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태국과 캄보디아가 전쟁을 벌이며 국제 사회를 충격에 빠뜨렸다. 파괴적인 국경 분쟁은 대중적 민족주의의 폭발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양국 정치 엘리트들이 약화한 정통성을 보완하는 데 필요한 ‘시선 분산’에서 나왔다.
8월 7일 쿠알라룸푸르에서 열린 국경위원회(GBC) 임시 회의 이후, 나타폰 낙파닛(Nattaphon Narkphanit) 태국 국방 장관 대행과 티아 세이하(Tea Seiha) 캄보디아 국방 장관이 국경 긴장 완화를 목표로 한 13개 항의 휴전 합의서에 서명했다. 출처: TNAMCOT English
동남아시아 정치를 오래 지켜본 전문가들마저 놀라게 한 사태가 벌어졌다. 지난달 태국과 캄보디아가 전쟁을 벌였고, 수십 명이 사망했으며 수십만 명이 집을 잃고 피란길에 올랐다. 전투는 보병 간 교전에서 민간 지역을 강타한 포격과 로켓 공격에 이르기까지 확산했고, 실제 전투에 한 번도 투입된 적 없던 전투기까지 동원됐다.
무엇을 위해서였을까? 수백 년 된 국경 사원과 폐허, 그리고 모호한 문화적 자부심 주장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전쟁을 비이성적인 발작이나 오해로만 보는 것은 본질을 놓치는 일이다. 이 갈등은 오래된 돌덩이를 두고 벌어진 싸움이 아니라, 정치적 생존을 위해 민족주의 신화를 조작한 엘리트들의 결과였다.
정통성 위기에 직면한 태국과 캄보디아의 지배층은 지지를 결집하고 자신의 실패에서 대중의 시선을 돌리기 위해 오래된 수단인 민족주의를 꺼내 들었다. 민족주의로의 회귀는 동남아시아에서 새로운 전술이 아니다. 이는 제국주의와 식민주의, 그리고 근대 국가가 ‘타자’에 맞서 자신을 규정하려 했던 역사적 유산이며, 이번 경우 그 ‘타자’는 프랑스 제국주의자들이 그어놓은 국경 너머에 있었다.
고대 제국과 현대의 국경
오늘날 우리는 캄보디아를 작고 가난한 나라로 인식할 수 있지만, 천 년 전 이곳은 거대한 크메르 제국(802~1431)의 중심지였으며, 그 영토는 비잔틴 제국보다도 넓었다. 전성기에는 현재의 캄보디아, 태국, 라오스, 베트남 남부, 그리고 미얀마와 말레이시아 일부까지 다스렸다. 수도 앙코르는 최대 백만 명이 거주했으며, 세계에서 가장 화려한 건축물로 꼽히는 앙코르와트(Angkor Wat), 바이욘(Bayon), 반테이 스레이(Banteay Srei) 같은 종교 기념물을 보유했다. 그 규모는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수준이었다.
크메르 제국은 만달라(mandala)형 통치 모델을 따랐다. 이는 중앙집권적이지 않고 유연하며, 경계가 유동적이고 동맹이 수시로 바뀌는 방식이었다. 근세 동남아시아에서 이러한 모호한 경계는 중앙집권 왕국들 간의 충돌을 피하는 데 도움이 됐다. 그러나 식민지 시대에 이 회색 지대는 강제로 확정된 국경선으로 바뀌었고, 이는 근대에 들어 폭발적인 갈등의 씨앗이 됐다.
15세기에 들어 크메르 제국은 쇠퇴했고, 서쪽의 시암(아유타야)과 동쪽의 대월(Đại Việt)이 부상했다. 시암은 1431년 앙코르를 함락시켰고, 크메르의 통치 방식과 미학적 요소를 자국 문화 속에 흡수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오늘날 우리가 ‘태국적’이라고 여기는 궁정 의식, 건축양식, 심지어 무에타이(Muay Thai)까지도 크메르에서 많은 부분을 물려받았다. 2023년 동남아시아 경기대회에서 개최국 캄보디아가 킥복싱 종목을 ‘쿤 크메르(Kun Khmer)’로 표기하자, 태국은 이에 항의하며 대회를 보이콧했다.
