다이 피비린내 나는 사건은 라파 학살로 알려지며 난민 캠프 전역에 공포의 물결을 일으켰다.

이렇게 해서 가자는 처음으로 이스라엘 점령이 어떤 것인지 맛보았다가자 전역에서 수천 명의 민간인이 살해·부상당했고수백 명의 포로가 즉결 처형됐다적십자는 그 참상을 공포의 장면이라고 묘사했다상황이 너무 끔찍해가자에 주둔한 유엔 감시단장이었던 E. L. M. 번스(Burns)는 이스라엘의 만행이 가자 난민 인구를 말살하려는 의도였으며이는 국제법상 집단학살 행위에 해당한다고 경고했다.

가자는 본질적으로 나크바 당시 이스라엘 영토 안의 집과 땅에서 쫓겨난 팔레스타인인들이 모여 형성된 거대한 난민촌이었기 때문에이스라엘은 역사상 처음으로 원주민을 몰아내고망명으로 내몰고그들을 점령한 점령국이 됐다. (1980년대 초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은 그곳 팔레스타인 난민들에게도 같은 운명을 안겼으며이는 유엔이 집단학살 행위로 규탄한 사브라·샤틸라 학살로 절정에 달했다.)

이스라엘 군 지도자 다얀조차 그 참혹한 현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그는 그 해 이렇게 고백했다. “그들의 우리에 대한 끔찍한 증오에 대해 우리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지난 8년 동안그들은 가자의 난민 캠프에서 앉아자신과 그 조상들이 살던 땅과 마을이 우리의 집으로 변하는 모습을 똑똑히 지켜봤다.”

그러나 나크바는 시작에 불과했다팔레스타인인들을 몰아낸 것으로 만족하지 않은 이스라엘은 가자를 수시로 침공해 공포를 퍼뜨리고 일련의 학살을 자행했다. 1948년 이후 이스라엘군은 자주 가자 난민 캠프를 습격해 수천 명의 난민을 살해·추방하고그들의 집과 캠프를 파괴했다. 1949년 1나크바의 피비린내 나는 기억이 여전히 가자에 생생하던 시절이스라엘군은 데이르 알발라(Deir al-Balah)와 칸 유니스의 식량 배급소를 가장 붐비는 시간대에 폭격해 수백 명의 팔레스타인인을 살해했다집으로 돌아가려 한 난민들은 이스라엘에 의해 침입자로 낙인찍혔고군인들은 그들을 발견 즉시 사살했다.

1953년 8훗날 이스라엘 총리가 되는 아리엘 샤론(Ariel Sharon)이 이끄는 이스라엘 군부대는 부레이지(Bureij) 난민 캠프를 침공해 침대에 누워 있던 50여 명을 살해했다유엔 관계자들에 따르면이스라엘군은 팔레스타인 난민이 잠자고 있던 오두막 창문에 폭탄을 던지고도망치려는 사람들을 향해 총을 쐈다유엔 조사위원회는 이 학살을 의도적 대량살인의 소름끼치는 사례로 규정했다.

이러한 반복된 학살은 가자 난민 인구를 인종청소하려는 더 광범위한 이스라엘 계획의 일부였다나크바 이후네게브와 시나이 사막 사이 해안지대에 수십만 명의 팔레스타인 난민이 갇혀 탈출이나 분산의 가능성이 없는 상황을 이스라엘 건국 지도자들특히 다비드 벤구리온(David Ben-Gurion)은 위험 요소로 보았다가자 난민 인구와 팔레스타인 귀환권 가능성그리고 가자에서 이스라엘로 몰려오는 난민 물결의 광경을 두려워한 이스라엘은 이 문제를 말살로 해결하려 했다.

그 시도가 실패하자이스라엘은 가자를 재점령하러 나섰다.

학살 위에 학살

1967년 전쟁이 다시 발발하자 이스라엘은 두 번째로 가자를 침공했다전쟁에서 승리하는 데는 6일이 걸렸지만가자를 장악하는 데는 4년이 걸렸다이 저항은 두 번째 대탈출을 촉발했고여전히 첫 점령의 기억에 시달리던 수만 명의 난민들이 해안지대를 떠나 요르단과 이집트로 도망쳐 결코 돌아오지 못했다이렇게 해서 이스라엘의 두 번째그리고 수십 년에 걸친 가자 점령이 시작됐다.

1967년 이후에도 가자의 난민 인구는 이스라엘 지도자들을 괴롭혔다. ‘이주 계획이 넘쳐났다가자의 난민들이 20년 전 자신들을 쫓아낸 바로 그 세력의 통제하에 놓인 긴 점령 기간 동안레비 에슈콜과 다얀을 비롯한 이스라엘 지도자들은 가자 난민을 요르단강 서안이나 이집트 시나이이라크혹은 북아프리카의 아랍 국가(‘리비아 작전’)로 옮기는 방안을 검토했다심지어 모셰 다얀 계획이라는 비밀 작전을 세워가자 난민을 비행기로 라틴아메리카로 이주시킬 계획까지 세웠으나다행히도 그 계획은 비용과 실행 가능성 문제로 무산됐다.

군사 점령에 만족하지 못한 이스라엘군은 곧바로 가자의 팔레스타인인들을 뿌리 뽑고그들의 집을 파괴하며토지를 빼앗아 쫓겨난 난민들의 폐허 위에 유대인 정착촌을 세웠다정착촌이 번성하는 동안 팔레스타인인들은 점령 하에서 고통받았다.

