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웨덴에서 군국주의가 부상하고 있다

스웨덴은 오랫동안 군국주의를 거부해왔고, 심지어 평화운동에 정부 자금을 지원하기도 했다. 그러나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정치적 분위기가 급격히 바뀌었고, 스웨덴의 나토(NATO) 가입을 반대하는 활동가들을 상대로 마녀사냥이 벌어지고 있다.

스웨덴 노르셰핑 노동박물관에서 '모든 사람의 입술에 나토가 있다'는 제목으로 열린 나토 가입 비판 전시회. 출처: 노르셰핑 노동박물관 홈페이지 

스톡홀름에서 남쪽으로 약 160킬로미터 떨어진 노르셰핑(Norrköping)의 노동박물관에서는 스웨덴의 만화가들이 나토 가입에 반대하며 벌인 항의 운동을 다룬 전시가 열리고 있다. 이 전시는 스웨덴의 신속한 나토 가입을 둘러싼 편향된 여론을 풍자적으로 보여준다.

나토 비판 전시는 박물관 전체 한 층을 차지하고 있으며, 커다란 창문 너머로는 모탈라 강의 장엄한 폭포가 내려다보인다. 이 강은 도시를 스웨덴의 두 번째로 큰 호수인 베테른호(Vättern)와 연결한다. 그러나 202437일 스웨덴의 공식적인 나토 가입은 이 강과 달리 아무런 새로운 길을 열어주지 못했다. 대신 스웨덴 사회는 급격한 군사화와 냉전식 사고방식이 지배하는 정치적 서사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전시에 전시된 삽화들은 스웨덴의 가장 유명한 예술가들과 만화가들이 그린 것으로, 반전 메시지와 중립성 유지에 대한 요구, 그리고 1800년대부터 스웨덴의 공식 외교 정책이었던 비동맹노선의 복원을 향한 갈망을 담고 있다. 작품들은 스웨덴 정치가 국방 정책에서 갑작스러운 급선회를 한 사실과, 나토가 이미 편을 정해놓은 갈등들을 단순화한 분석을 그대로 수용하고 있는 현실을 드러낸다.

스웨덴의 한 저명한 대학교에서 사회학을 가르치는 마리아(가명) 교수는 이 전시를 보기 위해 먼 길을 찾아왔다. 그는 이 방문을 스웨덴의 나토 가입을 받아들이기 위한 일종의 순례라고 표현한다. 마리아는 한숨을 내쉬며 전체 과정이 터무니없었어요. 민주적 기반이라고는 전혀 없었죠라고 말했다. 그는 스웨덴이 나토에 가입한 방식은 차라리 러시아나 튀르키예 같은 독재국가에서 벌어진 일 같았다라고 덧붙였다.

전시장에서 그는 당나귀를 타고 있는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Recep Tayyip Erdoğan) 튀르키예 대통령의 캐리커처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고 웃음을 터뜨렸다. 에르도안 뒤에는 울프 크리스테르손(Ulf Kristersson) 스웨덴 우파 총리가 따라가며 앉아 있다. 이 그림은 나토 가입 과정에서 스웨덴 정부가 튀르키예의 요구를 수용하며 얼마나 큰 타협을 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 과정에서 스웨덴은 정치적 탄압 때문에 망명해 있던 쿠르드인 몇 명을 추방했고, 튀르키예 정보기관에 스웨덴 대공첩보 데이터 접근 권한을 넘겨주었으며, 쿠르드 주도의 무장 저항 세력에 대한 모든 공식적 지원을 철회했다.

방해자 취급을 받은 평화운동가들

스웨덴의 나토 가입 신청 과정에서 벌어진 정치적 타협뿐만 아니라, 평화운동 역시 강도 높은 감시와 비판을 받았다. 나토 회원국 중 마지막까지 스웨덴 가입을 승인하지 않았던 튀르키예와 헝가리를 설득하는 과정에서, 평화와 비동맹, 비공격 노선을 지지하는 목소리는 나토 가입을 방해하는 세력으로 몰렸다. 평화행진을 조직하거나 나토를 평화 수호 동맹이라고 부르는 것에 의문을 제기한 단체들은 가입 절차를 방해한 파괴자라는 비난을 받았다.