앙코르 시대의 사원들은 완전히 버려지지는 않았지만, 대다수는 사용되지 않게 됐다. 사원 단지를 포함한 캄보디아 서부 지역은 시암의 지배를 받았고, 그 사이 베트남 왕국은 메콩 델타를 장악하며 베트남 정착민들을 강 상류로 이주시켰다. 캄보디아는 양국의 왕실에 의해 조종되는 지정학적 ‘축구공’이 되었고, 1834년에는 베트남이 캄보디아 대부분을 합병했다. 크메르의 봉기는 실패했고, 왕국이 독립을 되찾은 것은 1847년이었다.
당시 평범한 백성들에게 이 모든 일은 ‘국가 정체성’과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살아남는 것, 그리고 마을을 점령한 낯선 군대에 맞서는 것이었다. 현대적 민족주의 의미의 ‘크메르인’이나 ‘태국인’이라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한 개념이 등장한 것은 19세기에 유럽 식민주의가 개입한 이후였다.
제국이 만든 발명품
19세기 중반, 프랑스는 베트남 남부를 점령하고 캄보디아를 전략적 자산으로 노렸다. 아시아 지리에 무지했던 프랑스 제국주의자들은 메콩강이 중국으로 통하는 후방 경로가 될 것이라 기대했다. 노로돔(Norodom) 국왕은 1863년 프랑스의 보호를 받아들였고, 이를 통해 시암과 베트남의 위협에서 벗어나길 바랐다.
그러나 캄보디아는 곧 식민지의 변두리로 전락했다. 메콩강은 중국으로 가는 교역로로 전혀 쓸모가 없었고(왜 현지인들에게 이 거대한 강을 항해할 수 있는지 물어보지 않았는지 의문이 남는다), 프랑스는 인프라나 교육에 거의 투자하지 않았다. 대신 베트남인 공무원들을 행정 인력으로 대거 들여와 크메르인의 반감을 키웠다.
그럼에도 프랑스는 크메르 정체성을 정의하는 데 큰 공을 들였다. 이는 존중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캄보디아를 태국의 영향력에서 차단하기 위한 전략이었다. 역사가 페니 에드워즈(Penny Edwards)는 저서 『캄보디아: 한 나라의 형성(Cambodge: The Cultivation of a Nation)』에서, 프랑스 고고학자와 식민지 학자들이 유적, 언어, 불교를 통해 ‘크메르다움(Khmerness)’이라는 개념을 재구성하려 한 과정을 보여준다. 그 목적은 캄보디아의 정체성을 태국과 베트남의 대안적 정체성에서 분리하고, 프랑스의 식민 통치를 강화하는 것이었다.
1907년, 프랑스는 시암을 압박해 프레아 비히어(Preah Vihear)를 포함한 캄보디아 서부 3개 주를 반환하게 했다. 1904년과 1907년의 프랑스–시암 조약으로 그어진 이 국경선은 훗날 전쟁의 불씨가 됐다.
태국의 지도 그리기
태국(당시 시암)은 제국주의의 규칙에 적응함으로써 유럽의 식민 지배를 피한 몇 안 되는 나라였다. 몽꿋(Mongkut) 왕과 출랄롱꼰(Chulalongkorn) 왕 치세에 시암은 ‘방어적 근대화’에 착수했다. 철도, 학교, 중앙집권적 관료제는 왕국을 근대 국가로 변모시켰다.
이 과정의 핵심은 민족주의였다. 전 정치범이자 역사학자인 통차이 위니짜쿨(Thongchai Winichakul)은 저서 『시암 지도 그리기: 국가 지리적 몸체의 역사』(Siam Mapped: A History of the Geo-Body of a Nation)에서, 시암 엘리트들이 왕국을 영토화되고 주권을 지닌 실체로 상상했으며, 중앙 태국 문화를 국가 표준으로 격상시켰다고 설명한다. 크메르, 라오, 말레이, 중국계 등 소수 민족들은 강제 동화의 대상이 됐다. 20세기에 들어 ‘태국인’은 더 이상 문화적 정체성이 아니라 정치적 프로젝트가 됐다.
