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유토피아 이후: 중국, 미국, 지속가능발전, 그리고 하이에크의 사생아들

2015년은 세계 역사에서 특별한 순간이었다정확히 10년 전 이달유엔 총회는 지속가능발전목표(SDGs)를 결의했고이어 12월에 파리 기후 협약이 체결되었다이는 보편적 목표에 대한 전례 없는 합의의 순간이었으며개혁적 글로벌 거버넌스의 정점이었다표현을 빌리자면그것은 마지막 유토피아의 순간이었다.

10년이 지난 2025년 3두 번째 트럼프 행정부는 유엔에서 가장 이례적인 표현으로 이 협정들을 비난하며 공식적으로 등장했다다음은 유엔에서 미국 대표가 낭독한 연설문이다:

비록 중립적인 언어로 포장되어 있지만, 2030 아젠다와 지속가능발전목표(SDGs)는 미국의 주권과 양립할 수 없으며 미국인의 권리와 이익에 해로운 연성 글로벌 거버넌스 프로그램을 추진한다.

지난 미국 대선에서 미국 국민은 분명한 명령을 내렸다미국 정부는 미국인의 이익에 다시 집중해야 한다우리는 무엇보다도 우리 자신의 이익을 우선적으로 돌봐야 하며그것이 우리의 도덕적·시민적 의무다트럼프 대통령은 또한 SDGs 전반에 스며든 젠더와 기후 이데올로기에 대해 분명하고 때늦은 방향 전환을 제시했다.

간단히 말해, 2030 아젠다와 SDGs와 같은 글로벌리스트적 시도들은 선거에서 패배했다그러므로 미국은 지속가능발전 2030 아젠다와 지속가능발전목표를 거부하고 비난하며그것을 당연히 재확인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올해 초 미국 정부가 행한 이 주목할 만한 비난 수사를 다룬 바 있다.

트럼프의 미국이 소리 없이 무너뜨린 지속가능성

트럼프 행정부가 보여주는 우파적 주권주의의 부활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하나의 해석 가능성은 4월 중순 출간된 퀸 슬로보디언(Quinn Slobodian)의 신간 ⟪하이에크의 사생아들⟫(Hayek’s Bastards)이 제시하고 있다.

항상 그렇듯 슬로보디언은 우리를 우파의 사고방식 속으로 흥미로운 여행에 데려간다그러나 내가 그의 분석에서 특히 매혹적으로 느끼는 것은 그것을 구성하는 더 큰 질문이다. 1990~2000년대 서방이 소련과의 냉전을 승리로 끝낸 뒤 신자유주의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누군가는 그것이 신자유주의의 최대 승리 순간이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결국 1990년대에 워싱턴 컨센서스라는 용어가 만들어지지 않았던가그러나 슬로보디언이 지적하듯최소한 신자유주의의 어떤 근본주의적 흐름에 있어서는 그것이 승리의 순간이 아니라 위험의 순간이었다.

이 책은 자연에 대한 호소가 냉전 이후 수십 년 동안 신자유주의자들이 직면한 문제에 대한 해법의 핵심을 이뤘다고 주장한다공산주의는 죽었지만그들이 말하듯 레비아탄(Leviathan, 강력한 국가 권력을 상징하는 개념)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자본주의가 유일하게 살아남은 경제 체제였음에도 공공지출은 계속 확대되었다그 배경에는 정치적 문제가 있었다. 1960~70년대의 사회운동은 시민권페미니즘소수자 우대생태 의식을 정치 공동체의 혈관 속에 주입했다정치적 올바름과 피해자 의식은 자유로운 담론을 마비시키고 정부 의존과 특권 요구의 문화를 키웠다신자유주의자들은 해독제를 필요로 했다불평등 시정을 요구하는 지속적인 목소리가 효율성·안정·질서를 위협하자그들은 인종·지능·영토·화폐 문제에서 자연을 끌어와 진보 세력의 요구를 막아내고사회 변화를 되돌려 유전과 전통에 뿌리를 둔다고 상상한 성·인종·문화적 위계질서를 복원하려 했다.