스웨덴에서 가장 오래된 평화단체 중 하나이자 세계적으로도 유서 깊은 단체인 스웨덴 평화중재협회(Swedish Peace and Arbitration Society, SPAS)의 회장 케르스틴 베르게오(Kerstin Bergeå)는 스웨덴의 나토 가입을 역사적 실책이라고 규정하며, “비판적 목소리가 설 자리가 거의 없는 상황을 개탄했다. 그는 스웨덴의 평화를 위한 역사적 목소리가 이제 침묵하게 될까 봐 우려된다라고 덧붙였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나토 측 공식 서사는 군비 증강이 안정과 평화를 가져온다라는 전제를 기정사실화해왔다. 서방 언론, 특히 스웨덴 언론 역시 군사 중심의 논조를 취하며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한 평화적 해결책을 점점 배제하는 방향으로 흘렀다. 그 결과 스웨덴 평화운동의 정치적 영향력은 크게 축소됐다. 경제적으로도 정부가 시민사회단체에 지원하던 예산이 대폭 삭감되고, 방위비 증액으로 전용되었다. 요즘은 평화운동을 한다는 걸 공개적으로 말하는 것조차 점점 힘들어지고 있어요.” 30세 평화운동가 마티아스(Mattias)는 이렇게 말했다.

어느 봄날 저녁, 스톡홀름 시내 한복판에 있는 활동가 카페에 몇몇 노련한 평화운동가들이 모였다. 테이크아웃 커피와 함께 우크라이나 전쟁, 가자에서 진행 중인 집단학살, 그리고 스웨덴의 나토화(NATO-fication)’에 대한 자료를 테이블 위에 펼쳐놓고 이야기를 나눴다. “평화”, “군축”, “비동맹이라는 단어들이 카페 안에서 메아리쳤지만, 곧 적막 속으로 삼켜졌다.

마티아스는 씁쓸하게 말했다.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이후 평화운동에 대한 압박은 스웨덴뿐만 아니라 유럽 전역에서 엄청나게 커졌어요. 스웨덴 정부가 사실 오래전부터 나토 가입을 추진할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던 게 분명해요. 딱 조지 W. 부시 행정부가 9·11 테러를 테러와의 전쟁정책을 개시하는 계기로 활용했던 것과 비슷했죠. 아주 치밀하고 교활한 전략이었어요.”

스웨덴은 오랫동안 중립과 비동맹의 상징이었다. 유럽 북부의 외딴 나라였던 스웨덴은 스위스와 함께 두 차례 세계대전에 휘말리지 않았고, 개발도상국에서 정의·평화·연대의 옹호자로 칭송받았다. 스웨덴 정치인들은 스페인의 파시스트 정권을 공개적으로 비판했고, 미국의 베트남 전쟁 개입도 강력히 규탄했다. 그러나 현실은 스웨덴이 오랫동안 스스로에게 부여한 이상적인 자화상과 달랐다. 스웨덴의 자기 이미지는 실제 현실정치를 왜곡하는 렌즈였을 뿐이었다.