1914년, 와치라붓(Vajiravudh) 국왕은 악명 높은 반중(反中) 에세이 「동양의 유대인」(The Jews of the East)을 발표했다. 도시에 거주하는 중국계, 동북부의 라오·크메르계, 남부의 무슬림 말레이계, 그리고 북서부의 고산족들은 지난 한 세기 동안 다양한 형태의 태국화(Thaification) 정책을 겪어야 했다.
파시스트 성향의 총리 플렉 피분송크람(Plaek Phibunsongkhram) 원수는 이 프로젝트를 가속했다. 그는 1939년 국가 이름을 ‘태국(Thailand)’으로 바꾸고 초민족주의 캠페인을 전개했다. 정부는 “국가, 종교, 국왕”과 같은 구호를 내세우는 한편, 소수 민족을 깎아내렸다.
이러한 극우 민족주의는 태국이 냉전 시기 미국의 확실한 동맹국이 되는 데 이바지했다. 태국은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로 향하는 미군 폭격기의 공군기지를 제공했고, 휴가 중인 미군을 위한 해변 휴양지도 내줬다. 심지어 타낫 코만(Thanat Khoman) 외무장관은 1968년 로즈 퍼레이드(Tournament of Roses)의 그랜드 마셜을 맡았는데, 135년 역사상 유일하게 아시아인이 이 직책을 맡은 사례였다.
그 이후로 태국 정치는 군사 쿠데타로 점철됐다. 거의 끊임없는 정치적 격변 속에서도, 군주주의자·군부·민간 세력 등 모든 파벌은 권력 유지를 위해 민족주의에 의존해 왔다. 미국 외교협회(Council on Foreign Relations)에 따르면, 태국은 1932년 이후 최소 24차례의 쿠데타를 겪었다.
프레아 비히어 지역(프레아 비히어 사원의 이름을 딴, 현재 캄보디아의 지방). 출처: Bram Wouters, Unsplash
프레아 비히어
1953년 캄보디아가 독립한 뒤, 태국은 1907년 작성된 지도에 따라 프레아 비히어(Preah Vihear) 사원이 캄보디아 영토로 표시된 것은 무효라고 주장하며 그 지위를 문제 삼았다. 1962년 국제사법재판소(ICJ)는 캄보디아의 손을 들어줬지만, 태국은 이 결정을 절대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문제는 캄보디아가 내전(1967~75)과 크메르 루주(Khmer Rouge)의 학살 정권(1975~79)을 거쳐, 베트남의 점령기(1979~89)에 접경 지역이 난민촌으로 가득 차면서 잠시 가려졌다. 그러나 근본적인 긴장은 절대 사라지지 않았다. 2008년 캄보디아가 프레아 비히어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는 데 성공하자, 태국 민족주의 단체들은 정부가 민족적 자존심을 내줬다고 비난하며 인근 국경 지대를 점거했다. 이어 무력 충돌이 발생했다.
캄보디아는 다시 ICJ에 제소했고, 2013년 재판소는 사원뿐 아니라 그 주변 지역까지 캄보디아 영토임을 재확인했다. 그럼에도 태국 군대는 여전히 현장에 주둔했다. 프라삿 타 무언 톰(Prasat Ta Muen Thom)과 프라삿 타 크라베이(Prasat Ta Krabey) 같은 다른 분쟁 지역의 크메르 사원들도 분쟁의 불씨가 됐다. 그리고 10여 년간의 잠잠함은 2025년에 깨졌고, 국경 충돌은 지금까지 중 가장 심각한 폭력 사태로 번졌다.
이 분쟁은 단순히 영토 문제만이 아니다. 이는 문화적 소유권, 민족주의 신화, 해결되지 않은 식민지 유산의 문제다. 태국은 지리적 현실을 들어 프레아 비히어가 자국 쪽에서 접근하기 더 쉽다고 주장하며 ICJ 판결을 무시한다. 캄보디아는 크메르 제국의 정통한 계승국임을 내세우며, 사원 주권에 대한 어떤 도전도 국가의 존재 자체를 위협하는 것으로 본다.