심지어 평화조차 가자 난민에게는 큰 대가를 요구했다. 1979년 캠프 데이비드 협정은 가자와 이집트의 국경을 폐쇄해 가시철조망으로 가족을 갈라놓았고새로 설정된 국경선을 따라 인구를 강제 이주시키고 주택을 철거했으며가자 어부들의 전통적인 이집트 영해 접근권을 빼앗았다시나이의 이스라엘 정착촌 철거는 가자에서의 정착촌 활동 증가로 보상됐다.

두 번째 인티파다 동안거의 40년의 장기 점령 끝에 이스라엘은 겉으로는 가자에서 철수해 백만 명이 넘는 난민을 남겨두었다이스라엘 지도자들은 해안지대에서 철수하면서, ‘탈착(Disengagement)’이라는 명분 아래 가자 난민 문제를 마침내 덮어버렸다고 자신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계속해서 가자의 국경영공영해를 통제했다이 빈곤한 지역을 적대 영토로 선언하고난민 인구를 실존적’ 규모의 안보 위협으로 간주하며 불균형한 무력 사용이 필요하다고 주장한 이스라엘은가자 주민 전체를 집단 처벌에 지속적으로 노출했다군사 작전과 침공도 계속됐다이 철수는 대외적으로는 양보점령 종료가자와 난민에 대한 의무 이행으로 포장됐다.

실제로 철수는 난민 인구를 군사 침공과 정복의 손쉬운 표적으로 만들었고캠프의 일부 구역은 이스라엘 순찰대의 접근 금지 구역으로 지정됐다한편 이스라엘은 정착민들을 요르단강 서안과 가자 주변의 새로운 정착촌으로 옮겼고머지않아 가자는 전면 봉쇄 상태에 놓였다.

거의 20년 동안 이스라엘은 가자에 전면 봉쇄를 가하고인구를 주기적으로 공격·습격하며결국 현재 진행 중인 집단학살로 이어지는 잔혹한 장을 열었다그 모든 시간 동안 가자의 난민들은 수십 년 전 자신들을 인종청소한 바로 그 세력의 멍에 아래 살아야 했다폭격과 봉쇄도살장 같은 포위그리고 이스라엘이 만든 철창 속에 갇힌 채가자 난민들은 자신들 비극의 깊이를 절감하게 됐다추방보다 더 끔찍한 것은 떠날 수 없다는 것이다많은 이들이 여전히 떠나는 것이 두 번째 나크바를 의미할 것이라 두려워하고이스라엘 지도자들은 이를 집요하게 추진하려 해왔다.

나크바 이후 거의 매년 이스라엘군은 가자를 침공했다수십 년 동안 이스라엘은 가자에 대해 군사 침공과 점령습격과 공세군사 진입과 행정 통치폭격과 공습반복된 학살과 대규모 인구 추방현재까지 이어지는 수년간의 봉쇄그리고 끝이 보이지 않는 집단학살을 가했다.

가자에 대한 이스라엘의 잔혹함은 종종 저항을 낳았다난민 역사 덕분에 가자는 돌 투쟁으로 알려진 첫 인티파다의 발원지가 되었고이는 베트남 캠프라는 별명이 붙은 자발리아 난민 캠프에서 무장하지 않은 젊은 팔레스타인 난민들에 의해 시작됐다가자는 또한 두 번째 인티파다의 상징적인 전장이 되었는데부레이지 난민 캠프 인근 교차로에서 열두 살 무함마드 알두라(Muhammad al-Durrah)가 아버지 품에서 총에 맞아 숨진 장면이 봉기의 아이콘이 되었다.

프랑스 역사학자 장피에르 필리유(Jean-Pierre Filiu)에 따르면이스라엘은 나크바 이후 가자에서 최소 15차례 전쟁을 벌였고이는 가자의 4,000년 된 문명을 거의 파괴했다봉쇄 이후 벌어진 5차례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수십만 명의 팔레스타인인을 살해하고 200만 명 이상을 추방했다. 2014년 여름 보호선 작전’ 동안이스라엘군은 가자에서 2,000명 이상의 팔레스타인인을 학살했다팔레스타인의 두 차례 대중 봉기(인티파다)는 이스라엘에 의해 잔혹하게 진압됐다심지어 7년 전 팔레스타인인들이 가자의 봉쇄벽 안에서 나크바를 기념하는 귀환 행진을 벌였을 때조차이스라엘은 연을 날리던 아이들을 포함해 수백 명을 무자비하게 살해했다오늘날가자 집단학살이 시작된 지 거의 2년이 지난 지금과거의 학살은 가자에서 매일 반복되는 광경이 됐다.

비극적인 아이러니는지금 학살·추방당하는 가자 난민들이 77년 전 바로 이스라엘이 전쟁 속에서 만들어낸 존재라는 점이다이번에는 난민들이 갈 곳조차 없다는 것이 다르다.

그럼에도 가자 난민에 대한 이스라엘의 집착은 완전히 잘못된 것만은 아니며분명 팔레스타인의 굳건한 저항에 부딪힐 것이다쿠리가 말했듯, “70년 동안 난민들은 증오와 죽음으로 잠긴 가자의 문을 두드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그들은 그 자물쇠가 부서질 때까지 계속 두드릴 것이며팔레스타인은 물과 흙으로 뒤덮인 자신의 사람들에게 손을 뻗어그들의 죽음에서 삶으로 향하는 문을 세울 것이다.”

[출처] A History of Israel’s Military Occupations of Gaza

[번역] 하주영 

덧붙이는 말

세라즈 아시(Seraj Assi)는 워싱턴 D.C.에 거주하는 팔레스타인 작가이며, 최근 저서로 『내 외국인의 삶』(My Life As An Alien, 타르타로스 프레스)이 있다. 참세상은 이 글을 공동 게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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