스웨덴의 나토 가입을 비판하는 만평으로, 나토의 핵무기는 “귀엽고 착하다”라고 미화하면서 러시아의 핵무기만 “나쁘다”라고 선전하는 선동적 이중 프레임을 꼬집고 있다. 출처: 노르셰핑 노동박물관 홈페이지 

냉전의 전제들

스웨덴이 브뤼셀에 있는 나토 본부에서 열린 국기 게양식에서 공식적으로 나토에 가입한 것은 200년간 유지해 온 공식 중립 정책의 종식을 의미했다. 그러나 이는 완전히 새로운 전환이 아니었다. 사실 스웨덴은 냉전 초기부터 이미 나토의 비공식 동맹국이었다. 서방 군대가 소련을 감시하기 위해 스웨덴 영공과 해군 기지를 활용해 왔다는 사실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바르샤바 조약기구가 붕괴한 뒤, 나토가 미하일 고르바초프(Mikhail Gorbachev) 소련 지도자에게 동진(東進)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어기고 동유럽으로 확장하자 스웨덴은 다양한 조약과 군사 협력 훈련을 통해 북대서양조약기구와의 공식적 협력을 강화했다. 1990년대 보스니아와 코소보, 2000년대 아프가니스탄에서 스웨덴 군인들은 나토 지휘하에서 작전을 수행했다. 2011년에는 사브(Saab)사가 제작한 다목적 전투기 JAS 39 그리펜(Gripen)이 무아마르 가다피(Muammar Gaddafi) 정권을 상대로 한 나토 작전에서 리비아 폭격에 참여하기도 했다.

스웨덴 본토에서도 나토는 수많은 군사훈련을 수행했다. 2008년 진행된 로열 애로(Loyal Arrow)’ 훈련에서는 스웨덴 북부의 라플란드(Lapland) 지역을 모델로 한 가상의 국가 라피스탄(Lapistan)’을 설정하고, 외국 세력이 원주민 사미(Sámi)족의 순록 방목지를 강탈한다는 시나리오로 진행됐다. 스웨덴은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1인당 무기 수출국으로, 막강한 방산 산업을 유지하고 있다.

결국 스웨덴의 나토 가입은 오래전부터 준비된 과정이었다. 공식 가입 이후 스웨덴 사회 전반에서 군사화가 급격히 가속화됐고, 20만 명의 스웨덴 국민이 방산 기업 주주가 되었다. 나토 가입 이후 무기 생산 경쟁이 과열되면서 스웨덴 방산업은 러시아의 침공에 맞선 우크라이나 무장 지원과 나토 회원국들의 ‘GDP 대비 5% 국방비 지출목표를 발판 삼아 급성장하고 있다. 스웨덴의 전투기 JAS 39 그리펜은 이제 페루, 콜롬비아, 체코 등으로 대규모 수출을 앞두고 있다.

평화운동가들의 저항

스웨덴의 나토 가입은 평화운동에 정치적 타격을 줬다. 정부가 방위비 지출을 늘리면서 평화단체에 지원되던 예산이 대거 삭감됐고, 그로 인해 평화단체 종사자들의 일자리도 줄어들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2022년 나토 가입 논의가 본격화된 이후 스웨덴 각지의 평화운동 단체에 가입한 시민 수는 오히려 두 배 이상 늘어났다.

이는 스웨덴 사회가 나토화라는 문제를 두고 합의에 도달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벨라루스 출신으로 리투아니아에서 망명 생활을 하는 민주주의 및 평화운동가 올가 카라흐(Olga Karach)는 스웨덴 시민들에게 경고한다. 나토 편향적 보도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군사화에 무관심한 태도를 유지한다면, 이는 결국 스웨덴 민주주의 구조를 훼손하는 부메랑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나토 옹호 서사는 결국 다른 나라의 권위주의적 선전과 다를 바 없어요. 결과는 똑같아요. 결국 선전일 뿐이에요라고 강조했다.

카라흐는 올해 초 스웨덴평화중재협회(SPAS)가 주최한 행사에서 연사로 초청되어 러시아와 벨라루스의 선전 체제를 사례로 들었다. 전쟁 속에서는 현재밖에 없어요.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죠. 전쟁은 마약과 같아요. 모든 걸 단순화시키고, 전쟁이 모든 문제의 해답인 것처럼 만들어버려요.”