제국의 지도 제작
이 분쟁의 핵심에는 프랑스가 만든 제국주의식 지도 제작이 있다. 1904~1907년의 조약은 국경이 당렉(Dangrek) 산맥의 분수령을 따라야 한다고 명시했지만, 프랑스 측 측량가들은 프레아 비히어(Preah Vihear)가 캄보디아 영토에 속하도록 지도를 작성했다.
태국은 이 지도에 동의한 적이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ICJ는 1962년 이 주장을 기각하며, 태국이 식민지 시기에 이러한 지도 사용에 대해 단 한 번도 항의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태국 왕국은 국경지대를 영국과 프랑스의 제국주의 계획에 기꺼이 양도했기 때문에 유럽 식민 지배를 피한 세계 몇 안 되는 지역 중 하나였다.
아름다운 해안선과 섬들로 시선을 돌리면, 해양 문제도 마찬가지로 첨예하다. 양국은 해상 경계가 겹치는 구역을 서로 주장한다. 캄보디아가 1972년, 태국이 1973년에 각각 영유권을 제기했다. 2001년 양국은 공동 개발을 제안하는 양해각서를 체결했지만, 정치적 불안정 속에서 무산됐다. 육상 국경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해양 영유권 분쟁 역시 식민지 시대의 잔재다.
캄보디아 프레아 비히어 국가관리위원회(The National Authority for Preah Vihear)는 7월 말 태국군의 드론 및 공습 이후, 프레아 비히어 세계문화유산 지역 내 125곳에 대한 피해 예비 평가를 완료했다. 출처: Khmer Times
엘리트 민족주의, 가난한 자들의 전쟁
그렇다면 왜 2025년에 이런 극적인 격화가 나타났을까? 답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의 정치 상황에 있다. 태국에서는 보수 왕당파-군부 블록이 여전히 불안정하다.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가 뿌리 깊은 권력 구조에 계속 도전하고 있다.
캄보디아에서는 훙 마넷(Hun Manet) 총리가 부친 훙 센(Hun Sen)으로부터 토지 강탈, 연줄 자본주의, 탄압으로 얼룩진 극도로 권위주의적인 체제를 물려받았다. 고령의 훙 센이 여전히 주요 결정을 장악하고 있다는 사실은 새 지도자의 신뢰도를 갉아먹고 있다. 두 정권 모두 정통성이 없다. 민족주의는 유용한 도피처다.
사원 전쟁은 역사보다는 정치적 위기에 관한 것이다. 이는 방콕과 프놈펜의 엘리트들이 부패, 불평등, 탄압에서 대중의 시선을 돌리기 위해 신화를 무기화하는 일이다. 정통성이 흔들릴 때, 그들은 국기와 국경, 그리고 폐허를 내세운다. 유혈 사태는 두 정권 모두를 강화했다. 정치학자 폴 챔버스(Paul Chambers)는 방콕에서 군부가 이번 위기를 이용해 민간 통치에 맞서 권력을 공고히 하고 있다고 밝혔다.
베네딕트 앤더슨(Benedict Anderson)이 말했듯이, 국가는 ‘상상된 공동체’다. 그러나 그 상상 과정이 항상 온건한 것은 아니다. 탈식민 동남아시아에서 그것은 해방이 아니라 지배의 도구가 된 경우가 많았다. 문화적 자부심과 배타적 폭력 사이의 경계는 얇다.
그 경계를 넘는 대가를 치르는 것은 시골의 가난한 사람들이다. 그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장군, 재벌, 관료들이 아니다. 이것은 사원을 둘러싼 분쟁이 아니다. 권력과 기억, 그리고 누가 국가를 정의할 권리를 가질 것인가를 두고 벌이는 싸움이다.
[출처] The Thailand-Cambodia War Was About Shoring Up Elite Power
[번역] 하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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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G. 반(Michael G. Vann)은 캘리포니아 주립대학교 새크라멘토 캠퍼스 역사학 교수이며, 『위대한 하노이 쥐 사냥: 제국, 질병, 그리고 프랑스 식민지 베트남의 근대성』(The Great Hanoi Rat Hunt)의 공저자다. 참세상은 이 글을 공동 게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