슬로보디언이 얘기하듯신자유주의를 헌정적 설계가 아니라 투쟁적 신조로 받아들인 이들에게 소련 공산주의의 패배는 새로운 전투의 시작일 뿐이었다그리고 초기 단계부터 생태와 환경주의라는 아이디어가 그 중심에 있었다슬로보디언이 인용한 1991년자 <월스트리트 저널>은 이렇게 말했다.

세계의 자유시장 학자 그룹 중 선두인 몽펠르랭 소사이어티가 소련에서 공산주의가 붕괴한 주간에 회합을 연 것은 적절했다… 공산주의가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하자자유에 대한 주요 위협은 더 높은’ 가치를 위해 인간의 복지를 종속시키려는 사회주의와 같은 유토피아적 환경운동에서 올 수 있다.” 공산주의는 카멜레온이었다붉은색에서 녹색으로 변하고 있었다경쟁기업연구소의 프레드 스미스는 10년 뒤 몽펠르랭 소사이어티 회의에서 경고했다. “우리가 한때 경제적 진보주의라는 깃발 아래 행진했던 세력이 이제 새로운 환경주의 깃발 아래 재편되었다.”

적어도 말할 수 있는 것은몽펠르랭의 이 분파가 선견지명이 있었다는 점이다인권과 환경주의라는 교양 있는’ 가치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새로운 권력 구도는 바로 2015년 SDGs와 파리 기후 협약이라는 이중의 결정을 통해 절정에 달했다.

물론 이것은 사회주의가 아니었다하지만 공공-민간 파트너십이나 ESG 같은 새로운 라벨로 치장한 새로운 몰록이었다다니엘라 가보르(Daniela Gabor)가 일찍이 새로운 복합체로 지목했던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더 이상 세계은행과 IMF를 중심으로 한 워싱턴 컨센서스가 아니라민간 자본을 중심으로 한 월스트리트 컨센서스였다. SDGs 같은 목표는 보편적 가치로 칭송받았고넷 제로가 장기 목표로 설정되었다모든 것이 개발과 기후 금융이라는 의제 아래 글로벌 공공-민간 파트너십과 혼합 금융으로 틀지어졌다가보르가 인식했듯이는 최소한 수사적 차원에서 인도주의적 글로벌 목표를 향해공공 행위와 시너지 속에서그러나 노골적으로 이윤 추구를 지향하는민간 자본의 기치 아래 세계 정책을 재편한 것이었다이것은 슬로보디언이 신자유주의적 해법주의라 부르는 최신판이었다.

이것은 궁극적 탈정치화 행위로도 읽힐 수 있었다더욱 포괄적인 차원에서 역사의 종언을 선언하는 최종 발언이었다슬로보디언은 새로운 우파가 어떻게 내부로부터 이에 맞서 결집했는지를 훌륭하게 보여준다새로운 우파의 원초적 민족주의와 인종주의는 신자유주의와 모순된 것이 아니라 그 내부에서 태어난 것이었다.

그러나 2025년 3월 미국 외교관들의 성명서를 더 읽어보면 또 다른 전환이 보인다기후와 젠더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난이 이어진 뒤두 번째 방향 전환이 등장한다:

우리는 또한 결의안의 표제에 포함된 평화적 공존이라는 표현이 중국의 평화 5원칙을 유엔이 승인한 것처럼 오해될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한다이는 회원국 간 유엔 절차를 통해 합의된 것이 아니며유엔 절차로 승인된 것도 아니다… 마찬가지로 문명 간 대화라는 개념은 시진핑 국가주석의 글로벌 문명 이니셔티브에서 비롯된 것으로중국은 이를 통해 자국의 통치 체제와 인권 침해에 대한 비판을 회피하고민주주의·인권·정의와 같은 기본 용어들의 의미를 유엔 헌장과 같은 기초 문서에 규정된 원래의 정의에서 벗어나 중국의 이익에 맞게 왜곡하려 한다.”