스웨덴 언론인 단 욘손(Dan Jönsson)은 저서 ⟪정치적 황무지⟫(Political Wilderness)에서 스웨덴의 나토 가입 과정을 분석하며 군사화는 이제 스웨덴에서 하나의 정치적 종교가 되었다라고 지적한다. 그는 스웨덴의 안보 개혁을 맥락화하며, 2010년대 중반 이후 스웨덴 정부들은 워싱턴과 브뤼셀에서 내려오는 정책 노선을 거의 그대로 따라왔다는 패턴을 발견했다고 말한다.

욘손은 이렇게 말한다. “2014년 사회민주당 정부가 팔레스타인을 독립국으로 공식 인정했을 때가 스웨덴이 외교 정책에서 마지막으로 독자적 입장을 보였던 순간이에요. 나토 가입 이후 스웨덴은 더 이상 독립적인 시각을 유지할 수 없게 됐어요. 이제 모든 시각은 민간에서 군사로 이동한 셈이에요.”

흔들리는 충성심

평화운동을 향한 공격은 단순히 비군사적 시각을 공적 논의에서 배제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평화운동 내부에서도 입지와 영향력을 둘러싼 갈등이 격화됐다. 이메일 포럼과 소셜미디어 채널에서 주요 평화운동가들은 스웨덴의 국제적 발언권 축소, 평화단체를 하나로 묶을 가능성,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크라이나 전쟁을 두고 격렬하게 대립하고 있다.

이는 스웨덴만의 문제가 아니다. 대부분의 서구 사회에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좌파 활동가 공간에 심각한 분열을 초래했다. 나토 자체에 대한 비판은 평화단체와 사회운동을 단일한 목소리로 묶어내지만, 러시아의 특별군사작전에 대한 해석에서는 의견이 극명하게 갈린다.

스웨덴의 주류 언론은 일부 발언을 선택적으로 인용해 평화운동 전체를 푸틴 옹호자”, “배신자”, “러시아 선전기계에 이용당하는 바보들이라고 공격하는 데 열을 올렸다. 스웨덴 북부에서 활동하는 평화운동가 엘레나(Elena)는 이렇게 말했다. 장기적 관점에서 보면, 정치권은 평화운동을 현실과 동떨어진 집단이라고 비난할 구실을 충분히 확보한 셈이에요. 우리 스스로도 문제를 키웠죠. 러시아 크렘린의 선전 논리가 평화주의적 입장과 뒤섞이는 걸 막지 못한 탓이에요. 하지만 한 가지 기본적인 사실은 분명히 지적했어요. 나토가 스웨덴에 평화를 가져오지 않는다는 거예요. 오히려 우리를 영구적 전쟁 준비 체제속에 편입시키고 있을 뿐이에요.”

엘레나는 공무원으로 일하고 있다. 그가 일하는 부서는 나토(NATO)에 대한 비판적 발언이나 반군사주의적 게시물을 개인 소셜미디어에 올리는 것만으로도 상급자들의 의심을 살 수 있고, 심지어 충성심이 흔들린다는 비난을 받을 수 있는 곳이다. 엘레나는 이렇게 말한다. 아이러니해요. 나토를 비판한다는 이유만으로 반역자’, ‘푸틴 옹호자라는 꼬리표가 붙을 수도 있다는 이 공포심이요. 제가 학생 시절 더 나은 삶을 찾아 중립국 스웨덴으로 도망쳤을 때, 남미에서 바로 그런 정치적·사회적 분위기를 피해 떠난 거였어요. 그런데 지금 스웨덴이 나토라는 단 하나의 정치적 북극성을 따르기 시작한 이후, 우리 사회도 결국 과거 제가 떠나온 두려움과 불안에 사로잡힌 사회들처럼 막다른 골목으로 향하고 있어요. 결국, 과도하게 부풀려진 남성적 군사주의 체제라는 품속으로 파고들고 있는 셈이에요.”