여기서 겨냥된 적은 글로벌 자유주의 엘리트가 아니라 중국공산당이었다.

놀랍게도중국은 슬로보디언이 연구하는 급진적 집단에 큰 영향을 끼치지 못한 듯 보인다그의 저서에 중국은 단 두 번 등장한다그가 지적하듯이들은 1980년대 아시아적 가치’ 담론에 흥미를 느꼈고일부는 벨 커브에서의 아시아인의 우월성 문제를 걱정했다.

그러나 2015/월스트리트 컨센서스의 붕괴특히 미국 권력이 그것으로부터 이탈한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중국을 배제할 수 없다이는 슬로보디언의 집단이 제기한 발전주의와 보편적 가치에 대한 질문을 무시하자는 것이 아니라그것을 다른 차원에서 다시 묻자는 것이다.

역사적 관점에서 이를 틀지으려면, 2010년 새뮤얼 모인의 ⟪마지막 유토피아⟫(The Last Utopia)라는 지적 역사 저작으로 돌아가는 것이 유용하다.

마르셀 고셰(Marcel Gauchet) 같은 프랑스 역사철학자들이 제시한 거대 서사를 끌어오며새뮤얼 모인은 1970년대 보편적 인권법의 지배 아래 통일된 세계라는 비전의 부상이 탈식민 발전과 그에 내재 민족 주권의 약속이 신뢰를 잃어가는 과정과 동시에 나타났다고 서술했다냉전 종식 이후국제 관계의 황금 표준으로서 보편적 인권이 부상한 것은 곧 미국의 단극 패권이 공고히 되는 과정과 함께 이루어졌다.

따라서 2015년 SDGs가 성취한 것처럼글로벌 발전이 인권이라는 열쇠로 재구성되는 것이 이들의 노골적인 탈정치화와 함께 이루어진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SDGs는 역사적으로 집합적 행위와 주권의 문제와 유기적으로 연결된 발전 문제를 핵심성과지표(KPI) 행렬로 축소한 비범한 사례였다전면에 나온 것은 모기장 보급초등 교육성평등 문제였지만불평등과 빈곤 문제를 근본적으로 형성해 온 굴욕의 세기와 불평등 조약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이미 2015년 당시에도 SDGs는 시대에 뒤떨어졌다고 말할 수 있다결국 2015년의 글로벌 합의는 서방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를 둘러싼 충돌중동에서의 폭력 격화그리고 그 결과로 유럽에서의 대규모 이주와 원초적 반발이 맞물린 이후에 등장했기 때문이다유엔 회의장에서 샴페인이 터지고 있던 바로 그때유럽연합 집행위원장 장클로드 융커는 다중 위기를 경고하고 있었다동시에 2015년 5베이징은 중국제조 2025’ 프로그램을 출범시켰고이는 곧 서방의 의식 속에 두 번째 중국 충격을 각인시켰다.

내가 보엘 재단에서의 강연에서 주장했듯되돌아보면 2015년은 새로운 장의 개막이라기보다 마지막 기회의 살롱에 가까워 보인다. 2015년의 순간 직후 곧바로 2016년의 포퓰리즘 반발이 이어진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10년이 지난 지금내가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에 올린 다소 논쟁적인 글에서 주장했듯발전을 포괄적 인도주의적 구제와 번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으로 보는 그 탈정치화된 비전은 현실과의 접점을 완전히 상실해버렸다.