부고(Obituary)

노르셰핑의 노동박물관에서는 나토 비판 전시회를 보기 위해 관람객들이 계속 들어오고 있었다. 하지만 전시회는 다음 날 해체되고 전혀 다른 전시로 교체될 예정이다. 출구 옆에 놓인 유리 케이스 안에는 한 아이가 손바닥을 올려둔 부고문이 있었다. 부고문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사랑하는 우리의 비동맹 정책 1815~2024. 떠나 우리를 깊은 슬픔에 빠뜨렸다. 정치가 스웨덴 국민을 배신했다. 우리는 잊지 않을 것이다. 장례식은 없다 — 우리의 비동맹 정책은 반드시 부활할 것이다.”

출처: 노르셰핑 노동박물관 홈페이지

현재 상황을 보면, 스웨덴 사회의 나토화는 경제·군사·정치 전반에 걸친 장기적 프로젝트로 굳어지고 있다. 주류 언론에서 이를 비판하는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는다. 권력과 영향력의 중심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1850년대 중반 노동운동과 보통선거권 운동에서 출발한 스웨덴 평화운동은 살아남기 위해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 있다. 하지만 정부 보조금이 끊기면서, 수많은 사회단체와 평화 네트워크들은 오랫동안 풀뿌리 평화활동을 계획하고 논의하던 사무실과 공간에서 쫓겨나고 있다.

예컨대 스웨덴 제2의 도시 예테보리(Göteborg) 도심에서는 한 지역 평화단체가 사무실 전체를 철거하는 중이다. 임대료가 너무 비싸졌지만, 단체는 공간을 유지할 자금이 없다. 베테랑 평화운동가 미카엘(Mikael)은 스웨덴의 나토 가입 자체도 개탄하지만, 그보다 더 비극적인 것은 사회·경제·정치적 영향에 대해 국민이 보이는 철저한 무관심이라고 말한다.

나토가 스웨덴 경제에 요구하는 건, 시민 사회에 쓰이던 예산을 군사 인프라로 돌리라는 겁니다.” 미카엘이 말한다.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에요. 지금 스웨덴 사회 전체가 군사화되고 있어요. 그래서 우리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해요. 우리는 어떤 사회를 원하나요? 평화운동과 반군사주의 목소리가 공적 공간에서 추방당하고, 대신 군산복합체가 모든 걸 지배하는 사회를 원하나요?”

미카엘은 잠시 말을 멈추고, 스웨덴 평화운동이 수십 년 동안 자리를 지켜온 사무실을 둘러본다. 이곳은 최근 정치 개혁 덕분에 건물주가 시장 임대료로 임대할 수 있게 되면서, 정부 지원을 받지 못하는 단체들이 완전히 배제되는 상황에 놓였다. 솔직히 대중은 우리가 평화운동을 계속하든, 아니면 그냥 짐을 싸서 밤중에 사라지든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아요.” 미카엘이 덧붙인다. “지금 스웨덴 정치권이 바라는 건 단 하나예요. 우리가 모두 입을 닫고, 군사화에 순응하고, 나토가 들려주는 이야기만 믿으라는 거죠.”

그러고는 미카엘은 씁쓸하게 웃으며 말한다. 이건 단순히 자신의 심정일 뿐 아니라, 오늘날 정치 지형 속 스웨덴 평화운동 전체의 처지를 대변하는 말이었다. 나토가 세계 평화와 안정에 기여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나토가 처음 창설될 때부터 명확했어요. 나토의 역사를 조금만 공부해본다면 그걸 누구나 알 수 있습니다.”

[출처In Sweden, Militarism Is on the Rise

[번역] 이꽃맘 

덧붙이는 말

클라스 룬드스트룀(Klas Lundström)은 스톡홀름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탐사 보도 기자이자 작가다. 참세상은 이 글을 공동 게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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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 탄압 나토 군국주의 평화운동 가입 중립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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