아이러니하게도미국이 SDGs를 비난하면서 인정했듯, 2015년의 기준을 가장 크게 떠받치고 있는 세력은 중국이다베이징은 모든 패를 쥐고 있다서방이 제공할 것이 거의 없음을 알고 있으며이미 발전 전쟁에서 승리했다영아 사망률기아인프라 같은 문제에 집중함으로써 중국은 시민적 자유에 대한 어떤 논의도 잠재울 수 있었다. 2021년 중국은 SDGs의 핵심 물질적 요소를 밀어붙이기 위해 자체적인 병행 노력인 글로벌 개발 이니셔티브(Global Development Initiative)를 출범시켰다역사가 자신 편이라고 확신하는 세력으로서중국은 글로벌 발전주의 의제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반면 미국은 더 이상 보편주의라는 사치를 감당할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나는 슬로보디언이 분석한 신자유주의 우파의 지적 역학에 대한 내부적 설명과 미국 패권 쇠퇴라는 넓은 시각을 구분해 모순을 지적하려는 것이 아니다두 가지는 함께 맞물려 있다미국 패권 쇠퇴라는 분절된 정치문화 속에서 하이에크의 사생아들은 충분히 활동하고 영향력을 행사할 공간을 찾는다그러나 이 관계는 필연적이라기보다 우연적이다이를 이해하려면트럼프 1.0과 트럼프 2.0 사이의 바이든 시기를 살펴보면 된다.

바이든 팀은 정상성을 회복하고 있다고 강조하기 위해 노력했다파리 기후 협약에 재가입했고 SDGs에도 형식적으로 동조했다. 2021년 글래스고에서 열린 첫 유엔 기후 회의에서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을 시작으로 정의로운 에너지 전환 파트너십(JET-Ps, Just Energy Transition Partnerships)을 출범시켰다.

JET-Ps는 SDGs와 월스트리트 컨센서스의 융합을 보여주는 전형적 사례였다그러나 내가 이전에 주장했듯실질적 내용은 전혀 없었다.

반면 중국 문제에서는 바이든 팀이 선을 그었다기술 제재를 강화했고중국을 봉쇄하기 위한 글로벌 동맹 체계를 구축했다경제와 관련해서는 좁은 마당높은 울타리라는 구호가 그들의 사고의 정점이었다이는 강대국 경쟁과 경제 발전 사이의 긴장을 해소하기 위해노골적인 경쟁의 금지 구역과 우호적 경쟁의 구역을 구분하는 것이었다그러나 긴장을 완화하기는커녕이 슬로건은 미국이 무엇이 허용 가능한 발전이고 무엇이 아닌지를 정의하겠다는 주장을 분명히 했을 뿐이다그리고 결정적으로바로 재닛 옐런 재무장관이 속내를 드러냈다그는 투키디데스 함정이나 전쟁 위협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언급했다단지 중국이 자기 궤도 안에 머무르며 미국의 힘에 도전하지 않는 성장 경로에만 머문다면 괜찮다는 것이었다이는 미국이 평화의 조건을 독단적으로 규정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발언이었다.

만약 2020년대가 새로운 장의 시작이라면두 역사 ― 슬로보디언과 모인의 출발점 ― 과의 대비가 눈에 띈다.

1970년대모인의 출발점에서 미국은 베트남 패배와 1973년 석유 충격으로 흔들리고 있었지만그에 대한 대응은 부활한 신보수주의였다. 1990년대슬로보디언이 시작점을 두는 시기에는 미국이 냉전에서 승리를 주장할 수 있었다그때 역시 민주주의와 자유 같은 보편적 가치를 내세운 신보수주의가 새로운 신조로 등장했다현재 순간과의 대비는 극명하다최근 한 용감한 친구가 NATCON5에 참석한 뒤 내게 보고한 바에 따르면그가 목격한 기조연설들에서 공통으로 흐르는 단 하나의 주제는 이렇다고 한다미국은 하나의 국가다그것은 하나의 국민이다(sic). 그러나 미국은 하나의 이상이 아니다미국은 하나의 이념이 아니다.

[출처Chartbook 408: After the Last Utopia: China, the US, sustainable development and Hayek's bastards.

[번역이꽃맘 

덧붙이는 말

애덤 투즈(Adam Tooze)는 컬럼비아대학 교수이며 경제, 지정학 및 역사에 관한 차트북을 발행하고 있다. ⟪붕괴(Crashed)⟫, ⟪대격변(The Deluge)⟫, ⟪셧다운(Shutdown)⟫의 저자이다. 참세상은 이 글을 공동 게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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